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불교교육 여름 특강...이중표 전남대 교수

주제 : 부처님은 옛날에 뭐라고 했을까?

강남 봉은사(주지 원명)는 7월 24일 서울 봉은사 보우당서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의 저자인 이중표 교수를 초청해 불교교육 여름 특강을 진행했다. 이 교수는 ‘부처님은 옛날에 뭐라고 했을까’를 주제로 “대승불교는 아비달마와 반야부운동이란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한다”며 “반야심경은 부처님 열반 후 왜곡된 불교를 비판하고 근본정신을 바르게 계승하자는 무쟁 사상이다”고 강의했다.

이중표 교수는… 현재 전남대 철학과 교수이자 호남불교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불교학자로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접점을 연구했으며 불교의 교리체계를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데 기여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란 무엇인가〉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등이 있다.

열반 후 부처님 말씀 해석 분분
분열·투쟁 일삼는 아비달마
본질로 돌아가자는 반야부운동
대승불교는 무쟁서 공으로…


강의 시작 전 여러분 모두가 반야심경을 독송했습니다. 반야심경 뜻을 이해한 분이 계신가요? 처음에는 한문으로 돼서 모르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글로 번역해놓고 보니까 무슨 말인지 알기가 더 어려워요. 오늘은 반야심경에 대해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승불교를 둘러싼 오해
〈반야심경〉은 대승경전입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법문이 아니라 부처님 열반하시고 500년 뒤에 처음 이 세상에 출현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은 대부분 대승경전에 해당해요.

그런데 현대 학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대승경전이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1700년 동안 불교가 아닌 것을 불교인 줄 알고 믿어온 것일까요? 한국에 들어온 불교는 대승경전이에요. 대승불교가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이들의 주장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대승불교가 왜 출현했는지, 대승불교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이 어떻게 부처님 가르침과 연관되는지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이해 없이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인 아비달마를 나누게 되면 굉장히 혼란스러워 지는 것이죠.

현재 우리 불교계가 바로 이 혼란 속에 있습니다. 남방불교를 공부하다 오신 분들은 오직 초기불교만 부처님 가르침이고 다른 것들은 전부 가짜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우리 전통은 전부 무시가 되겠죠. 그러면 우리는 또 뭐라고 합니까. 저네들은 소승이라고 무시하고, 대승이 우월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한 집안에서 분열, 투쟁이 생겨나요.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한국불교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초기결집과 ‘경’‘율’
먼저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불교사상사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지금부터 2700년 전 북인도서 탄생해 출가, 성도하시고 45년 동안 법을 설했습니다. 제자들이 이제 세상에 여래가 없어지니 우리는 누구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수행해야 하는지를 탄식했어요. 부처님은 열반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르친 가르침이 있다. 이제 그대들은 그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남에게 의지해선 안 된다. 자기 자신과 내 가르침에 의지하라.”

그럼 이제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돌아가셨지만 부처님 말씀은 남겨야겠죠? 그래서 시작한 게 결집이에요. 부처님 말씀을 들은 사람은 모두 모였어요. 500명 정도가 모여서 자기가 들은 이야기들을 쏟아낸 거예요. 바로 이 결집을 통해 각자 들은 말씀을 종합하다보니 모든 경전이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여시아문)’로 시작하는 거예요.

같은 장소에서 부처님 말씀을 같이 들었는데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한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결집 때 부처님 말씀을 전체적으로 합치면서 이런 경우 누구 말이 맞는지 합의해서 하나로 정하게 됩니다.

초기결집서 부처님 말씀은 ‘수트라(경)’와 ‘비나야(율)’, 두 종류로 나뉘게 됩니다. 부처님은 여러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설명하고 세상을 이야기하셨는데, 이 말씀을 교리라고 합니다. 이 교리들이 모여진 게 바로 수트라 즉, ‘경’입니다. 비나야는 ‘율’입니다.

보통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승’은 스님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에요. ‘상가’에 귀의한다고 해야 합니다. 상가는 공동체입니다. 상가 형성에 있어서 스님(승부) 한 사람으로는 성립할 수 없어요. 또한 상가가 형성되려면 율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예로 들어보면,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아니죠? 국민들이 모여 있지만 헌법이란 국법이 있고, 그 국법을 따르기 때문에 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이 서 있고, 율에 의해 유지되는 집단체를 ‘상가’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율이 없는 상가, 계율을 안 지키는 상가는 상가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율에 의지한다는 것은 나도 그 율을 따르겠다는 맹세나 다름없어요.

아비달마와 반야부운동
부처님 열반 이후 결집을 통해 경과 율을 편찬하면서 처음으로 부처님 말씀을 조직하게 됐어요. 그런데 부처님 경전이 너무 어려운 거예요. 예를 들어 ‘유’가 있어 ‘생’이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나요? ‘유’는 또 ‘취’가 있어서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유’에는 네 가지 ‘유가 있어서 태어나서 죽는 윤회가 일어난다'고 많은 책들에서 설명을 해놨어요. 이런 책들이 다 부처님 열반 후 300년 쯤 됐을 때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에 대한 설명이 이해되지 않아서 갖가지 해석이 나오는 거예요. 서로 불교 해석이 달라서 20개 부파가 만들어져요. 이를 우리는 ‘아비달마’라고 칭하고, 이때 나온 수많은 책들을 ‘론’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경·율·론, 삼장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아비달마불교가 불교의 핵심을 제대로 못보고 놓쳐버려요. 상좌부불교의 불교 이해는 근본적으로 왜곡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모든 교리의 목적은 이론을 만드는 데 있습니까, 우리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 있습니까? 전자에 매몰되지 말고 후자로 돌아가자는 대승불교가 출현하게 된 배경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아비달마불교가 스리랑카에 전해지고, 동남아시아 남방불교권으로 상좌부불교가 전해집니다. 그러면서 서로 교리가 달라 다툼이 생기고, 대승불교가 탄생합니다. 반야부운동은 언어에 집착하지 말자, 해석이 아닌 부처님 말씀의 본질에 집중하자는 운동입니다.

다툼은 이론에서 비롯된다
초기 대승경전으로는 〈금강경〉 〈소품반야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 ‘공(空)’이란 단어가 안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사실 〈금강경〉의 핵심은 공 사상이 아니라 ‘싸우지 말자’예요. ‘무쟁의 수행자’ 수보리 존자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무쟁분별경(無諍分別經)〉에서 부처님이 수보리 존자에게 다른 사람들과 다투지 않아서 무쟁을 수행하는 아주 훌륭한 수행자라고 칭찬하는 부분이 나와요. ‘아라냐 행자’란 말도 나오는데, 싸우지 않는 행자라는 뜻입니다.

부파불교에서 서로 다투니까 싸우지 말자는 내용은 다른 초기경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점심 공양을 마치고 숲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거만한 석가족 출신의 한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이나 열반을 가르친다고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허망한 말씀을 합니다. “나는 세상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 간단명료한 경 속에 중요한 이론들이 전개되고 있어요. 석가족 출신이 부처님에게 “왜 사람들은 다툽니까?”라고 묻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사람들은 관념을 만들어서 이론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거예요.

싸움의 본질은 이론에 있습니다. 불교는 이론이 아닙니다. 불교 교리들은 이론이 아닌 사실입니다. 부처님은 있는 것을 통찰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인데, 우리가 못 본 부분을 보여준 거에요.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불교 이론은 이런 거야” 하면서 이론을 가지고 다녀봐야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 돼요. 다른 이론을 만나 싸우기만 합니다.

그래서 대승경전에서 공 사상이 나온 겁니다. 그 말과 이론들은 전부 공한 것이다, 싹 다 지우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말로써 이론을 만들지 말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본뜻을 들여다보자고 말입니다. 반야 즉, 지혜로 통찰하라는 게 바로 〈반야경〉의 핵심입니다. 600종류나 되는 〈반야경〉의 정수만을 담아서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경이 바로 〈반야심경〉이라고 아시면 됩니다.

괴로움 해결 뒤엔 버려라
아비달마불교는 ‘분별설’이라고 해서 부처님께서 다 구별해서 알려줬다고 말해요. 하지만 이는  불교가 아니에요. 부처님은 우리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에요. 따라서 부처님이 사용한 모든 언어는 괴로움을 해결한 다음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무쟁분별론〉을 보면, “어떤 사람이 위험한 이쪽 언덕에서 안전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 강을 건널 뗏목을 만들었다. 도착해서 보니까 건너게 해준 뗏목이 참 고마웠다. 그걸 짊어지고 다닌다면 이를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이 묻습니다. 제자들은 뗏목을 버리지 않은 그 사람이 멍청하다고 대답합니다. 부처님이 “내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니라”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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