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님 가족 풍비박산낸 4·3 광풍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를 비롯해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적지 않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약 7년여 기간동안 비공식적으로 3만여 제주 주민이 희생됐고, 강경진압에 의해 제주 중산간 마을의 가옥 95%가 전소됐다.

이런 겁화를 불교도 피해가지 못했다. 스님 16명이 죽거나 도일(渡日)·행방불명됐고, 37곳의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 완전 전소된 곳도 18곳에 달한다. 대부분의 피해 스님들은 사찰 경내에서 총살 당했고,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한 스님도 있다. 

본지 제휴 언론인 〈제주불교〉는 제주 4·3사건 70주년을 맞아 피해 사찰과 순교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는 기획연재를 시작했다. 이병철 〈제주불교〉 기자와 제주불교 전문가 한금순 제주대 외래교수가 연재를 맡았다.

이에 본지는 〈제주불교〉의 ‘4·3사건 70주년 제주불교 흔적 바로 세우기’ 기획 연재를 새로 정리해 게재한다.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불교계 피해를 되짚고, 해결의 길을 모색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제주 애월읍 대원정사 전경. 원래는 원천사였으나 제주 4.3사건이 발발하면서 훼불을 겪는다. 이후 현재 회주인 일조 스님이 1980년 대원정사로 사찰명을 바꿨다.

1940년 생인 제주 애월읍 대원정사 회주 보각 일조 스님은 9살 무렵, 제주 4·3의 광기를 아직도 뇌리에 잊히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해 냈다. 아버지는 대전형무소에 끌려갔고, 어머니는 2살의 여동생을 등에 업은 채 아버지를 찾으러 갔던 게 화근이었다. 경찰이 어머니를 강제로 데리고 나가자 할머니까지 따라나섰다가 도피자 가족이라고 총살당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이 밖에도 친누나와 셋째 아버지 그리고 삼촌까지, 4·3의 광풍이 스님의 집안에도 휘몰아친다.
 

대원정사 회주 일조 스님이 자신의 과거를 술회하고 있다. 스님도 4.3사건으로 가족을 잃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을 정도로 이 하귀마을의 유지였죠. 하귀 병풍 내 논 절반이 우리 집안의 땅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아버지는 당시 단국대 이사장과의 대학동기 인연으로 현 하귀중학교 전신인 단국중학교를 세우셨습니다.”

하귀中 전신 설립했던 아버지
5.10총선 반대로 감옥서 사망
충격으로 원천사서 출가 결심

4.3당시 원천사도 피해 입어
토벌대 의해 고정선 스님 총살


그 시절이 그랬듯 의식을 가진 4·3의 시초가 됐던 5·10총선거 반대로 인해 단국중학교 교장과 선생 등이 경찰들의 수사 선상에 올랐고, 그 가르침을 배운 학생들도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 무렵만 해도 아버지 친구가 경찰의 간부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장례에 경찰이 만장행렬 보초를 서 줄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던 시대라 아버지의 삶도 지역 주민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주정공장에 수용됐다가 다시 석방됐다 다시 잡혀가 전기고문을 당하는 등 결국 대전형무소에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충격과 공포는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다. 시름시름 앓던 스님은 결국 부처님을 의지하게 된다. 지난 15살이 되던 1954년, 4·3에 의해 훼불됐던 수산봉 기슭에 자리한 원천사에서 출가하게 된다.

원천사는 1933년 최청산 스님에 의해 애월읍 구엄리 초입의 원물 지경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고인수 스님이 남로당 청년 활동을 했는데 원천사에 은신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면서 원천사는 그야말로 풍전등화를 맞게 된다. 다행히도 원천사의 불상과 탱화, 불구는 물론 건축자재도 중산간의 극락사로 옮겨, 겨우 화를 면한다.

하지만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주지였던 고정선 스님은 총살되었다. 고정선 스님은 불교청년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던 이일선, 이세진 스님의 제자이다. 이후 사찰이 재건된 것은 1953년 최청산 스님의 제자였던 방동화, 선두석, 오춘송 스님이 극락사로 옮긴 불상과 불화, 불구 등을 찾아와 현재의 수산봉 위치로 이전하면서이다. 이전할 당시 사명을 원천사로 개명했다. 그럼에도 현재 불상과 불화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당시 한라산 영실은 기도가 영험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곳에 가서 기도를 하고 그랬지요. 박보현화 보살도 원천사 불상을 등짐에 지고 영실에 가서 모신 후 기도를 드렸다고 해요. 그런데 김 씨라는 사람이 그 불상을 서귀포시 대포 앞바다에 수장시켰다는 소문만 전해집니다.”

그래서 지금 대원정사에는 원천사의 전해지는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후 원천사는 1961년에 대한불교법화종에 등록 되었고, 1980년에 이르러 일조 스님이 대원정사로 사명을 개명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 대원정사

지역주민과 함께 아픔겪어
현재 재건돼 수락봉에 우뚝

한금순 제주대 외래교수

대원정사는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수산봉에 위치해 있다. 대한불교법화종 소속이다. 대원정사는 1933년 최청산 스님이 애월읍 구엄리 초입의 원물 지경에 초가 법당 등 세 채의 건물에 원천사로 창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법주사 구엄포교소로 신고되었다. 1942년 김금륜 스님이 기와 법당으로 증축하고 수산사로 개명하였다. 제주4·3사건으로 사찰 건물이 모두 철거 되었고, 불상 및 불구는 물론 신앙 활동의 근거 자체가 모두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1953년 최청산 스님의 제자인 방동화 스님, 오춘송 스님, 선두석 스님과 수산리 마을 사람들이 현 대원정사의 위치에 원천사를 재건하였다. 대원정사 사명은 지난 1981년 일조 스님이 바꾸었다.

대원정사가 있는 애월읍 수산리를 비롯해 하귀, 구엄리 등의 주민들은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산으로 올라갔다. 이러한 이력은 애월읍이 제주4·3사건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는 한 원인이 된다. 대원정사의 전신인 수산사도 애월 지역의 피해와 같은 양상 속에 있다. 5·10 총선거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총선거이다. 제주4·3사건은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 반대,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위한 투쟁이었다.

1948년 3월 3일 5·10 총선거 선거인 등록업무가 개시되자 1948년 4월 3일 제주도는 무장봉기를 실시하였다. 제주도민들은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마을을 떠나 산으로 숨어들어갔고, 무장대는 마을의 선거관리위원장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가 과반수 미달로 선거무효가 되는 일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발생하였다.

그러나 5·10 총선거로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제주4.3사건은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여 5·10선거를 거부한 제주도민을 살육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폭거였다.

대원정사는 5·10 총선거 반대 투쟁에 나섰던 수산리 지역주민과 함께 제주4·3사건의 아픔을 이기고 재건되어 오늘 수산봉 자락을 지키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