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납경장·지팡이 들고 길에 오르다

순례 사찰 납경소 직원이 납경을 써주는 모습. 원래는 순례자들이 자신이 사경해온 경전을 공양 올리는 것이었으나 현대에는 그 뜻이 조금 바뀌어 사찰 순례 증표로 쓰인다.

김해공항에서 오사카까지 약 2시간, 다시 오사카공항에서 도쿠시마 역까지 3시간 반 남짓. 다시 전차로 갈아타고 1번 절 료젠지(靈山寺) 근처의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4시 30분이 넘어 가고 있었다. 시코쿠 88개소에 포함된 절들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법당의 문을 개방한다. 순례에 필요한 흰 옷과 지팡이 등을 사고 참배를 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잠시 생각한 후에 본격적인 순례는 이튿날 떠나기로 결심하고 물건을 사곤 간단하게 절을 둘러보기로 한다.

흰 옷은 수의, 삿갓은 관 뚜껑
‘金剛杖’ 지팡이는 묘비 상징해

순례시 본당-대사당 순으로 참배
납경장에 도장·본존 이름 받아야
모든 순례寺 오후 5시까지 개방돼

커다란 배낭을 메고서 이리저리 보고 있으려니 절 안에서 직원이 나오신다.
“오헨로상(순례자님),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저, 방금 도착했는데 아직 일정이 전혀 안 잡혀서요.”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노숙을 감안하여 침낭과 비상식량을 한 짐 짊어지고 왔기에, 근처에 노숙할 만한 곳이 있는지 물었다. 직원 분은 이야기를 죽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첫날부터 노숙은 좋지 않아요, 또 절 근처에 노숙이 가능한 곳도 없구요.”

대신 절 근처에 싼 숙소가 있다고 알려준다. 식사 없이 잠만 자는데 2000엔이라는 이야기에 예약을 부탁했다. 10분정도 뒤에 숙소 주인이 픽업을 위해 나왔다. 주인을 따라 걷노라니 절에서 길을 하나 건넌 곳이 숙소였다.

필자가 처음 순례했던 2011년 당시에 1번 절 근처의 저가 숙소는 단 2곳뿐이었으나 최근 도보순례자들이 늘면서 절 근처에 저가숙소가 한 곳 더 생겼고, 도쿠시마 시내나 근방의 숙소에 묵으면 1번 절까지 픽업과 배웅을 해주는 곳들이 더 생겼다.

숙소에서 짐을 풀면서 주인과 이야기를 한다. 마침 도보순례를 한 적 있는 주인이었다. 내 짐을 하나하나 보면서 필요 없는 것들을 빼주고, 필요한 약품을 몇 개 챙겨 주었다. 한국인이 여기에 묵는 것은 내가 두 번째라고 한다.
“이미 박 상은 공부를 많이 하고 왔으니까 알겠지만, 흰 옷과 지팡이, 삿갓은 수의에요. 걷는 동안 죽었다 생각하고 한 번 걸어보세요.”

그러면서 흰 옷은 수의, 삿갓은 관 뚜껑, 지팡이는 묘비라고 알려준다. 옛날에는 순례 중에 명을 다하면 죽은 그 자리에 매장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유품에 금전이 있다면 묘비를 세웠지만, 아니라면 죽은 그대로 묘를 만들었다. 이때 얼굴에 흙이 들어가지 않게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묻은 뒤 묘비를 대신해 지팡이를 꽂아 주었다고 한다.

시코쿠 순례에서 지팡이만큼은 소중하게 다루라고 한다. 시코쿠 순례길에서 지팡이는 ‘콘고즈에(金剛杖)’라고 부른다. 손잡이 부분에 오륜탑(五輪塔)이 새겨져 있기에 지팡이 자체가 불탑(佛塔)인 이유도 있지만, 시코쿠 순례에서만큼은 코보대사의 화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마 동행이인(同行二人)의 순례를 위해 길동무인 지팡이를 그리 여기는 것이리라.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1번 절로 들어간다. 먼저 산문 옆의 미즈야(水屋)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군다. 흔히 한국불자들이 우리나라의 약수와 오해하여 마시곤 하지만, 일본의 미즈야는 목욕재계의 뜻을 담고 있다.

먼저 본당에 들어가 초와 향을 올리고 〈반야심경〉을 외운다. 보시함 옆의 안내문에 ‘미리 요청하면 주지스님의 인도로 십선계를 받고 출발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보통 단체순례자들이 순례 전에 십선계를 받고 출발한다. 순례 중에 모든 행동을 조심하고,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잠시 생각하다가 배낭을 풀고 놓고 우슬착지한다.

“삼보에 제가 귀의합니다. 모든 악업을 낱낱이 참회하고, 일체중생의 선업을 수희 찬탄하여, 마음에 부처의 깨달음을 지니게 하소서. 불법승 삼보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제가 귀의 합니다. 나와 남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겠나이다. 최상의 보리심을 일으키고, 일체중생을 나의 귀한 손님으로 여겨 최고의 보살행으로 아름답게 행하여, 모든 중생 돕기 위해 부처 이루게 하소서.” 

보리심을 일으키고, 보살계를 받는 게송을 외운다. 순례길의 걸음걸음이 모두 보살행이 되기를,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발원한다.

본당에서의 참배를 마치고 대사당(大師堂)으로 향한다. 대사당이란 코보대사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시코쿠 88개소의 모든 사찰들은 대사당이 있으며, 본당을 참배한 후에 대사당을 참배하는 것이 순례의 예법이다.

대사당까지 참배를 마치고 납경소(納經所)로 들어선다. 납경이란 원래 순례 온 이들이 자신이 사경해온 경전을 공양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 뜻이 조금 바뀌어 절을 순례했다는 증표로 공책이나 족자에 절의 도장과 본존불의 이름을 받아가는 것이 되었다.

납경장과 순례복, 지팡이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순례 사찰 내 용품점.

납경소에 달린 가게에서 흰 옷과 납경을 받을 납경장(納經帳)을 산다. 지팡이도 살까 했는데 밖의 지팡이 꽂이에 버려진 지팡이에 눈이 간다.
“Please with you!(당신과 함께 해주세요)”

어느 순례자가 자신이 다 쓴 지팡이를 꽂아두고 간 것이다. 살짝 뽑아보니 길이나 굵기가 적당하다. 지팡이가 코보대사의 화신이란 이야기에 생각이 미치니 슬쩍 웃음이 난다. ‘대사님, 아직 쉬실 때가 아닌가 봅니다.’

납경을 써주시는 스님이 책상의 두툼한 공책을 내민다. 이름과 출발일을 써달라고 한다. 항목을 보니 순례를 마친 날짜도 쓰여 있다. 혹시나 해서 앞을 좀 뒤져보니 한국인은 딱 두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도착일이 쓰여 있지 않았고, 한 사람은 ‘20일째에 다리가 다쳐 중도 포기하고 돌아왔다.’라는 메모가 있었다. 무사히 이 공책을 다시보길, 하는 마음으로 출발일을 쓴다. 아침 8시. 작열하는 여름 햇볕이 뜨거운 길을 나선다.

걸음이 빠르다면 1번에서 9번 절까지 하루에 다 돌 수 있다. 절간의 거리가 멀어봤자 5km 안팎이기 때문이다. 내지는 9번을 가는 길에서 하루를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걸음에는 나름 자신이 있기에 모든 순례에서는 9번까지 다 돌고 하루를 마쳤다.

이 길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두 가지 있다. 먼저 7번 쥬라쿠지(十樂寺)의 산문에서 일사병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무슨 정신인지 잠시 기절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곤 미즈야에 머리를 처박았다. 열이 좀 식으니 사리분간이 가능했다. 마침 미즈야 근처였고, 일행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객사할 경험이었다.

지금 와서야 ‘거 순례 중에 죽으면 대사님이 손을 잡고 극락으로 데려가신다는데, 또 마침 7번절 본존이 아미타불이신데 그대로 극락왕생할 뻔했다’라고 농담을 하곤 하지만, 그해 여름은 일본에서도 기록적인 폭서(暴暑)였다. 순례 중에 간간히 열사병으로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가 종종 들려왔다.

다른 한 가지는 순례길 가에서 죽은 어느 비구니 스님 이야기다. 역시 7번 절로 가는 중간에 있는 어느 휴게소에 얽힌 이야기다. 휴게소에 앉아서 잠시 땀을 식히고 있으려니 할아버지 한분이 다가오셨다. 휴게소를 관리인을 자처하시는 할아버지는 일반적인 인사말을 한두 마디 건네시더니 내가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다는 말에 말문을 여셨다.
“형씨가 불교를 공부한다니까 말하는 구만. 여기엔 원래 덕이 높은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사시던 작은 암자가 있었어.”

흥미로운 주제에 귀가 열렸다.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하지 못한 말인 듯 쉬지도 않고, 자세하게 이름과 지명까지 짚어가며 말씀해주셨다.
“여기엔 워래 묘카이(妙海)라는 비구니 스님이 계셨지. 오헨로상들을 재워주시고, 먹여 주시는 등, 그야말로 보시행을 자신의 수행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신데 내가 15살 때 병이 중하게 드셔서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며 나에게 도움을 청하셨지. 스님 본사가 히로시마에 있는데 워낙 연로하셔서 걷질 못하시니 내가 등에 업고 모시기로 했어. 배를 타고 히로시마로 가는데, 히로시마행 배에 딱 오르니 그대로 몸을 버리셨어. 내 등에서 말일세.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스님의 세수가 70세였을 거야. 그런데 신기한 게 꼭 잠에 들어 계신 것 마냥 편안한 얼굴로, 히로시마에 도착할 때까지 냄새 하나 나지 않았어. 팔다리도 부드러웠어. 난 분명 대사님이 묘카이 스님을 데려가신 것이라고 믿네.”

원래 배 위에서 사람이 죽으면 바다에 시신을 던지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선장을 찾아가선 이분은 보통 스님이 아니니 반드시 당신 절로 법구를 옮겨야 한다고, 남자 간의 약속을 하자는 말로 담판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스님의 시신은 본사에서 화장했겠군요?”

“그렇지. 난 끝까지 못 지켜봤지만 나중에 제자 스님이 화장한 유골을 모시고 와서 여기에 분묘를 하나 세웠어. 제자스님에게 들어보니 묘카이 스님은 원래 잘사는 집의 따님이셨다고 하더군.”

할아버지는 나를 휴게소 옆에 모인 순례자들의 무덤으로 안내했다. 옹기종기 모인 무덤 사이로 자그마한 비구니 스님의 조각이 모셔진 묘가 있었다. 소박하게 조각된 상호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당신이 순례자들을 돌보며 생을 마감하신 터에 여전히 순례자들을 조용히 맞이하시는 모습을 보자니 이런 저런 생각이 났다. 묘 앞에 향을 하나 사르고 두 손을 모았다. 할아버지도 손을 잠시 모으시곤 이야기 하셨다.

“여기 시코쿠에선 오헨로상들을 허투루 보지 않아요. 부처님이나 코보대사님이 순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아마 묘카이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시고 평생을 여기서 순례자들을 맞이하신 거 아니겠나. 스님이 먹이고 재운 부처님과 대사님이 얼마나 많았겠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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