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서로 상호의존성으로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으므로, 연기공이며, 무상과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여래를 본다고 하며,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에서는 ‘중도’라고 한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무고피무(此無故披無) 차생고피생(此生故皮生)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존재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하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관관계 속에서 생하고 멸하니 둘이지만 결국은 서로가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 원리를 연기법이라 하고, 이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약자로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조건)인 연(緣)에 의지해서 만상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인과법(因果法) 또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 상호의존성(관계성)으로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연기공이며, 무상(無常)과 연기(緣起)를 보면 법을 보고 여래를 본다고 하며,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위없는 깨달음인 중도를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했다”고 하셨다. 삼법인(三法印)의 제법무아를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표현했다.

부처님께서는 공을 바람에 비유하시며, “바람은 모양으로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공이란 이와 같아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윤회(輪廻)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무상한 것인 줄 모르고 이것이 욕탐을 일으켜 인식의 대상으로 존재화 시키기 때문이다. 정견(正見)이란 연기법이 진리임을 아는 것이며, 이는 선정인 ‘이 뭣고’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는 진아가 아니라 중생들이 무명과 욕탐으로 취착한 거짓된 자아이다. 부처님께서 세간의 구조적 실상을 체계적으로 설하신 것이 십이연기의 유전문이며, 이를 토대로 세간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 것이 죽음이 없는 땅에 이르는 환멸문이다. 중생들이 오온 가운데 희락과 갈애(渴愛)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욕탐으로 취착해 자아로 삼는 것이 인간으로서 존재이니, 곧 오취온이며, 자아는 법계서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행하고, 인식하는 가운데 연기한 법을 착각해 개념으로 대상화한 것이며,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사실상 존재가 아니라 법계서 연기하는 행위(行爲)인 것이다.

또한 유위법도 실상을 여실히 이해하지 못한 중생들이 욕탐으로 존재화 시킨 것이며, 무위법인 진리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최고의 가치인 것이다. 우리 불자들이 생활속에서 반야지혜 광명을 밝혀 실천할 유일한 방법이 시심마 ‘이 뭣고’이다.

그리고 연기와 성기(性起)가 화엄의 중심사상인데, 즉 존재와 현상이 서로 끊임없이 연관돼 있다는 법계연기와 있는 그대로가 바로 불성이 드러남이라는 성기설(性起說)이다. 성기란 불의 본질이 현실에 현현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나의 본질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으로 설명하신다. 오온이 어떻게 조건지어 일어나는 가를 설명하는 것이 연기이다. 즉 외부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올 때, 그 기관이 인지하는 대상이 바로 색이다. 그 대상을 식이 인지하고, 그 대상을 수(受)가 느끼고, 상이 지각 또는 인식하고, 그 대상에 대해 행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이 실체를 갖기 시작하면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고 번뇌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한 생각을 바로 알아차리고 ‘이 뭣고’로 뿌리를 잘라버림으로서 그 대상을 마음이 붙잡고 의미를 부여하고 즐기지 않게 되면, 조건(條件), 연기(緣起)에 의해서 스스로 들어 왔다가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니, 이것이 업장소멸로 이어지며 내안의 반야지혜를 생활속에서 굴려 쓰게 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