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물욕에 대한 접근

 

불교는 욕망근원 제거하는 종교
물욕·과시욕 참는 게 능사 아냐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고 체화

마약을 하면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고 해서 처벌을 한다. 알고보면 참으로 특이한 형벌이다. 즉 ‘너는 왜 너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해? 그러니 벌 받아야 해?’하는 형벌이다. 자해행위를 하기 때문에 혼을 내는 벌이다. 이러한 형벌은 가부장재(가부장적 재화)라고 부른다. 가부장적 관점에서 죄로 다루는 것이지 실제로 죄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담배도 마약 못지 않게 건강에 해를 끼친다. 담배도 마약처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도 있다. 술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한 때 술이 아예 금지되었던 금주법의 시절이 있었다. 미국 사람은 당시 캐나다에서 술을 밀수해서 마셨고 밀수 과정서 마피아가 큰 돈을 벌었다.

현대는 소비의 시대, 소비중독의 시대이다. 소비중독도 마약, 술, 담배처럼 자신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소비중독은 처벌하고 싶어도 어느 수준 이상이 처벌 수준인지 결정하기 어렵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소비중독이 마약, 술, 담배 못지 않게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틀림없다.

이 세상에 쇼핑처럼 즐거운 일이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오랫동안 사고 싶었던 물건을 사면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큰가를 한 두번은 경험한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 무언가 묻는다면 아마 쇼핑과 게임이 아닐까 싶다.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1년에 한 번 해외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삶의 엄청난 즐거움이다. 올해에는 한 번도 해외 여행을 못해봤어’라고 한탄하는 것은 알고 보면 쇼핑을 못했다고 한탄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해외에 나가면 당연히 면세점이나 현지 가게에서 명품이나 그 지역에서만 살 수 있는 특별한 물건을 사는 쇼핑을 한다. 해외 여행 자체도 사실 여행지를 놓고 쇼핑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여행에서 쇼핑의 즐거움을 빼면 아마 즐거움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모두가 삶이 힘들다보니 스트레스 푸는 것도 쉽지 않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2/3 정도는 피곤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 퇴근해도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이것 저것 기웃거리면 눈이 반짝반짝 해지는게 인간의 본성이다. 남자는 자동차를 보면 여자친구보다 더 좋고 여자는 명품 백을 보면 남자친구보다 더 좋다. 몸이 불편하고 항상 피곤하다는 노인네가 백화점에만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앉지도 않고 돌아다니는데 피곤하다는 소리 한 마디도 안 한다는 자식의 말은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을 묘사한다. 돈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을 가장 제한 없이 마음껏 충족시켜줄 수 있는 수단이기에 돈을 ‘자유로운 권력’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대한민국에서는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 소비야말로 인간 욕망의 극단적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에서 쇼핑 때문에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진 여성이 50%에 육박한다는 조사가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한달 동안 카드를 긁어 살고 월급 나오면 카드 값 갚고 다시 카드를 긁어 한달 살고 월급 나오면 갚는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젊은이가 결혼을 하면 결혼생활에 적응을 못하기도 한다. 부부가 같이 번다고 해도 가정을 위해 적어도 절반의 돈은 내 놓아야 하는데 봉급 전부를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소비하던 버릇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다. 만약 여성이 일하지 않고 전업주부가 되면 봉급의 거의 전부를 가사를 위해 내 놓아야 하는데 이런 극적인 전환을 힘들어하는 신혼 남편이 많다.

별역잡아함경을 보면 “바르게 생활함은 어떤 것이냐 하면, 족성자가 그 재물을 살피어 그 많고 적음을 헤아리고 그 재물 쓰는 것을 조절하여 수입이 지출보다 많게 하며 마치 어떤 사람이 우담과일을 따 먹는데 처음 먹을 적에는 나무에 그 과일이 매우 많더니 벌써 많이 먹고 난 후 7일 동안 취해서 자고 있다가 이미 깨어보고나야 바야흐로 과일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소홀히 쓰지 아니하고 알맞게 잘 처리하며…”라고 설해져 있다. 즉 수입이 지출보다 많아야 하니 지출은 수입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대학시절에 지방에서 올라 온 친구들이 용돈을 쓰는 패턴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부모님이 돈을 보내주면 초기에 몽땅 쓰고 후반부에 돈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친구와 잘 분배해서 한달 내내 골고루 쓰는 친구였다. 모두 다 수입의 범위 내에서 지출했지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다거나 친구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수입의 범위 내에서 지출하는 습관은 어렸을 때 부터 길러 주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서 갖기 어려운 습관이다. 아무리 늦어도 결혼 전에는 가져야할 습관이다. 오늘날 저소득층이 수입의 범위 내에서 지출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중산층은 왜 수입의 범위 내에서 지출하지 못할까? 미국 조사에 의하면 중산층이 부자들의 소비를 흉내내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 중산층도 상당수가 과잉 소비에 빠져 있다고 본다. 중산층의 소비는 생존을 위해 소비한다기 보다 생존 이외의 욕망 충족을 위해 쓰여진다. 우리는 옷을 사는게 아니라 상징과 이미지를 위해 돈을 쓴다. 브랜드는 내가 누구인가를 나타내주는 가장 명료한 신호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브랜드에 목을 맨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신경 쓰지 말고 자기 만의 세계와 수입의 범위 내에서 지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습관에 의해 이런 행위를 할 수도 있지만 소비의 유혹은 언제 이러한 습관을 무용지물화할지도 모른다. 불교는 욕망을 억제하는 종교가 아니라 욕망의 근원을 제거하여 욕망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다. 소비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금욕으로 치달을 것이 아니라 불교수행에 의해 불타는 나의 욕망의 근원을 제거하여야 한다. 명품을 보고 억지로 참는 사람이 아니라 명품을 보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고와 행위가 체화된 사람이 진정한 불자이다.

소비중독은 금욕적으로 대응하면 실패한다. 소비중독은 중도적 사고와 행위가 수행에 의해 체화되어야 대응할 수 있다. 중도적 사고와 행위 또한 인위적 노력이 아닌 체화된 결과이어야 한다. 불교는 중도를 추구하는 종교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스님의 생활은 참으로 금욕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인도 수행자들의 문화에 비추어보면 불교 출가자의 생활은 결코 금욕적이지 않았다. 바라문교와 자이나교 교도들은 불교 출가자의 생활을 사치스럽다고 비판했다. 부처님의 사촌이었던 제바달다가 부처님에게 당시 수행자들의 삶의 표본에 가까운 금욕적인 계율을 주장하자 부처님은 이를 거부한다. 제바달다는 불교교단 내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세우는데 현장 법사가 천년이나 지난 뒤에 인도를 방문했을 때도 제바달다의 추종자들이 상당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불교 경전에 나타난 중도는 여러가지 개념으로 설해져 있다. 가장 유명한 비유는 거문고 줄의 비유이다. 거문고의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지나치게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소비를 중도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소비가 중도적 소비일까? 별역잡아함경은 “사치하지도 검박하지도 않고 그 중도를 취하느니라”고 설한다. 잡아함경은 “또 어떤 착한 남자는 재물이 풍부하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요 굶어 죽는 개(餓死狗)와 같다고 한다.”고 설한다. 부처님은 사치스러운 것도 경고하지만 인색한 것도 경고한다.

지나치게 사치해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인색해도 문제라면 중간 정도에서 소비하면 될까? 물론 적절한 소비가 중도적이지만 중도는 꼭 이런 모습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소비를 중간이나 평균값이라고 고집하는 것 또한 극단이며 중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적절한 소비가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불교는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경직성을 배격하므로 매 사안에 대해서 여러가지 요인, 조건을 고려하여 중도를 판단해야 한다.

가장 싼 물건이 1만원짜리고 가장 비싼 물건이 7만원짜리라고 하자. 1 더하기 7은 8이고 8을 2로 나누면 4이므로 4만원 짜리를 구입해야 중도적 소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중도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불교적인 자세가 아니다. 어떨 때는 4만원도 중도적 소비가 아닐 수 있다. 어떨 때는 2만원짜리가 중도적 소비일 수도 있으며 5만원짜리가 중도적 소비일 수도 있다. 중도를 수학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요인, 조건을 놓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되 그 결론도 일시적인 중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어떤 교수는 자동차, 집, 의복 등 모든 면에서 소박한 삶을 산다. 예외적으로 노트북은 최고급 명품을 고집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보기엔 지나치게 많은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 새 모델이 나오면 가장 일찍 사는 얼리어답터이기도 하다. 그를 중도적 소비에서 벗어났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중도적 소비인가 아닌가는 개별적으로도 판단해야 하지만 전체적으로도 판단해야 한다. 100개의 소비중 99개가 중도적 지출이었는데 1개가 사치스러웠다고 그를 소비중독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중도적 소비의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100개의 소비 중 99개가 중도적 지출이었는데 1개가 인색했다고 해서 그가 중도적 소비에서 이탈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디자인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젠스타일(zen style)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불교적이라고 생각하고 이름 붙인 것이다. 젠스타일은 ‘최소 표현주의’ 혹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을 최소화하고 단순화하는데서 아름다움을 찾는 자세는 불교의 중도적 자세와 일치한다. 과거에는 호화롭고 현란한 디자인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는데 언젠가 서민들이 사용하던 투박한 그릇이나 초가집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단순 소박한 삶은 불교적 관점에서 중도적 삶과 맥을 같이 한다. 군더더기를 완전히 없애고 삶의 핵심만을 남겨 두어야 우리가 진정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아이폰의 홈 버튼 마저도 없애려고 했던 스티브 잡스의 사례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군더더기를 없애고 행복에 집중해보자. 삶에 불필요한 것들이 달라 붙어 있으면 우리의 에너지는 한 곳으로 모아지지 못하고 불필요한 것에 낭비된다. 예술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삶에서도 불교적인 미니멀리즘으로 모든 것을 최소화하고 단순화하자. 이것이 중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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