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다스리는 탐욕과 성냄
사랑으로 다스리는 탐욕과 성냄
  • 지운 스님
  • 승인 2018.07.09 0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자비수관 - 4) 수행현상과 내 마음 보기

자비손이 몸에 접촉하게 되면 접촉이라는 심리와 경각심이 일어나는데 이를 작의(作意)라고 한다. 그 다음은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일어나고, 감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언어문자와 결합하고 이미지화하는 표상작용이 일어나며, 그 이미지에 선악 등의 감정과 생각을 덧붙이는 사()의 심리가 일어난다. 그런데 접촉에 의한 경각심이 일어날 때 그 자극은 무의식 속에 있는 갖가지 정보들이 밖의 대상을 따라 일어나도록 한다. 감각을 통해 표상과 의지작용으로 나타나는 심리들이 마음에 영향을 준다. 특히 부정적인 심리와 감정이 묻어있는 심리라면, 내 밖의 대상과 관련 없이 내 안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출세간의 위빠사나
접촉으로 일어나는 수행현상은 다양하다. 깊숙이 숨어있던 트라우마도 나타난다. 그밖에 황홀한 빛이나 행복감, 기쁨, 아름다운 동산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위빠사나 지혜를 장애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에 주의해야 한다. 나타나는 현상만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한다면 세간 위빠사나라고 한다. 세간의 세와 시간의 간은 공간이다. 즉 세간이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세계라는 뜻으로 생로병사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시공간을 벗어나는 출세간의 위빠사나가 필요하다. 10년이든 20년이든 현상만을 알아차리는 명상은 왕초보자라는 사실이다. 설령 선정을 얻었다고 해도 출세간의 위빠사나는 아니다. 세간 위빠사나는 출세간의 선정을 얻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지혜가 생기지 않아 생각 속에 빠지거나 분노조절하지 못하거나 탐욕을 참지 못하는 격한 감정에 빠지는 감정의 속박을 그 뿌리까지 완전히 잘라내지 못한다. 또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하다. 알아차림도 현상을 알아차리는 명상에서 그 현상의 법을 선택하여 알아차리는 명상을 해야 지혜가 생긴다.

칠각지를 보면 그 뜻이 분명하다. 칠각지 첫 번째가 염각지(念覺支)이고 두 번째가 택법각지(擇法覺支)이고 세 번째가 정진각지(精進覺支)이다. 그 뒤로 희각지(喜覺支) 경안각지(輕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사각지(捨覺支)이다. 각지라는 뜻은 깨달음의 요소, 깨달을 수 있는 고리라는 뜻이다.

현상만 알아차리는 명상은
生死 괴로움서 못 벗어나
자비손으로 자비심 키우고
긍정적인 감정 전환시키길

염각지는 정념(正念)으로 알아차림이다. 그런데 택법각지는 현상의 알아차림에서 그 현상의 법을 선택하여 알아차리라는 뜻이다. 택법이 될 때 비로소 출세간 위빠사나 수행이 되는 것이다. 현상의 법이란 어떤 현상이든 공통되는 현상이 법이다. 예를 들어 자기부터 온 우주가 무상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무상이 법이 된다. 무상한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다. 태어남과 죽음인 생사이다.

좋아하는 물건이 있어서 아끼더라도 그 물건이 파손되면 만족스럽지 않다.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애인이 변심하면 그 괴로움이 말할 수 없다. 만족스러운 것이 없다. 또한 영원히 살고 싶지만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병이 생기면 삶이 만족스럽지 않음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불만족이 바로 고()이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괴롭다. 그리고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무아이다. 괴로움을 주도적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만족한 것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주재하는 자아가 없다는 무아이다. 그렇게 자기부터 온 우주가 그대로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이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통해 현상의 법을 선택하여 알고 정진해가면, 기쁨이 생기고 몸과 마음의 경안이 생기며 선정을 얻고 평안에 이르게 된다. 현상을 모양과 색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삼법인으로 알아차려 가면 생사에서 벗어나는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만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냥 초보자다. 그런데 왜 나타나는 현상만을 관찰하게 되는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이는 법을 보는 알아차림을 방해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바르게 명상하는 순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법을 보지 못하게 하는 심리를 정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비가 필요하다.

자비심은 탐욕과 분노를 줄이고 슬픔과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준다. 따라서 탐욕과 분노와 슬픔과 해치고자 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번뇌도 줄어들고 사라진다. 자비심을 증장하는 사무량심 명상이 필요한 이유다. 물론 자비심은 탐진치 등 부정적인 심리와 잠재돼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삼법인의 지혜가 생기게 하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자비손으로 몸을 관찰하게 되면 자비심이 생기고, 그 다음은 현상을 자세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서 삼법인을 보는 지혜가 생긴다. 나아가 자비심은 그대로 보리심을 일으킨다. 보리심은 모든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겠다는 염원을 갖고, 효과적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이다. 따라서 중생구제는 자비이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지혜이다. 그러므로 자비수관은 보리심을 일으키는 수행법인 것이다.

내 마음 보기-자비수관
대인관계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 불편한 마음이 늘 가슴에 남아 있다면 가정과 사회에서 언젠가 폭발할 소지가 있다. 이때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 방법은 상상 속에서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초대하여 용서해주고 관용을 베풀며 자비심을 주는 것이다. 만일 본인이 상대방에게 잘못을 했다면 역시 그를 초대하여 용서를 구하면 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상상 속에 초대한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므로, 결국 나의 심리를 초대한 것이며 나의 꼬여있는 심리를 푸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본인의 심리를 자비심으로 치유하여 긍정적인 감정으로 전환하는 명상이다.

그래서 자비수관의 자비관은 내 마음 보기 자비수관이기도 하다. 우선 자비의 뜻부터 살펴보자. 뜻을 살피는 것은 문장을 통해서 또는 법문을 듣고 뜻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이해는 지혜이다. 이와 같이 문장 속에서 법의 뜻을 이해하게 되고 또는 법문을 들어서 지혜가 생기게 하는 것이 곧 문혜(聞慧) 명상이다.

()-사랑
사랑이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사랑은 몸과 마음을 변하게 하고 주변 환경까지 변하게 한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가 있고 자()가 있다. ()는 물건이나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거나 소유함으로써 일어나는 사랑이다. 그래서 소유할 수 없을 때는 증오로 바뀌고 그 대상을 파괴시킨다. 반면 자()는 무소유이며 도리어 상대에게 주어서 기쁨을 얻는 것이다. 이 무소유의 이치를 사유하고 실천할 때 소유의 사랑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속성이 무아이며 소통이기 때문이다.

사랑 자()의 사랑은 무소유라 상대를 보호하게 되므로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깨달음의 즐거움을 준다. 상대가 미워하고 밀쳐내고 해치더라도 성내지 않고 해치려는 마음이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하여 독립된 것이 없어 공성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주는 능력이다. 그래서 사람을 비롯한 생명 있는 이들에게 먼저 번영이 있기를 바라고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랑이며, 번영과 이익을 행하는 모습이 사랑이라는 특성이다.

사랑이 사람이나 뭇 생명에 이익을 주는 특성이 있다면 사랑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유함으로써 좋아하거나 집착하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탐욕은 사랑과 성질이 비슷하므로 사랑의 가까운 적이 되며, 성냄은 사랑의 성품과 다르므로 먼 적이 된다.

이러한 탐욕이라는 적은 사랑이 주는 특성으로 항복 받을 수 있고, 성냄이라는 적은 무소유라는 사랑으로써 항복 받는다. 따라서 사랑은 성냄이 많은 이를 깨끗하게 하므로 원한, 성냄을 빼버리는 원인이 된다. 성냄과 멀어지고 마음이 조용해지면 곧 사랑이 구족된다.

사랑의 가장 큰 적은 탐욕과 성냄임을 알았다. 탐욕과 성냄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절제될 때 욕망과 성냄으로 인한 단절과 소외가 사라지고, 진정한 사랑이 꽃피는 것이다. 그로부터 행복이 싹튼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면 어린 아들과 딸은 마음의 안정을 얻고, 몸과 마음이 성장하며, 가정이 행복해지는 것과 같다. 부부간의 사랑, 형제간의 우애, 친구간의 우정 등도 마찬가지다. 설령 원수나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을 대하더라도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상대를 대할 때 적대감이 사라진다. , 화내는 감정이 봄눈 녹듯하여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은 자신과 상대와 그 환경 모두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모시킨다.

사랑과 연민은 모두가 연기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사랑은 단절로부터 관계성을 회복시켜주어 행복을 만들어낸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랑의 핵심은 감로수를 부어주고 행복을 빌어주는 축원에 있다. 감로수를 부어주고 행복을 빌어주는 축원 자체가 곧 욕망과 성냄을 없애주며 사랑을 증폭시켜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