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체가 없어서 묻을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마음은 체가 없어서 묻을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 대행 스님
  • 승인 2018.07.0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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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공하고, 모두가 함이 없이 했고, 모두가 비었다

 

‘마음의 연꽃을 밟고 일곱 발자국을 나왔다’ 이러는 건,
머리가 육체에서 벗어나야 자유인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근본 뿌리, 즉 불종(佛種)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걸음마다 연꽃이 피었다는데

질문 벌써 연꽃 철이 다가 와서 저희 동네에도 화사한 연들이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연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저의 삶도 또한 나와 내 주위를 맑고 향기로움으로 채워 나가기를 서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 탄생 설화에 보면 탄생하셔서 일곱 발자국을 떼셨고 그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신화적인 표현으로만 보아야 하는지요.

답변 진흙땅에서 연꽃이 핀다고 했죠? 그 모든 고난을, 자성의 고난을 다 겪고 나면 홀연히 연꽃이 피듯이, 저런 진흙땅에서 연꽃이 피는 거야 누구나가 보고 누구나가 말하고 누구나가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 몸이라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은 더러운 물이 묻지 않는다고 한 거죠. 마음이 체가 없는데 묻을 건덕지가 있어야 묻죠. “마음은 체가 없어서 묻을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에 관습과 집착과 욕심과 애정과 원한, 이런 모든 게 쌓여서 연꽃이 피지 못하고 자성을 보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진흙땅에서 연꽃이 피어도 더러운 물이 묻지 않는다는 그 뜻을 한번 새겨 보시도록 하세요. 우리 인간의 꽃이, 즉 마음이 홀연히 피어나면 그 꽃이 바로 마음의 연꽃입니다. 이 마음의 연꽃이 피면 그것을 견성이라고 하죠.

그래서 마음의 연꽃은, 즉 ‘육근(六根) 육진(六塵)’ 이렇게 할 때, 육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의 연꽃을 참나라고 이름해서 붙이는 거죠. 참나를 찾는 데에 그 방편이 된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누진(漏盡)이라고 하는 그것을 찾게 됨으로써 그 모든 것을 벗어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태어나셔서 일곱 발자국을 떼었는데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연꽃이 발밑에 피어나서 그걸 밟고 나오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한 발짝 떼어 놓을 때에, 즉 말하자면 용무입니다, ‘내가 이 발자국을 떼어 놔야겠다.’ 하고 떼어 놓는 게 아닙니다. 그렇죠? 내가 가겠다 하는 것도 없이 그냥, 말도 없이 그냥, 갈 때가 되면 그냥 그냥 갑니다. 그렇게 발자국을 하나하나 떼어 놓을 때, 뒷발자국은 없어지면서 앞발자국 떼어 놓을 때마다 그것이 용무입니다. 즉 말하자면 공법이다 이겁니다. 몸속에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들어 있는 한 개체가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 그러니까 연꽃으로 비유하자면 ‘내 마음이 연꽃이 피어나듯이 움죽거린다’고 했습니다. 즉 말하자면 한 발짝 떼어 놓을 때 내 마음이 피어나는 연꽃처럼 움죽거린다 이겁니다. 움죽거리는 연꽃이란 얘깁니다. 지는 연꽃이 아니라 움죽거리는 연꽃! 그래서 “연꽃이 피게 되면 지는 것도 없고 피는 것도 없는 것이 연꽃이니라.” 이겁니다.

그래서 ‘마음의 연꽃을 밟고 일곱 발자국을 나왔다’ 이러는 건, 우리가 육체에서 벗어나야 자유인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근본 뿌리, 즉 불종(佛種)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발자국을 떼어 놓는다고 방편으로 말씀을 하셨죠. 그러면 또 타의에서 찾는 게 아니라 우리 몸속에서 그렇게 찾아야 하는 거죠. 내 몸을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마음으로 붙잡고 갑니까, 그냥 놓고 갑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은 아무 요동이 없이 그냥 발자국을 떼어 놓죠.

살림살이도 그렇게 사시란 말입니다. 왜? 살림살이도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이 발자국 떼어 놓는 것처럼 순간 보고 흘러가고 이것 보고, 이것 보고 흘러가고 저것 듣고, 저것 듣고 흘러가고 이것 듣고 이렇게 돌아가는데, 여러분은 내내 좋은 게 있으면 좋다고 붙들고 언짢으면 언짢다고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그게 놔지질 않는 겁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언짢아도 한 찰나 좋아도 한 찰나인 것을 좋다고 붙들고 즐겁다고 야단이고 그게 행복이라고 하고, 또 언짢으면 언짢다고 울고 가슴 아파하고 그냥 그걸 붙들고 늘어지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잘못한 거면, 만약에 부도가 났다 이럴 때, 그 과정을 내내 붙들고 그냥 ‘어떡하면 빠져나갈까.’ 하고 온통 그것만 생각을 하고 있게 되죠. 그거 하나뿐이 아니라 일체를 다요. 조그만 거든지 큰 거든지 다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도 그렇게 살지 마시라고 하는 겁니다.

부도가 나서 숟가락 하나도 건질 수 없다고 하는 분이 있길래 그거를 몽땅 놔 버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만 거기다 놓고 그냥 뛰시라고 그랬어요, 그냥. 그랬더니 나중에는 부도를 다 해결하고 참 고맙다고 하시기에 당신한테 내가 고맙다고 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그걸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돌아가질 않아요. 흙물이라면 흙물대로 놔 버려야 새 물을 또 쓸 텐데, 흙물 담아진 거를 그냥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새 물이 들어올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울고불고 하는 놈은 누구입니까

질문 “내가 없다. 나는 공해서 없다.” 하시는데 저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번연히 이렇게 보고 듣고 말하고, 울고불고 화내고 하는 이놈은 누구입니까?

답변 참, 마음이라는 것이 상당히 요상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것을, 마음내기 이전을 말해서 자기 불성이라고 하죠. 영원한 근본이라고도 하고 뿌리라고도 하죠. 그런데 그 마음을 냈다 하면 법신(法身)이라고 하고, 그 마음에 따라서 육체가 움죽거린다 하면 화신(化身), 응신(應身)이라고 하죠. 화신은 바꿔지는 걸 말하고 응신은 서로가 대하는 걸 말하죠. 그래서 그걸 종합해서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했던 거죠.

그런데 마음을 안 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를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내 몸속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이냐, 심장이냐, 위냐, 식도냐, 방광이냐, 콩팥이냐, 정맥이냐, 동맥이냐 하는, 일체 이름해서 움죽거리는 그 자체가 바로 어떠한 부분에서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정맥이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동맥이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많은 생명체들이 작용을 하는데 어떠한 것이 작용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죠.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알아보신다면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왜냐하면 생각나기 이전에도 내가 했다고 할 수가 없고, 또 생각을 냈을 때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몸이 움죽거릴 때나 육체 속에서 정맥 동맥이 움죽거릴 때, 또는 눈귀가 움죽거릴 때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죠. 그런데 이 천차만별의 이름이 전부 내 한 그릇에 있습니다. 내 몸뚱이 한 그릇에. 그런데 그게 다 누가 하는 거죠? 누가 하는 겁니까? 모두 본인이 하는 거죠? 남이라고 할 수 없죠? 몸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어떠한 거위 한 마리도 나 아님이 없죠? 그러니 내가 했다고도 할 수 없고 안 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 어떠한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나는 없다” 하는 겁니다. 나는 없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실 때, 여러분 자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맥 동맥이 쉬지 않고 뛰면서 이어져 돌아가는데, 정맥이 뛸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맥이 뛸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전체를 볼 때에 어떤 걸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없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 나는 공동체야! 공동체니만큼 모든 것을 해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이 함이 없이 하기 때문에 손도 손 없는 손이 하고 있다. 그리고 없는 발이 한자리를 디뎠다. 이게 평발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항상 말씀드렸죠? 그래서 여러분 법이,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작용하는 생활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고, 여러분이 법신이자 부처님이자 바로 화신입니다. 그리고 상대성 원리로써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니까 항상 응신으로서 베푼다 이겁니다. 타의의 어떠한 신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나 자체부터 알아야 합니다, 나 자체부터. 나 자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걸요. 나 자체가 나왔으니까, 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자체가 모두, 바로 악업 선업이 인과가 돼서 영혼의 근본과 더불어 같이, 어머니의 살을 빌리고 아버지의 뼈를 빌려서, 즉 정자와 난자를 말하죠. 그래서 합류화돼서 합성 체제로서 형성이 됐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모두 몸속에서 작용을 하는 거나 외부에서 내 몸뚱이가 작용하는 거나 모든 것이 전체가 함이 없이 하는 겁니다. 왜? 어떤 걸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하죠. 가정에서 아버지 노릇 하랴, 남편 노릇하랴, 아들 노릇 하랴, 형님 노릇 하랴, 아우 노릇 하랴, 사위 노릇 하랴, 친구 노릇 하랴…, 사회에 나가서 어떠한 회사나 직장에 있다든가 어떠한 지위를 가졌을 때 또 이름이 붙죠? 그러니 따로따로, 몸뚱이 체가 따로 있어서 따로 행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동적으로…. 아주 묘법이죠. 그게 묘법입니다. 내가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여보!” 하면 뜻과 행과 말이 동시에 남편이 되는 거죠. 그런데 남편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아버지 노릇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그거나, 그 지금 말씀드린 거나 모두가 하나로 통과가 됩니다. 이 모두가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됐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말했다고 할 수 없는 까닭에 모두가 공했다는 겁니다.

모두가 공하고, 모두가 함이 없이 했고, 모두가 비었다. 어느 것도 내가 아니다. 내가 없다! 내가 없으니 물이 있으랴. 물이 없으니 강을 건널 게 있으랴.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 한 찰나, 찰나라고 하는 소리도 그 까닭입니다. 찰나에 아버지가 됐다 찰나에 남편이 됐다 이렇게 하듯, 부처님의 마음도 역시 그렇게 찰나에 바로 칠성부처가 됐다가 지장이 됐다가 관세음보살이 됐다가, 약사가 됐다가 용신이 됐다가 지신이 됐다가 온통 그렇게 화해서 나투죠. 자동적으로 이게 됐다 저게 됐다 이게 됐다 저게 됐다 하는데, 여러분이 지금 실질적으로 생활 속에서 하고 계시니까 그걸 납득을 하시죠?

그래서 부처님 마음도 동방에 이름을 지어 놓든가 서방에 이름을 지어 놓든가 지장이라는 이름을 지어 놓든가, 어떠한 이름이든지 그거는 이름일 뿐입니다. 지금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다 남편이다 아들이다 하는 거는 바로 이름일 뿐이죠. 그런데 이름이 자동적으로 누구한테나 주어졌지만 누구한테나 주어진 그 이름이 진실하기도 합니다. 영원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알고 본다면 그렇게 공하고 그렇게 ‘내가 없는 가운데 바로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구나. 산과 물이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구나.’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마음이라는 것이 참 묘하기도 하고 말로 어떻게 형용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잘 배우고 권세나 모든 게 아무리 다 좋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그 사람에게 작용을 한다면 망하든지 흥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미치든지 성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순전히 마음의 꼭지에 달려서 끌려다니고 움죽거리는 체(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놓아야 하는 이유는

질문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일체가 다 주인공에서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만약 일체가 다 주인공이라면 굳이 놓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또다시 좋게 굴려서 다스려서 놓으라고 하심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여러분께서 나쁘고 좋은 건 다 아시죠? 이거 하면 나쁘다, 좋다 이런 건 다 아시지 않습니까? 강도도 강도질하는 게 나쁘다는 거 알면서 합니다.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도둑질이나 사기질이나 이런 거 하는 것도 번연히 나쁘다는 걸 알면서 하는 거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주인공’ 하면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탄생을 했다 하면 주인공입니다. 생명과 마음 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 이것이 종합해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부처인 줄로 아는 것도 또는 부처가 아닌 줄 아는 것도 놓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대로 주인공이자 주인공이 과거로부터 벌여 놓고 어저께 벌여 놓은 게 오늘에 닥치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저지른 것 당신이 해결해라.’ 이거지, 누가 대신 아파 주고 대신 죽어 주고 대신 해 주는 사람 봤습니까? 자기가 저질렀으면 자기가 거둬야 하는 것이 분명한 거죠. 자기가 잘못 저질렀으면 자기가 고통을 받는 것이요, 자기가 잘했으면 자기가 즐거울 것이요. 여러분을 이끌고 성품을 발견해서 제대로 걸음을 걷게 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것 자기한테 되놔라 이 소립니다.

자기가 본래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예를 들어 말하자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어른이 됐으니까 일을 하는 거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주인공이 다 일들을 하고 모두 행하고 생활을 하고 나가지 않습니까? 딴 놈이 해 주는 거 없죠. 각자 하는 거죠. 과거에도 그렇게 살아왔고 현실에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것을 자기 주인공한테 되놓으라는 거고 되입력을 하라는 겁니다. 물질적인 입력은 한계가 있지만 인간의 컴퓨터에다 입력하는 거는 한계가 없고 자동적입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자기가 저지른 거 현실에도 자기가 저지르고, 잘하고 잘못하고 그렇게 가는 거 아닙니까. 잘하든 잘못하든 모든 걸 당신이 하는 거니까 몰락 당신한테다 놔라 이 소립니다. 그렇게 자기가 저지른 거고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자기가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 생활 전체가 바로 자기가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자기한테다 되놔서 입력이 되게 해라 이겁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자꾸 나오니까 그 자리에다가 되놔서 되입력이 된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새로이 입력이 들어가는 대로 현실에 또 나올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에다가 자꾸 놓고 관(觀)하는데도 안 됩니다.” 이러거든요. 이건 아주 하근기입니다. 우리가 생활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모든 건 여러분, 각자 여러분께서 하는 겁니다. 잘하든 못하든 못났든 잘났든.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인공의 뿌리요, 주인공이지 다른 분들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통해서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 주인공에서 하는 거,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거 모든 것이 주인공이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주인공이 모두 하는 거, 바로 주인공이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그런 걸 주인공에다 되놔라 이 소립니다. 그래야 주인공의 그 성품을 발견할 수가 있죠. 어떻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각자 여러분이 그대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하는 일을 주인공한테다 되놔라 이겁니다. 그러니 못 믿고, 믿고 이런 게 없죠. 그렇게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은 그 심성(心性)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어떤 분들은 “주인공에다가 관하고 그랬는데, 주인공은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왜 안 되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는데, 만약에 부산으로 차를 타고 갔으면 타고 올 수도 있어야죠.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하는 것을 모르십니까?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해야 이 끊임없이 이어서 진리의 길이 되는 거지, 끊어진다면 어떻게 진리라고 하겠습니까? 또 우리가 잘못하는 일도 있고 잘하는 일도 있는 것이지 어떻게 여러분이 다 잘하고 가십니까?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의 선장을 만들어 놓고, 아까 얘기처럼 잘못하게 되면 잘못하지 않게 가차 없이 쳐서 거기다가 되놓고 잘못하지 않도록 이렇게 다스리는 겁니다. 너무도 잘못하고 잘하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잘되는 건 감사하게 놓게 하고 또 잘 안되는 거는 ‘아, 나를 가르치느라고 이러는구나!’ 하고 돌려서 ‘너만이 잘되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돌려서 놓는다면 ‘이거는 안 되는 것도 알고 되는 것도 아는구나!’ 해서 안 되는 거와 되는 거 그 가운데서 진짜 성립이 돼야 되는 것이죠. 내리고 타는 그 가운데 있는 거지, 내리고 타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잘되고 못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잘되고 못되는 그 가운데에 그 자유인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인이 되려면 그 주인공 가운데서 바로 내 성품이 발견돼야 됩니다. 그렇게 발견되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거, 여러분이 주인공이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게 공(空)했으니까 모든 걸 주인공에 되놔라 이겁니다. 무슨 믿고 못 믿고가 없어요. 종교를 믿고 안 믿고 이전에 바로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타고 났으면 주인공이자, 바로 주인공이 살림을 하고 생활을 하고 상대를 겪고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이 그렇게 하고 살고 있는 것을 주인공 자기한테다 다시 ‘네가 하는 거니까 잘할 수 있잖아!’ 하고 자꾸 마음의 계발을 시키면서 발전을 시키면서 창조력을 기른다면 그 가운데서 성품의 작용이 드러나게 되고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자체가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모든 생활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을 발전시키려면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를 주인공에다가 모두 되놔라. 잘하는 건 감사하게 놓고 잘못하는 건 잘하게 굴려서 놔라.” 하는 그것이 배움의 지름길입니다.

사후의 길을 닦고 안 닦는 것의 차이

질문 조상에 대해서 여쭤 보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그 길을 닦는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걸 닦아 주는 거와 안 닦는 것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요.

답변 차이가 많죠. 예전에도 언급을 했지만 사람이 이 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이 몸속의 업보, 그 자기가 산 것대로, 지은 것대로 업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이게 또 거창하게 말이 나오네요. 따라다니는데 그 따라다니는 자체가 만약에 부부 사이에 임신이 되려고 하면 그 업보와 더불어 같이 선택이 됩니다. 그러니까 업보 있는 집에 또 업보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냥.

그런데 그런 것만이 아니라 이 도리를 모르면 그렇게 자기 자신도 그걸 모르니까 그 의식들이 그냥 자기가 살아 있는 줄만 압니다. 살아 있는 줄 알고 자식들한테, 이 집 저 집 다니던 의식들이 그냥 남아 있는 거죠. 그래서 갔는데 아, 부모가 왔는데도 대척도 없고 말도 없어. 그러니까 내가 말을 해도 들은 척 만 척하고 봐도 본체만체하고 아, 이러니 얼마나 부모가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 죽은 사람이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아는 겁니다, 의식들이. 그래 가지고는 아이, 세상에 이렇게 못된 놈의 새끼들이 어디 있냐고 그냥 화를 내고 발칵 뒤집으니 그 집안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그리고 말하자면 유전성이나 영계성, 업보성, 인연성 그것이 저거 하면 병원에 가서 아무리 고치려 해도 그건 안 됩니다, 또.

그러니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기 때문에 그냥 식구, 친척 이런 데로만 다니면서 백 년이 가도 그대로고, 그러니깐 그 집안 내에서만 뱅뱅 돌면서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집안에 개를 기른다든가 소를 기른다든가 고양이를 기른다든가 짐승을 기른다든가 하면 또다시 인제 거기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보이질 않으니까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잠자리하는 것만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짐승이 잠자리를 해도 그냥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면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거죠. 거짓말 아닙니다. 자기 차원이니까.

또는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자기 업식들이 그냥 뱀으로 보인다든가, 즉 말하자면 독사로 보인다든가 짐승으로 보인다든가 귀신으로 보인다든가 그냥 모든 게 그렇게 늘비하게 쫓아다니니까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만약에 어떻게 해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또 강을 건너려 해도 강을 건널 수가 있어야죠. 그걸 피해서 건너 보려고 애를 써도 피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한국에서 죄를 짓고 미국으로 들어와야 할 텐데 들어올 수가 없는 거죠. 그와 같습니다. 즉, 강을 건너야 모든 업식에서 벗어날 텐데 강을 아무리 건너려 해도 건널 수가 없는 겁니다, 빠져 죽을까 봐. 뱅뱅 돌아서 숨어 다니면서 배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인제.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도 블랙홀이라고 하지마는 사람의 생명 근본 자체가, 소용돌이가 돌아가는 것을 불바퀴라고 합니다. 그거를 넘어서야 되는데 넘어서질 못합니다. 타 죽을까 봐. 그렇기 때문에 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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