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카리스마 ‘육바라밀 실천’서 나온다

하심의 리더쉽, 바라밀 실천의 카리스마로 널리 알려진 달라이라마

우리는 일상에서 “카리스마가 있다.”라는 말을 흔히 접하게 된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치인, 연예인, 나아가 친구나 동료에게도 “카리스마가 있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때의 힘은 매력이나 명성과는 다른 것으로써 특정인이 대중들의 마음을 쉽게 빼앗아 자신의 의지대로 잘 이끄는 미지의 요소를 뜻한다.

합리화 사회서 카리스마 선호
친절하고 격식없는 스님 좋아해
육바라밀 실천이 지도자 덕목

하지만 카리스마(charisma)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1세기 중반에 처음 글자로 나타난 고대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또한 1세기에 그 말이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 처음 사용될 때, 예언에서부터 치료, 방언을 말하는 능력까지 기적과도 같은 영적인 능력을 의미했다는 사실도 잘 모를 것이다.

그리스어 χa?ρισμα[카리스마]는 기원 후 50-62년 사이에 쓰인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처음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카리스마라는 말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즉 카리스마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여겼다. 그리고 2세기에 라틴어로 글을 쓰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χa?ρισμα를 로마자로 옮겼고, 그로 인해 ‘카리스마’가 되었다. 하지만 바울이 설명했던 초자연적인 은사(恩賜) 능력은 후대 교회 당국의 무시를 당한다. 현실에 기반한 성서와 교리, 주교의 권위에 기대어서 체계를 잡아가던 교회로선 초자연적인 이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결과 카리스마는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봉인되고 말았다.

사라졌던 카리스마는 20세기 초반 부활한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1864-1920)가 기존 권위에 도전하면서 혁명적이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는 지도자의 능력으로 카리스마를 내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카리스마는 종교적 차원의 초자연성에서 세속적 차원의 자연성의 의미를 점차 지니게 된다. 사도 바울이 사용하였던 카리스마가 신성(神聖)을 의미하였다면 막스 베버가 사용한 카리스마의 의미는 반(半) 신성을 뜻하는 정도로 변화한 것이다.

지도자 권위 지칭서 개인 매력 의미로

그런데 막스 베버 이후 반세기가 지나면서 카리스마는 지도자의 권위나 재능에서 개인의 매력과 자질을 가리키는 말로 다시금 변화하게 된다. 이제는 성직자의 신성 내지 지도자의 반 신성이 아닌 무(無) 신성인 미지의 힘으로 의미가 변한 것이다. 이러한 신성의 배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보다 더욱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은 종교지도자에게서 일반 사회지도자와는 다른 리더십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신성과 권위가 약화된 현대사회에서 종교지도자로서 불교지도자의 카리스마는 어떠한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불교지도자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점차 세속화되고 합리화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흐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막스 베버는 사회가 합리화되면 될수록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줄어든다고 설명한다. 세계 역사는 곧 초월적이고 마법적인 힘으로부터의 해방 과정, 즉 합리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볼 때 신성한 후광을 지닌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세계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가치보다는 수평적이고 다원적인 가치가 인정을 받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던 비합리적 관행은 사회가 합리화되고 개인주의화됨에 따라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원래 카리스마가 발현되는 고유 영역이었던 종교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사찰의 경우에도 신도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권위적인 스님 대신에 친절하고 격식이 없는 스님을 좋아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지도자는 일반 사회지도자와는 무언가 달라야한다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만일 종교지도자가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된다면, 일반 사회지도자가 동일한 물의를 저질렀을 때보다 더욱 혹독하게 비난을 받게 된다. 사람들이 종교지도자에게서 여타의 사회지도자와는 다른 리더십을 기대하기 때문인데, 그 기대의 근원에는 덕성(德性)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지도자는 높은 덕성을 가지고 있을 때 신도를 이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종교지도자가 아닌 일반 사회의 관리자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과거엔 종교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초자연적 능력 혹은 제사장적 권능인 신성과 권위로부터 비롯된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인간의 이성이 고도로 합리화하면서 초자연적·제사장적 능력과 권능보다는 일반인과는 다른 높은 덕성에서 종교지도자의 카리스마를 찾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런데 덕성(德性)은 ‘어질고 너그러움’을 뜻하는 바 신성 혹은 권위와는 사뭇 다르다. 어질고 너그러움은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다는 의미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하심(下心)] 타인을 위하는[봉사] 것이다. 과거 종교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신성과 권위였다면 현대 종교지도자의 카리스마는 정반대로 하심과 봉사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종교지도자는 자기를 낮추어 세상에 봉사하여야 한다. 불교에서는 이타행의 삶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가 보살(菩薩)이다. 보살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삿뜨바(boddhi-sattva), 빨리어로는 보디삿따(bodhi-satta)라는 말의 음을 모사한 것이다. 이 원어를 정확히 음사하여 보리살타(菩提薩唾)라고 쓰기도 한다. 그리고 원어에서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가 ‘보’로 축약되고, 생명체 즉 중생을 뜻하는 살타가 ‘살’로 축약되어 보살이라 통칭된 것이다. 보살을 한 마디로 말하면, ‘깨달음(보리)을 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覺有情]의 의미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로 변화한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 특히 자신을 구제하기에 앞서 먼저 남을 구제하는 이타행(利他行)으로서의 보살행이 강조되었다. 이는 보살의 삶은 곧 봉사의 삶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지도자, 대사회적 역량인 육바라밀 실천해야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실천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육바라밀은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의 실천행이기도 하며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등의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소승불교의 방점인 자기의 인격완성을 위하여서는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으로도 충분하지만, 대승불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살의 수행법으로서 육바라밀을 독자적으로 설하였다. 그것은 팔정도가 자기완성을 위한 항목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타행(利他行)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으며, 보시와 인욕과 같은 대사회적인 항목을 포함하고 있는 육바라밀이 보살의 수행법으로 알맞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지도자로서 보살은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은 남에게 자신의 재물이나 지식을 나누어주거나, 두려움에 빠져있는 사람에게서 두려움을 제거해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보시의 근본 자세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시한다는 상(相)조차도 없이 보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하심으로 아상(我相)을 없앨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은 계율을 지키는 것, 즉 생활의 규범을 준수하는 것을 말한다. 지도자란 누구보다도 원칙을 준수하여야 한다. 아랫사람에게는 법을 준수하라면서 자신은 예외적으로 행동한다면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불교지도자는 윗사람의 권위를 내세워 법과 규범에서 예외가 되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행하기 어려움을 능히 행함을 말한다. 물질생활에 있어서는 내핍을, 정신생활에 있어서는 극기를 인욕이라 한다. 어떠한 물질적 빈곤에도 불만 없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또 어떠한 정신적 핍박에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이 인욕이다.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불교지도자는 인내로써 중생고를 해소해야 한다.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은 끊임없는 노력을 말한다. 안으로 인격 완성을 위하여 끝없는 번뇌를 끊고, 밖으로는 무수한 중생을 피안으로 인도하는 일은 끊임없는 노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보살은 중생구제에 끊임없는 노력을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끝이 없는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해 가는 존재이다. 어떠한 장애나 난관이 오더라도 굴함이 없이 게으르지 않은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믿음직한 불교지도자의 모습이다.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은 “생각하며 닦는다.” “생각을 고요히 한다.”는 뜻이다. 이는 번뇌망상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번거롭고 소란한 마음을 진정시켜 정신을 통일하는 수행방법이다. 어떤 조직이나 사회도 늘 평온한 시절만 보낼 수는 없다. 예기치 못했던 사태에 직면하여 당황하지 않고 사람을 이끄는 것은 불교지도자가 갖춰야할 중요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은 선정에서 얻어진 지혜이다. 지혜는 범어 반야(般若)의 번역으로 이것을 예지(叡智), 선험지(先驗智), 직관지(直觀知)라고도 한다. 이는 듣고 보고서 배워진 유소득(有所得)의 지식과는 다르다. 감성과 논리 또는 지식을 초월한 예지와 선험지 그리고 직관지는 불교지도자의 참다운 지혜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카리스마가 과거와는 달리 신성과 권위가 배제된 의미로 변화하였으며, 불교지도자는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봉사를 하여야 함을 살펴보았다. 이제 현대사회의 불교지도자는 신성 혹은 권위의 카리스마로써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심의 카리스마로써 이 세상에 봉사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겸손하지 못한 일부 불교계의 지도자들이 카리스마를 하심과 봉사에서 찾지 못하고 자신이 입고 있는 가사장삼에서 찾는 어리석음을 간혹 범해 온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는 마치 부처님 불상을 이고 가는 당나귀가 사람들의 절을 받고 우쭐해져서 부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형국임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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