조선 유생들 ‘초의차’ 감복해 서간 보내다

(사진 왼쪽부터) 다산 정약용의 장남 유산 정학연이 보낸 편지와 차남 정학유의 아들 정대무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초의차를 매개로 다산과 그의 아들, 손자는 대를 이어 초의 선사와 교류했다.

초의에게 유산 정학연(1783~1859)과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그의 행로에 중요한 의미를 던진 인물들이다. 무엇보다 유산은 다산의 장남으로 초의와는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강학하던 시절에 인연을 맺었고, 초의가 추사를 만난 것은 유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초의의 막후 후원 세력이라는 점이며 이들이 차와 사를 통해 오랫동안 교유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뿐 아니라 초의는 이들의 자제들과도 막역한 교유를 이어갔는데, 그 매개물이 차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초의는 자신이 만든 차를 통해 선비들의 차에 대한 관심과 애호를 끌어냈던 것이다.

정약용 자제들도 초의와 교류
정학연, 정대무 서간서 나타나

차 내리며 초의 그리워한 정학연
정대무 매년 초의차 받고 감동해
수행자로서 초의를 스승으로 모셔

이러한 사실은 유산이 초의에게 보낸 시에서도 확인되며 유산의 동생인 정학유의 아들 정대무(1824~?)의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유산 정학연의 시를 살펴보자. 그 크기는 31.6×24.4cm이다. 묵서 지본으로 유산이 자신이 지은 시를 적어 초의에게 보낸 듯 한데 이 시가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의가 마현을 찾았던 1830년경에 지은 것이라 여겨진다. 그가 차를 즐기며 초의를 생각한 정황은 다음과 같다.

차 향기 구불구불, 가는 귀밑머리 터럭처럼 피어나고(篆午茶煙兩絲)
휘장을 걷으면 아련히 본래 스님을 보는 듯한데(披宛見本來師)
홍상을 입고, 거듭 유지遊地를 떠나겠구려.(小紅棠發重遊地)
한결같은 푸른 강은 옛날 건널 때가 아니리니(一碧江非舊渡時)
나는 정말로 그대가 절교하는가 생각했다네.(我正疑君曾屬絶)
그대는 나를 위해 오히려 천천히 가는데(君其爲我尙栖遲)
푸른 산, 불국은 신선이 사는 곳이라(靑螺佛國仙山路)
전에 기약했던 것 묻고 싶지만 기약할 수가 없구려.(欲問前期未有期)

윗글은 아마 초의가 두 번째 상경했다가 대흥사로 돌아간 후의 정황을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가 “차 향기 구불구불, 가는 귀밑머리 터럭처럼 피어나고/휘장을 걷으면 아련히 본래 스님을 보는 듯한데/홍상을 입고, 거듭 유지(遊地)를 떠나겠구려”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별의 아쉬움을 그린 것이다. 유산은 차를 끓이는 상황에서도 초의를 그리워했고 당시 승려들의 법복이 홍가사였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초의가 수행하는 곳, 대흥사는 바로 불국토이며 초의처럼 신선이 사는 것이란다.

언제 다시 만날까 기약한들 다시 만나기 어려운 정황을 “전에 기약했던 것 묻고 싶지만 기약할 수가 없구려”라고 했다. 시는 말의 묘미를 가장 잘 살릴 수 있으니 시인을 사백(詞伯)이라 칭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 시 하단의 협서에는 당시 유산의 심정을 잘 그려낸 듯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오랫동안 초의선사를 뵙지 못했는데 이미 산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하산(霞山)에서 돌아오니 갑자기 자리에 계신 듯하여 더욱 기쁘고 또 기이하였다. 마치 다시 연사(蓮社)로 돌아온 것 같았다.(久未見草衣師 意已歸山 余自霞山還 忽見在座 喜且奇 如更從蓮社來也)

아마 1830년경 상경했던 초의는 애초 계획대로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대흥사로 돌아간다. 당시 유산은 초의를 한동안 보지 못했던 듯하다. 그가 하산으로 돌아와 보니 마치 초의 스님이 계시는 듯 했으며 연사, 즉 절에 돌아와 있는 듯 하다는 것이니 이들의 우정은 이처럼 끈끈했고 신의가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편 유산의 조카 정대무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이는 초의와 다산가가 대를 이어 교유를 나눴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정대무는 정학유의 아들로 다산의 손자이다. 그가 조부 다산이 저술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와 1903년 장지연(張志淵)이 증보한 〈대한강역고(韓疆域考)〉에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1860년 5월에 보낸 이 편지는 그 크기는 41.6×29.4cm이다. 초의선사 탑하(榻下)라고 시작하는 편지 내용은 이렇다.

작년 겨울,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살펴보셨는지요. 지금 운곡雲谷이 와서 위로하시는 (스님의 편지를) 읽으니 그 감동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다만 근자에 경서를 공부하며 도의 경지가 풍족하시다니 실로 위로되고 축원합니다. 저의(朞服人:상중에 있는 사람) 가문은 불행히도 백부의 상을 당해 심통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집의 대들보가 부러졌으니 집안을 어찌해야 합니까. 매번 비통에 젖어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남쪽 대둔사에 있는데 갈 수가 없으니 향로실에서 법을 말하는 스님의 게를 들을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보내주신 차는 매년 세금처럼 보내주시니 저는 고저산에 차밭을 둔 것일까요. 그 맑은 향이 마음에 스며듭니다. 이런 진귀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천리에서 편지가 이르니 이미 너무도 마음속에 굳게 맺혀 잊어지지 않는데 두강처럼 좋은 차를 보내신 은혜는 더욱더 머리를 굽혀 감사드리게 합니다. 장차 이 공덕을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해안(海眼)은 아버지의 병환으로 오지 못한다고 하며 들어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하니 나를 위해 말한 것입니다. 도자기 그릇을 보내려고 했지만 날씨가 너무 덥기 때문에 보낼 수가 없다고 하니 무척 아쉽습니다. 모두 미루고 가을에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860년 5월 11일 (단오가 지난 지 6일 후에) 기복인(기복 상중에 있는 사람) 정대무 돈수 정으로, 중국 먹(墨)을 보냅니다.

昨冬敎律便 付書矣 入照否 今於雲谷來 卽讀慰狀 其感當何如 第審邇者 經履道 實慰勞祝 朞服人 家門不幸 伯父喪事 沈慟何言 而棟梁折 家其何爲 每於悲感之餘 思到南社 恨不鞋襪 以往說法聞偈 於香爐室中也 惠茶 歲輸其稅 我置顧渚田耶 其淸香沁脾 可是珍謝 千里致書 已極 而頭綱之惠 尤極僕僕 將以何答此功德耶 海眼以親不來云 聞來不覺然 爲我言及也 瓷器欲送 而以日熱之故 未能負去云 甚歎甚歎 都留 秋來可攄 不備謝狀 庚申 端陽後六日 期服人 丁大懋 頓首 唐墨一笏表情

이 편지에는 “보내주신 차는 매년 세금처럼 보내주시니 저는 고저산에 차밭을 둔 것일까요. 그 맑은 향이 마음에 스며듭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고저산은 당대부터 공차(貢茶, 황제에게 올리는 차)를 생산하던 곳으로, 호주(湖州) 장성현(長城縣)에 있다. 육우(733~ 804)도 호주의 고저산에서 나는 차를 으뜸으로 쳤다. 따라서 정대무는 초의가 보내주는 차를 고저산 차처럼 명차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년 세금처럼 차를 보냈다고 하니 초의의 성의는 이처럼 변함이 없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초의차에 대한 유생들의 평가는 정대무뿐만이 아니었다. 초의와 교유했던 경향의 선비들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더구나 1860년대 초의차는 완성도가 가장 무르익을 무렵이므로 이런 격찬은 당연하다 여겨진다. 아무튼 초의는 다산가의 후손들과 차로 맺어진 아름다운 교유를 이어갔다. 어느 시대나 차는 아름다운 이들의 교유를 풍요롭게 하는 매개물이었던 셈이다.
정대무는 자신을 기복인(期服人)이라 표현하였다. 이는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문은 불행히도 백부(伯父)의 상을 당해 심통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집의 대들보가 부러졌으니 집안을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정대무의 백부(伯父), 즉 큰아버지는 바로 정학연을 말하는데, 정학연이 돌아간 해가 1859년이다. 백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슬픔은 마치 집안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듯 하다고 한 그의 비통함은 당시 집안의 슬픔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이런 집안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위로를 받았던 것은 초의의 법문이었다.

이는 그가 “매번 비통에 젖어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남쪽 대둔사에 있는데 갈 수가 없으니 향로실에서 법을 말하는 스님의 게를 들을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향로실은 초의가 거처한 곳의 당호(堂號)로, 추사가 제주 유배 시절 일로향실(一爐香室)이란 당호를 써 준 바가 있으니 아마 일로향실을 향로실(香爐室)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런 추사의 호의는 초의가 보낸 차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이들의 우의(友誼)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드러낸 것이니 격의 없는 인간의 우정이란 이런 것이리라.

정대무의 편지에는 초의에게 도자기를 보내려고 했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바로 “도자기 그릇을 보내려고 했지만 날씨가 너무 덥기 때문에 보낼 수가 없다고 하니 무척 아쉽습니다. 모두 미루고 가을에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가 편지를 보낸 시점이 음력 5월 단오 무렵이니 막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는 때이다. 대략 마현에서 해남까지는 20여 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으니 가을로 미룬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산가와 도자기와의 관련은 한 때 정학연은 왕실 도자기를 생산했던 광주 관요를 관리하던 하급 관리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 관요의 관리는 정학연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의 후손들이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기에 도자기를 초의에게 보낸다고 한 것이리라.

초의는 다산, 정학연, 정학유의 후원을 잊지 않고 그들의 후손들과도 대를 이어 교유하는 아름다운 신의를 보였던 인물이었다. 이런 자료를 통해서 초의의 수행자다운 품행이 드러난 셈이다. 인천(人天)의 스승이었던 초의선사라. 그와 교유했던 유생들은 초의차를 통해 위안과 여유를 느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