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한 사형수 이원식

특별한 사형수의 죽음을 소개한다. 세 번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 밖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형수 이원식 이야기다. 통상 사형수의 죽음은 ‘응당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사형수 이원식처럼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감옥을 드나들다, 출소 후 곧바로 죽은 경우를 두고는 ‘허무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씨와 돈독한 사이였던 나는 그의 마지막을 무척 의미 있는, 인간적인 죽음으로 기억한다.

이 씨는 사상범이었다. 대구 출신인 그는 유지의 아들로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의사인데다 본인 병원을 운영했고, 문인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그는 소위 남들이 말하는 엘리트였다. 이승만 정권 시절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듯, 그 역시 사회주의 이념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당시 이 씨는 사회주의 사상을 품고 북한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다.

사상범으로 첫 사형선고
반국가 행위·반공법 위반 혐의


1950년 8월경이었다. 이 씨가 아내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경찰이 불시에 이 씨를 찾아왔다. 수배 중이었던 그는 자신만이 표적이라 생각하고 혼자서 도망쳤다. 그 길로 아내가 행방불명이 되고, 총살당할 줄 알았다면 이 씨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 씨는 곧 검거됐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아내를 잃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땐 지금과 달리 사상범의 사형선고는 흔한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석방됐지만 죽은 아내는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 이 씨가 첫 사형수 신분서 벗어나자마자 한 일은 아내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아내가 ‘보도연맹 민간학살’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사상에 물든 이들을 사상 전향시켜 보호·인도한다’는 취지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결성된 대국민 사상통제조직이었다. 이 씨와 그의 아내도 보도연맹에 소속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한국전쟁 중이었다. 이승만 前 대통령은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가 북한군 점령 지역서 북측에 협조할 것이란 의심을 했다. 이들의 배신을 우려한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엄중단속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후방이었던 경상도 일대, 그리고 이 씨가 살았던 대구 지역의 ‘보도연맹 민간학살’ 피해 정도는 무척 심각했다고 전해진다.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이란 명분으로 관련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총살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 씨는 아내가 바로 이 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다고 확신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이 씨는 본격적으로 아내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찾고자 했다. 그는 1960년 경북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했다. 이후 유족회는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고, 피해자 유골을 발굴하는 등 사건 진상규명을 주장하며 관련 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국회가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상황 조사까지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진상규명은 좌절되고 만다.

극우반공체제를 기조로 한 군사세력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미국 측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들의 반공의지를 보여줄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다. 좌익 전향 경향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의 유골을 발굴한 각 지역 유족회는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쿠데타 세력은 급히 제정한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학살자 유골 발굴 행위를 특수 반국가 행위로 간주, 유족회원들을 ‘혁명재판’에 회부했다. 대구유족회장을 맡고 있던 이 씨 역시 북한을 이롭게 한 행위를 했다는 이유(반국가 행위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리고 1961년 12월 7일, 혁명재판소서 그는 두 번째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이 씨는 49세였다.

나와의 인연은 이 씨가 두 번째 사형수 신분으로 대구교도소서 있을 때부터 시작됐다. 1970년대 초반, 대구교도소 교화위원 5년차였던 나는 50대 중반의 이 씨를 만났다. 당시 이 씨에게는 재혼한 아내가 있었다. 이 씨의 두 번째 아내는 남편이 사형수가 되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됐다.

이 씨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다른 유족들도 일부 감형 됐다.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사형수가 된 이 씨는 10년 가량 형을 살다 석방됐다. 하지만 그는 석방된 이후 반공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또 사형수가 된다. 이 씨의 세 번째 사형선고였다. 그에게는 세 번째 아내가 있었다. 세 번째 아내 역시 달아났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마지막으로 출소한 뒤에도 사회에 복귀한 이 씨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부는 감옥 밖에서도 이 씨를 철저히 감시했고, 그와 접촉한 이들을 기록해뒀다가 몰아붙이던 때였다. 많았던 이 씨의 대구 친구들은 어쩌다 이 씨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를 철저히 모른 척 했다. 나는 외톨이가 된 이 씨와 출소 후 더욱 더 친해졌다.

이 씨가 세상을 하직한 그 날도 나는 그와 만났다. 이 씨는 나와 저녁 회식을 하고 집에 가던 길에 변을 당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이 씨는 길을 건너다 택시에 치여 크게 다쳤다. 차사고로 피해자가 사망할 경우 운전자는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로 예외 없이 구속되던 시절이었다.

사고를 낸 택시운전사는 다친 이 씨를 병원으로 옮겼다. 이 씨는 중태에 빠진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던 모양이다. 그는 응급실을 찾아온 아들에게 집에 가자고 했다고 한다. 아들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내가 지금 여기 병원에 있으면 안 된다. 여기서 죽게 되면 택시기사는 분명 구속된다. 저 사람은 운전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내가 옥살이를 해보니, 나 때문에 한 사람을 교도소에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택시기사를 보내고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온 아들은 결국 집에서 이 씨의 임종을 지켰다.

이 씨는 이토록 기구한 삶을 살다 갔다. 10년 이상 사형수로서 감옥을 드나들며 혁명재판에 섰고, 그 과정에서 아내 셋을 잃었다. 그런 그는 한 명의 택시기사가 교도소에 가는 것을 막고, 죽음을 맞이했다. 감옥 바깥에서 맞이한 이 씨의 ‘의로운 죽음’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여운을 준다.

이원식은 자신의 아내가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의해 희생됐다고 확신했고, 이는 이 씨가 두번째 사형선고를 받는 계기가 된다. 사진은 보도연맹 학살사건 자료사진.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