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털이범 면도칼로 도려 佛畵 절도

1991년 3월 7일에서 8일 사이에 도난된 〈사진 왼쪽부터〉 안성 청룡사 신중도, 현왕도, 칠성도. 절도범은 사찰에 침입해 면도칼로 탱화를 도려내 불화들을 훔쳤다.

경기 남부지역에 위치한 안성은 넓고 기름진 토지와 삼남(三南)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안성장터를 중심으로 인간과 물자의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조성된 불교문화재가 사지(寺址)와 사찰에 전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사찰 가운데 청룡사, 칠장사, 석남사 등이 대표적이다.

안성 서운산 기슭에 위치한 칠장사는 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 말사이다. 1265년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대장암(大藏庵)으로 출발하여 1364년에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이 크게 중창해서 사명(寺名)을 청룡사(靑龍寺)로 바꾸었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왕실 후원 받은 고찰 청룡사
1991년 신중도 등 3점 도난
전문 도굴꾼의 소행으로 추정

조선 후기 경기 지역 화승들
참여해 조성한 귀중한 佛畵

고려시대 청룡사에서는 대장군 김호(金瑚)와 영암군부인(靈巖郡夫人) 최 씨가 시주하여 1372년에 〈능엄경(리움 소장, 보물 제698호)〉을 5권 1책으로 묶어 간행했다. 또 공양왕의 어진을 봉안했다는 사실은 고려 말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최고의 사세(寺勢)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청룡사는 조선 전기 세조 연간(1455~1468)에 도성의 용흥사와 진관사의 기물을 하사 받을 정도로 지속적인 왕실의 후원이 있었을 것이지만 구체적인 연혁은 알 수 없다. 사찰은 1601년경에 대웅전을 건립하고, 1603년에 소조석가삼존상을 봉안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중에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후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1622~1658)의 원찰이 되어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현존하는 불화 화기(畵記)와 현판 등의 문헌기록을 참조하면, 1658년에 사과(司果) 박난(朴蘭)과 명옥(明玉)이 주상삼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영상회괘불을 그리고, 1674년에 주종장 사인이 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692년에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감로도를 제작하였다. 1720년에 사간(思侃)이 사찰을 중수한 후에 사적비를 세웠고, 1745년에 법당을, 1821년에 대법당과 명부전을, 1825년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1863년에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고, 1874년에 아미타회상도와 지장시왕도 등을 조성하였으며, 1878년에 불상 개금과 삼세불도를 제작하였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청룡사에서는 상당히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룡사에 소장되었던 문화재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조선총독부 관보본이 남아있다.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는 본사에 소장된 성보물이 29건 22점으로, 전각별로 불상과 불화가 정리되어 있고, 뒤쪽에 암자인 내원암, 서원암, 안성봉덕포교소 등의 재산대장이 정리되어 있다.

그 가운데 봉덕포교당은 시내 비봉산에 위치하고, 1920년대 청룡사 주지 이응섭 스님이 읍내에 사찰이 없어 중생을 제도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시내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 포교소 건립을 1922년 7월부터 시작하였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1922년 이후에 작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에 따르면 현재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조계종 총무원에 신고된 청룡사에서 도난당한 성보문화재는 신중도, 칠성도, 현왕도(1991.3.7~3.8 도난)이다.

이들 불화는 도난당하고 3일 후에 1991년 3월 11일자 〈경인일보〉에 “보물급 ‘탱화’ 2점(點) 도난, 안성 청룡사(靑龍寺)서 면도칼로 도려내 - 사찰에 도둑이 들어 보물급 문화재를 훔쳐 달아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지난 8일 새벽 2시쯤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 청룡사 대웅전(보물 824호) 법당에 있던 탱화 2점과 탁자 받침대 2개를 훔쳐 달아난 것을 이 절 승려인 김선길 씨(50)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중략〉1백여 년 된 가로 2m, 세로 1.5m가량의 탱화 2점과 탁자받침대 2개가 없어졌다는 것. 경찰은 탱화를 면도칼로 긋고 훔쳐간 수법으로 보아 사찰을 상대로 한 골동품 전문 절도단의 소행으로 보고 동일 전과자 등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라는 내용을 보면 도난 시점이 8일 새벽이고, 기존 문화재청과 종단에 신고된 수량과 다르다.

이 불화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재산대장을 통해 20세기 전반 청룡사 대웅전에 8점, 명부전에 1점, 관음전에 3점을 합하여 총 12점의 불화가 소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재산대장에 청룡사에 현존하는 감로도와 사자도는 적혀 있지 않다. 기존 문화재청에 신고된 도난 불화의 규격은 신중도가 세로145㎝ 가로161㎝, 현왕도는 세로154㎝ 가로143㎝, 칠성도가 세로143㎝ 가로196㎝이다.

이 중 칠성도는 1917년에 고산축연이 그린 작품이다. 신중도와 현왕도의 규격을 참조하면 신중도는 관음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왕도는 대웅전이나 관음전에 봉안되었던 것 중에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도난 불화 가운데 조성시기와 작가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숭정기원후오년(崇禎紀元後五年) 한봉(漢峰) 화(畵)”로 적혀 있을 뿐이라서 1874년인지 1878년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같이 조성된 지장시왕도의 화기에 1874년 3월 16일 미타삼존과 관음, 지장보살을 개금하고, 보처 2위와 10왕을 개채하며, 영산회상도 등을 그려 25일 전각에 봉안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1874년에 그린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불상 개채와 불화 조성은 한봉창엽(漢峰燁), 서봉응순(西峰應淳), 덕월응륜(德月應崙), 정월묘언(淨月妙彦), 금곡영환(金谷永煥) 등 19세기 후반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최고의 실력을 가졌던 불화승들이 참여했다.

기존 1634년 작(作)으로 도난신고된 신중도는 3개로 구획한 전체 화면에서 상단 중앙에 범천과 제석천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무기를 든 위태천이 배치되어 있다. 나머지 공간을 천부 신장(神將), 천녀, 천동 등으로 꽉 차게 채운 화면의 구도, 인물 표현, 설채법 등에서 17세기 전반의 불화로 볼 수 없어 1874년 한봉창엽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왕도는 팔곡병풍(八谷屛風)을 배경으로 중앙에 크게 염라대왕이 배치되고, 좌우로 권속을 두른 조선후기 현왕도의 기본 구성을 따르고 있다. 중앙 탁자 뒤에 현왕이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고, 머리에 천도재에 독경되었던 〈금강경〉을 얹은 관(冠)을 착용하고 있다. 현왕 좌우에 판관(判官), 녹사(綠事), 시자(侍者)가 서 있는데, 화면의 구도와 설채법 등을 고려하면 이 작품도 1874년 한봉창엽이 조성한 불화일 것이다.

칠성도는 전체 화면을 상하로 나누어 존상을 배치한 구도로, 중앙에 높은 대좌에 앉은 치성광여래는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두르고, 그 밑으로 보관을 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서 있다. 그 옆으로 칠원성군과 바로 위에 칠여래가 배치되어 있다. 개별 존상의 형태와 설채법 등이 20세기 전반에 불화의 양식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안성 청룡사는 왕실의 후원과 민중 놀이패인 남사당의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가능했던 사찰이다. 이러한 후원으로 19세기 후반 전각의 중건, 불상의 개금, 불화의 조성 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최근 도난 불화들이 공소 시효가 지나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 전시회를 통한 공개와 매매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국공립박물관에 소장된 불화부터 체계적인 조사와 공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유출된 유물은 조성 사찰로 돌려주고, 도난문화재가 아닌 유물은 문화재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될 수 있는 계기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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