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운문종의 명교계숭 선사

오계·십선계로 유교5상 비교
“理·行 불가분 관계”

송대는 중국 전통문화가 전환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이며, 동시에 인도불교가 중국화로 완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명교계숭(明敎契嵩ㆍ1007~1072 혹은 佛日契嵩)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북송 불교계에 많지 않은 문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는 많은 저서를 지었는데 핵심 의제는 바로 불교와 유교의 조화 및 회통 융합이다. 특히 불교 관점의 효도관은 불교사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으로 유가의 효도관과 불교의 효도관을 비교 분석하고 회통한 새로운 시각의 작품이다. 특히 중국 전통 논리인 이효위본(以孝爲本ㆍ효를 근본으로 삼는다)은 종법(宗法ㆍ씨족사회 부계가장제도)사회의 기본 규칙이다. 비록 불교의 효도관과 유가의 효도관은 충돌할 수밖에 없지만, 그는 양가의 효도관을 회통해서 통합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관점은 북송 중엽에 유학의 부흥과 이학(理學)의 건립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명교계숭 선사의 속성은 이(李) 씨에 자(字)는 중영(仲靈)이며, 자호(自號)는 잠자(潛子)로서 출생은 지금의 광시성 등현(廣西藤縣)이다. 송진종(宋眞宗) 경덕(景德) 4년에 출생했으며, 신종희영(神宗熙寧) 5년, 66세에 입적하였다. 내외전에 정통했던 그는 7세에 출가, 13세 때 삭발하고 14세 때 구족계를 받았다. 법호는 계숭(契嵩)이다. 19세 때 천하를 유역하기 시작하였고 명사를 참방하기도 했다. 그 후 강서 균주(筠州ㆍ지금의 강서성 高安) 동안사(洞安寺)에서 법을 얻은 그는 청원행사(靑原行思) 계통의 운문종 선사이다. 그는 다작을 저술했는데, 그의 문집을 보면 아래와 같다. 〈담진문집(津文集)〉은 백여 권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보교편(輔篇)〉이며, 그 외도 〈중용해(中庸解)〉, 〈원론(論原)〉, 〈비한상(非韓上)〉, 〈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 〈상황제서(上皇帝書)〉 등이 있다. 그는 불교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기타 선종의 종파에 대해서도 비평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그는 〈정법정종기(傳法正宗記)〉, 〈전법정종정조도(傳法正宗定祖圖)〉, 〈전법정종론(傳法正宗論)〉 등 삼부저작의 찬술을 통해서 선종의 정통 지위를 확립하기도 했다. 특히 북송 때 남종선이 성행한 후에 지어진 〈전법정종론(傳法正宗論)〉은 선종전법의 차제에 관한 것으로, 육조가 정통이 된다는 그의 관점이 실린 선종 사적이다. 이 책은 〈대정장(大正藏)〉 제51측에 수록되었다. 전법 및 법통의 정통성과 제자에 대한 가르침의 문제 등을 기술했다. 그가 지은 모든 저술은 송인종(宋仁宗)에게 진상되었고, 인종은 그의 많은 저술을 보고 매우 감복해하면서, 모두 〈대장경〉에 편입시켰으며, 자색가사를 하사하고 명교대사(明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계숭선사는 삼교융합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불교의 정밀한 교학적 이론인 사변적 색채가 농후한 철학적 특징을 의지해서 유가의 핵심적 철학 문제를 관통하였고, 불교와 유교에서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용해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전개하였다.

그는 중용(中庸)의 ‘성명(誠明ㆍ지성스러운 마음과 완벽한 덕성)’, ‘중화(中和)’ 등의 범주에 대해서 풍부한 설명을 하였으며, 동시에 심ㆍ성ㆍ리(心性理)의 내재된 연관성에 대해서 논술을 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이기지변(理氣之辯)의 사고와 심즉리(心卽理)에 대한 명제 제시는 송나라 유학에 많은 호응을 끌어내기도 했다.

한편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된 이래로 불교의 효(孝)에 대한 관념은 중국인들에게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유가 사대부들의 조롱거리 내지 비판의 중심이 되기도 했고, 출가 승려들은 나름대로 경전의 근거를 가지고 비판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였지만, 부모를 부양하지 않고 출가한 승려에 대한 시선은 언제나 불편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불교의 체계적인 이론 내지 사상적 관념을 근거로 유가와 맞대응한 인물은 불교 역사 이래로 없었다. 계숭선사는 불교의 효도관을 체계적으로 수립해서 유학자들의 잘못된 불교의 효도인식을 바로 잡아주었던 인물이며, 당시의 배불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많은 저술을 통해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탁월한 논리체계는 당시의 유가 사대부들을 참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송인종 명도년간(明道年間ㆍ1032~1033) 송대의 문학계는 고문운동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문인들은 모두 당나라 중엽 때의 인물인 한유(韓愈)와 유교를 흠모하고 숭상하면서,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는 이러한 배불의 형태를 겨냥해서 유교와 불교사상의 본질을 비교해서 조정에 상소하였다. 특히 배불에 앞장섰던 구양수를 논리정연하게 반박하자, 당시 조정의 황제(仁宗)를 비롯해 사대부 문인에 이르기까지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당시의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림, 강병호

계숭선사는 유교의 경전을 두루 깊이 탐독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배불에 대한 풍토를 목격하고, 체계적인 논리와 이론으로서 배불의 부당성을 알렸다. 그는 당시 이러한 배불에 대한 풍조를 변론하고 논쟁도 벌렸지만,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몰이해를 완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주장하면서, 유교와 불교의 일치하거나 유사한 관점을 조목조목 들어서 마침내 〈보교편(輔敎編)〉을 완성하였다.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다. 효도관(孝道觀), 중용관(中庸觀), 심성관(心性觀)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효도관 방면에서 불교의 오계와 십선계를 가지고 유교의 오상(五常ㆍ仁義禮智信)을 비교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효위계선(孝爲戒先), 효유계지온(孝有戒之蘊), 계효합일(戒孝合一) 등을 주장하면서, ‘성인지도이선위용(聖人之道以善用ㆍ성인의 도는 선으로 용을 삼는다), 성인지선이효위단(聖人之善以孝端ㆍ성인의 선은 효로써 발단을 삼는다)’이라고 하기도 했으며, 중용관(中庸觀)에서 그는 중용위지도(中庸爲至道)의 관점으로 유가의 중용(中庸)과 불교의 중도(中道)를 중점적으로 비교 찬술하기도 했다. 심성론(心性論)에서는 유가의 성(性), 정(情)에 불교의 심성론을 끌어들였다. 불교는 본래 심성본각을 기초한다고 설해서, 체계적으로 진심일원론(眞心一元論)의 심성사상을 찬술하기도 했다. 즉 심성론은 진여심(眞如心)을 본체로 삼았다고 보았다. 그는 성(性)에는 선악이 없고, 정(情)에는 선악이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그의 불교와 유교의 회통은 송대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송대 이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연고로 불교사에서 그를 일대효승(一代孝僧)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사에서 계숭 스님의 공헌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보교편(輔敎編)〉에서 불교와 유교가 비록 사람들을 위한 처세와 방법에 다른 점이 있지만, 유가는 치세(治世)에 있고, 불교는 치심(治心)에 있다. 하지만 모두 목적은 하나라고 천명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불교의 오계(五戒)와 유교의 오상(五常)을 동일시하면서, ‘효위계선(孝爲戒先)’, ‘성인지효’, ‘이성위귀야(聖人之孝, 以誠貴也)’라는 중요한 명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의 관점은 불교가 지향하는 효(孝)의 중점은 이치(理)에 있고, 유가가 중시하는 효(孝)의 중점은 행(실천)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중용해(中庸解)〉에서 “유불은 모두 성인의 가르침이다. 나온 바가 비록 같지 않으나, 다스리는 것은 같은 목적이다. 유자의 대성인은 유위자(有爲者)이며, 불교의 대성인은 무위자(無爲者)이다. 유위자는 치세(治世)를 사용하고, 무위자는 치심(治心)을 사용한다.… 고로 치세(治世)는 유가가 아니면 불가하고, 출세를 다스리는 데는 불교가 아니면 또한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불교와 유교는 모두 성인의 길이다. 하나는 치세(治世)이며, 다른 하나는 출세(出世)이다. 분담한 역할이 비록 다르지만, 다만 이 둘은 서로 돕고 서로를 상생시킨다. 즉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효과를 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두 번째, 당시 선문의 전법체계에 대해서 살펴보면, 각기 자기 파벌에 대한 법맥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쟁론이 끊이지 않았다. 선종은 〈보림전(寶林傳)〉을 지어서 인도로부터 28조설을 확정지었다. 반면에 천태종은 〈법장전(法藏)〉에서 서천 24조설을 주장했다. 계숭 선사는 서천 26조설을 주장했으며, 따라서 그의 서천 26조설이 이후 역사에 편입되는 영예를 안았다.

계숭 선사는 유학자들의 배불언론에 대해서 반격을 하였는데, 특히 한유(韓愈)의 배불에 대해서 많이 비평했다. 그는 불교의 선사 입장에서 한유의 ‘도통설(道統說)’은 믿을 수 없으며, 동시에 한유가 논한 성(性)에 대한 논설은 성정(性情)과 뒤섞였다고 여겼다. 즉 한유는 오직 ‘정(情)’을 중심에 둔 관점이고, ‘성(性)’을 언급한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한유가 말한 ‘사불구복 내경득화(事佛求福 乃更得)’의 관점 내지 화이지변(夏夷之辨) 등의 관점을 반격하기도 했다. 또 그는 불교와 유교가 모두 왕도(王道)정치를 지지하며, 불교, 유교 모두 통치자들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보조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계숭 선사의 배불론에 대한 반격 및 유불(儒佛)의 회통은 유가의 사대부들이 적극적으로 ‘담선(談禪)’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풍조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송대 선종의 토막역사의 흔적을 보면 유가 사대부들은 송인종 경역(慶曆ㆍ1041~1048) 때 송 사대부들은 격렬한 배불을 하였지만, 최종에는 송신종(熙ㆍ1068~1077) 때 도리어 선열(禪悅)에 탐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유가 사대부들의 배불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유가사상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는데, 유가 경전 가운데는 치국(治國)의 도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동시에 오경(五經ㆍ詩經, 書, 禮記, 周易, 春秋)은 균일하게 치도(治道)가 된다고 여기면서 이 중 하나도 버릴 것이 없으며 빠져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또 상제(喪制)에 관해서도 불교의 인과응보 육도윤회와 유가의 길흉화복 사상을 비교 융합하였는데, 즉 유ㆍ불(儒佛) 양가의 성심제계(誠心齋戒)가 복을 불러온다는 것도 상통한다고 여겼으며, 유가에서 말하는 개인의 ‘오복육극(五福六極ㆍ壽, 富, 康, 德, 命ㆍ六極之凶, 短折, 疾, 憂, 貧, 惡, 弱)’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과보에 해당한다고 여겼다. 또 〈중용〉의 ‘기위물불이, 칙기생물불측(其爲物不二, 則其生物不測)’이라고 하는 우주 생성사상을 제시해서 불교의 ‘만법유심(萬法唯心)’과 상통한다고 보았다.

불교가 중국에 진입한 이후 중국에서 합법적 지위를 얻기까지는 본토 문화인 유가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 통합한 결과이기도 하다. 불교가 한나라를 기점으로 위진 남북조 수당을 거치면서, 불교 유교의 융합은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송대에 이르러서 유교와 불교의 융합은 절정에 다다랐다. 불교와 유교의 회통방식은 불교를 중국화하는 과정이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점은 바로 통치 계급자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었다. 송대의 운문종 승려인 명교계숭은 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관념 및 개념을 깊이 연구 고찰해서 하나의 문서화로 발전시키는데 성공한 최초의 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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