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人-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동국대 명예교수(77)

역사학도, 불교에 빠지다
역사학자 꿈꾸며 사학과 입학
불교에 반해 불교학생회 활동
박물관 근무하며 불교미술 매료
석굴암 불상 연구로 박사 학위

‘최초’ 수식의 불교미술사학자
반고사 찾던 중 先史암각화 발견
반구대 암각화 최초 발굴자 유명
최초 해외발굴인 발해사원지 발굴
주도해 금동불·막새기와 찾아내
실크로드·간다라 발굴 등도 진행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이 자신의 연구소에서 연구 중인 불화를 살펴보고 있다.

조선시대 고승 서산대사(1520~1604)는 ‘답설(踏雪)’이라는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을 밟으며 길을 갈 때에는(踏雪野中去)/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마라(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今日我行蹟)/ 후세들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遂作後人程)’

이는 자신의 길이 후대 사람들에게 이정표와 모본(母本)이 됨을 알린 서산대사의 경책이다. 기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어렵고도 고되다. 어지간한 개척정신과 자기 관리가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래서 그 고된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우리는 존경을 표한다.

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동국대 명예교수)은 ‘불교미술’이라는 외길을 오롯이 걸어온 학자다. 문 소장은 그 외길을 걸으며 후대를 위한 수많은 이정표들을 남겼다. 현재 불교미술사학이 어느 정도 체계를 잡기까지는 문 소장의 공로가 적지 않다.

그는 불상 및 불화 연구, 사지 발굴 등 한국불교미술사 분야뿐만 아니라 간다라·실크로드 등 해외 발굴조사 활로를 열었던 개척자이다. 지금도 한국미술사연구소를 이끌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역사학도, 불교미술을 만나다
문 소장이 ‘불교미술’이라는 평생 원력을 갖게 된 시기는 20대 대학시절이다. 역사학자를 꿈꿨던 그는 경북대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입학했고, 사찰 대학생회에서 활동하며 ‘불교학’을 조우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불교미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군 제대 후 경북대 박물관에 근무하면서부터다. 박물관에서 문 소장이 한 업무는 유물 카드 정리였다. 그는 수만 점의 유물을 실측하고 특성을 파악하며 미술사의 기초를 알게 됐다. 경북대 대학원에서 ‘한국 석굴사원 연구’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쓰면서 ‘불교미술’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박물관에 수장된 유물들을 분석하고 정리하면서 불교미술사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죠. 원래는 불교사상사 분야를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대학원 진학할 당시에는 석굴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였고, 한국 전체의 석굴사원을 조망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석사 논문을 석굴사원을 주제로 썼고, 불교미술사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문명대 소장이 태안마애불 앞에서 불상의 특성 등을 설명하고 있다.

석사를 마치고 문 소장은 동국대로 진학하게 된다. 당대 최고 불교미술사학자인 황수영 동국대 교수와의 인연 때문이다. 국내 오악(五岳)을 중심으로 진행된 유적조사에 경북대 박물관 간사로 참여했던 그를 황 교수가 눈 여겨 봤고, 석사 이후 동국대 진학을 제안했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국내 유일 불교박물관인 동국대 박물관에서 황 교수의 지도를 받는 것은 행운에 가까웠다.

“석사학위를 받고 인사차 (황수영)선생님을 뵙고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동국대 박물관서 일해 보겠냐’는 제안을 하셨어요. 바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박물관 근무하고 공부하면서 석굴암 불상들을 박사 논문 연구 주제로 잡았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문 소장의 박사학위 논문 ‘석굴암 불상조각 연구’다. 석굴암 내 전체적인 불상에 대해 연구를 한 것은 문 소장이 처음이다.

그래서 문 소장의 석굴암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2012년에는 자신의 연구소 주최로 ‘토함산 석굴 불상의 최초 종합적 연구’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석굴암 보존을 위해 이를 그대로 복제해서 만든 ‘제2 석굴암’을 조성할 것을 주장해 세간의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한 번은 연구가 아닌 순례 차 석굴암에 갔는데 볼 수가 없더군요. 사람도 많고, 예경할 수 있는 공간도 없고. 일종의 사원인데 불자가 예경도 할 수 없다면 가장 중요한 기능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석굴암 인근에 ‘제2 석굴암’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석굴암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빨리 위원회를 구성해 제2 석굴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미술 연구·신행은 나의 힘
동국대 불교미술학과 설립 주도
韓불교미술사 관련 개론서 발간
20년 간 진관사 다니며 신행활동
매일 독경·염불하며 信心 증장

앞으로도 나는 불교미술사학자
동아시아 석굴 전래·비교 연구 비롯
한국불교회화사·한국조각사 집필 중
팔순 앞둔 나이에도 7~8시간 몰두


불교미술·선사 발굴에 새 장 열다
문 소장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바로 ‘최초 발굴’이다. 그의 발굴은 불교미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명대’라는 이름 석자를 세간에 널리 알린 사건은 ‘반구대 암각화 최초 발견’이라는 사건이다. 당시 발견 에피소드도 매우 흥미롭다. 본래 문 소장은 원효 스님이 주석하며 〈초장관문(初章觀文)〉,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등을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반고사(磻高寺)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반고사를 찾아 떠난 그 길에서 역사적인 대발견을 하게 된다. 바로 울산 반구대 선사 암각화다.

문 소장은 당시 상황을 상세히 이야기해줬다. 1970년 12월 24일 박물관 연구원으로 울산 지역 불교 유적을 조사하고 있던 문 소장은 반고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울산 천전리로 왔다. 그곳에서 주변 절터를 안내해 준다고 해서 만난 사람이 “절벽 아래 희미한 그림이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혹시 마애불인가’라는 생각에 따라 간 절벽에는 이상한 무늬들이 있었고, 화랑을 의미하는 ‘랑(郞)’자가 많았다. 문 소장은 직감적으로 화랑의 유적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연구를 통해 선사시대 암각화임을 알아낸다.

1년하고 1일 후인 1971년 12월 25일에는 1~2km 떨어진 대곡리에서 암각화를 발견한다. 불교미술사학자였지만, 문 소장은 이를 운명이자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울산의 천전리와 대곡리를 내 집처럼 다니며 10년을 연구했다. 세계 곳곳의 암각화 연구서들을 번역해 읽었다. 1984년 문 소장은 〈반구대 암벽 조각〉이라는 역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국 최대 선사 유적 발견’이라는 유래가 없는 성과를 냈지만 그는 불교미술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돌려 간다라·실크로드 등 해외불교유적들을 찾아 나섰다. 여기서도 새로운 도전을 통한 ‘최초’라는 성과가 이뤄졌다.

2004~2005년 이뤄진 파키스탄 탁실라 발굴에서 출토된 간다라 불상(사진 왼쪽)과 이를 발굴 지휘했던 문명대 소장의 모습.(사진 오른쪽)

1993년 러시아 연해주 ‘코르사코프카 발해 사원지’ 발굴과 2004∼2005년 파키스탄 탁실라에서의 ‘졸리안Ⅱ 사원지’ 발굴이 대표적이다. 연해주 발해사원지 발굴은 우리나라 최초 해외 발굴 조사였고, 최초 발해 사원지 발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2006년 정년 1년을 앞두고 이뤄진 탁실라에서 발굴에서는 부조상을 포함한 불상 50여점과 동전과 못 등의 금속품과 토기 300여점을 쏟아져 나왔다. 최고의 발굴성과이기도 했다.

“적지 않은 국가가 파키스탄 탁실라서 사지 발굴을 했는데 저희만큼 성과를 낸 곳이 없습니다. 동경국립박물관에서 2000·2002·2003년 발굴을 했는데 마지막 해에 석불상 11점을 발굴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후 후속 사업을 진행하려 했는데 해외 연구조사 사업이 사라져서 더 성과를 내지는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해외 발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물으니 러시아 연해주 발해사원지를 꼽았다. 북한 발굴단과 함께 발굴했기 때문이다.

문 소장에 따르면 1993년에 이뤄진 코르사코프카 발해사원지 발굴에서는 한국을 비롯해 러시아·북한 발굴팀이 공동으로 발굴했다. 남북 갈등 상황에서 함께 발굴하니 대화가 오갈 리가 만무했다. 말을 붙여도 답을 하지 않았다. 대화의 시작은 ‘밥’이었다.

“당시 저희에게 밥 해주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북한 발굴팀은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밥과 반찬을 넉넉히 준비하라고 일렀죠. 그러고는 저녁 식사 시간에 ‘같이 먹자’고 했는데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일 정도 지나니 식사하더군요. 나중에는 서로 말도 하고, 그들 연구자들의 논문을 받기도 했죠. 그 분들의 생활을 통해 북한 실정도 어느 정도 알게 됐고요.”

불교미술사 연구 토대 세우다
‘불교미술’이라는 외길을 걸은 그가 보인 연구 성과는 가히 방대하다. 불교미술 관련 저서만 50여 권, 논문만 300여 편에 달한다. 우리나라 최초 불화 개설서인 〈한국의 불화〉는 관련 분야 연구를 위한 필독서이며, 〈불교미술개론〉은 최초의 불교미술개론서이기도 하다. 〈한국조각사〉와 〈한국불교미술사〉도 관련 분야 개론적 기틀을 만든 중요한 연구서로 평가 받고 있다.

이 같은 연구저서들은 종합적이고 통찰적인 연구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에 문 소장은 당시에는 불교미술과 사상을 함께 공부해야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미술사를 하는 사람들이 불교사상사 연구에 많이 소홀했습니다. 저는 불교사상과 미술사 연구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관련 연구를 할 수 밖에 없었죠. 지금은 불교사상 관련 연구도 많아서 참고 자료가 많습니다. 이제는 시야를 넓히는 것도 좋지만,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시대가 변한 만큼 자신의 연구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문 소장이 연구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불교에 대한 신심과 애정이다. 불교를 접하며 ‘불교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불교미술연구’라는 평생 원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매일 새벽이면 〈금강경〉을 독송하고 예불을 한다. 연구소에 출근해서는 책상 위 작은 범종을 두드리며 염불하는 게 일상이다.

“예전에는 법회에도 자주 갔는데 요즘은 나이가 있어서 자주 참석하기 어려워요. 대신 매주 일요일 아침에 진관사로 갑니다. 전각마다 삼배하고 가장 조용한 곳을 찾아서 참선을 합니다. 그리고 인연이 있는 주지 스님에게 들려서 차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것이 제게는 중요한 신행생활입니다.”

나는 '현역' 불교미술학자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문 소장은 왕성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연구소에서는 ‘석굴사원’을 조명하는 연구가 한창이다. 문 소장 자신이 처음 불교미술에 입문했을 당시 주제였던 ‘석굴사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지난해부터 골굴사와 함께 골굴사 석굴을 조명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인도와 중국의 석굴과 골굴사 석굴을 비교 연구한데 이어 올해에는 실크로드 석굴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해 볼 계획이다.

개인적인 연구 집필도 꾸준히 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은 〈한국불교회화사〉를 비롯해 〈한국조각사〉도 새로 집필 중이다. 보여준 원고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매일 7~8시간씩 원고 집필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연구할 때만큼은 현역”이라는 문 소장에게 불교미술 연구는 수행이자 원력이다. 지금도 그는 ‘불교미술’이라는 외길을 개척하고 있다.

문명대 소장은?
문명대는 1941년 출생으로, 경북대 사범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굴암 불상조각 연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중 울산 천전리, 대곡리 선사 암각화를 발견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는 러시아 연해주 발해사원지 발굴, 파키스탄 탁실라 간다라 유적 발굴 등을 진행하는 등 많은 발굴 성과를 냈다. 정년퇴임한 2006년 이후에는 지금까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을 맡으며, 왕성한 연구·집필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조각사〉 〈한국의 불화〉 〈한국불교미술사〉 등 50여 편의 저서와 300여 편의 논문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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