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정중선 및 보당선


정중·보당·우두종 등 출현
정중선은 무억·무념·막망
보당선은 ‘무망’을 종으로

 

중국선종은 8~9세기를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과 전파를 하면서 흥기하기 시작했다. 한편 남종과 북종의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을 때 사천성 일대에서 정중(淨衆), 보당(保唐) 및 우두종 등 기타 유파가 출현하였다. 보당선(保唐禪)은 우두선이 한창 성행하고 있을 때 지금의 사천성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오조홍인의 문하 가운데 한 지류를 말한다. 보당선의 시조는 자주 덕순사 지선(資州 德純寺 智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창시자는 성도 보당사 무주(成都 保唐寺 無住)라고 한다. 무주(無住)의 스승이 바로 신라인으로 유명한 정중사(淨衆寺) 무상(無相ㆍ684~762)이다. 그러나 정중선의 창시자는 무상선사이고, 보당선의 창시자는 무주선사이다. 다만 보당선과 정중선이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정중보당계라고 칭하기도 한다.

먼저 간략하게 정중선을 살펴보면, 정중선은 무억(無憶), 무념(無念), 막망(莫忘)등 삼구로서 종(宗)을 삼았고, 보당선은 무망(無妄)으로서 종을 삼아서(以無妄爲宗), 마음을 일으키면 곧 망(妄)이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즉은 곧 진(眞)이다. 그러나 무심(無心)을 귀하게 여기서 묘극(妙極)으로 삼는다고 하고 있다. 또 〈역대법보기〉에 의하면 무상선사는 일찍이 본종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기를 ‘무억(無憶), 무념(無念), 막망(莫忘)’이라고 하면서, ‘무억시계(無憶是戒), 무념시정(無念是定), 막망시혜(莫忘是慧)’라고 계ㆍ정ㆍ혜에 대비시켜서 이 삼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삼구에 대해서 종밀은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釋義?)〉에서 자세하게 해석을 하였는데, “삼구라는 것은 무억, 무념, 막망이다. 뜻으로 하여금 이미 지난 경계는 추억하지 않게 하는 것이며, 미리 예측으로 번영과 성패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항상 이 지(智)와 더불어 상응해서, 산란하거나 혼란하지 않는 것이 막망(莫忘)이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삼구의 선법에서 중점은 바로 무념(無念)과 무억 無憶)에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무주선사(無住禪師)도 “불억(不憶), 불념(不念)은 일체법을 회의(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불법도 또한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세간도 또한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정중선의 관점으로 볼 때 보당선의 선법과는 거의 유사 내지 대동소이하다고 하겠다.

그림, 강병호

 

보당선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무주선사(無住禪師ㆍ714~774)라고 한다. 왜냐하면 보당선의 사상적 특징이 모두 무주선사의 선법사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선 무주선사는 선학의 기본입장을 ‘무념(無念)’에 입각해서 설립했다고 한다. 그는 〈역대법보기〉에서 이점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염을 일으키지 않으면 계문이 되고, 염을 일으키지 않으면 정문이 되고, 염을 일으키지 않으면 혜문이다. 무념은 곧 계ㆍ정ㆍ혜를 구족하는 것이다.(念不起戒門. 念不起是定門. 念不起惠門. 無念卽戒定惠具足)”고 하였다. 즉 무념의 반대로 념(念)은 일체법을 일으키는 근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무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본래 이 ‘무념위종(無念爲宗)’이라는 사상적 개념은 혜능과 그의 제자 및 신회의 주장으로, 무주선사의 ‘무념’설도 당연하게 이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무주선사는 ‘무념’은 곧 ‘진여문’이며, 이 ‘진여문’은 일체법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해탈의 이명(異名)이 된다고 보았다. 또 그는 본체론의 입장에서 보면 ‘무념’은 곧 실상이며, 해탈론의 입장에서 보면 ‘무념’은 곧 열반이 되며, 인식론에서 보면 ‘무념’은 곧 무분별지가 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무주선사는 당연히 혜능의 사상 및 하택신회의 사상을 흡수하고 운용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는 또 성불과 견성, 무념의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그는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에서 ‘중생본성, 견성즉성불도(衆生本性, 見性卽成佛道)’ 즉 “중생의 본성인 성품을 보면 곧 불도를 이룬다.”고 하였는데, ‘무념’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곧 중생의 본성이 자연히 드러나고 되고 불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점은 그의 스승인 무상선사의 관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무상선사도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에서 ‘무념’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라고 강조를 하고 있다. 즉 “염이 있으면 중생이다. 무념도 가설이다. 유념(有念)이 만약에 없다면, 무념도 스스로 없으며, 삼계심이 멸하고, 적지(寂地)에 거하지 않고, 사상(事相)에 주하지 않는다. 용공(功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허망을 여의었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부른다(爲生有念. 假說無念. 有念若無. 無念不自. 滅三界心. 不居寂地. 不住事相. 不無功用. 但離虛妄. 名爲解脫)”고 했다. 비록 보당선이 법통상으로 볼 때 남종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동시에 이론상으로도 조계혜능의 사상과 하택신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보당선이 그리 간단하게 남종선의 영향만을 받은 것은 아니다. 보당선도 당시에 유행했던 기타의 선종의 지파들과 마찬가지로 깊이 들어가 분석하고 비교해 보면 그들만의 독특하면서도 고유하고 독립적적인 사상적 체계 및 수행체계의 원칙이 존재한다.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에 보면 보당선에 관한 선법 및 수행에 관련된 방식과 도가의 내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발견 할 수가 있다. 크게 노장의 ‘무위(無爲)’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무주선사는 일찍이 유ㆍ불ㆍ도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 비판한 적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본인의 선리(禪理)를 발휘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노자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를 곧 중생의 본성으로 이해했고, ‘비상도(非常道)’는 말로는 이르지 못한다고(말로는 표현할 수는 없는 것)했다. 또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도 또한 중생의 본성이 되며, 그러나 언설은 있을지언정 모두 실질적인 ‘의의(意義)’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명자(名字)는 법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곧 ‘비상명(非常名)’이 된다는 것이다. 또 “만약에 어떤 학인이 오직 생사의 노역을 싫어하면 이것은 이익이 없다. 도에도 손해가 된다... 무위에 이르면, 곧 무위가 유위가 되며, 도에 즉한 본성이 된다.(若有學人. 惟憎塵勞生死. 此是不益也. 爲道曰損..., 至於無爲. 無爲無不爲. 道卽本性)”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말하기를 “도에 이르면 말이 끊어지고, 망념이 불생한다. 곧 이것은 이익이 된다. 심왕을 관할 때 일체를 모두 다 버리고 여의면 이것도 이익이 있으며, 이로써 무위에 이른다.(至道絶言. 妄念不生. 卽是益之. 觀見心王時. 一切皆捨離. 卽是有益之. 以至於無爲)”고도 했다. 그는 “‘무위’는 곧 ‘성공적멸(性空寂滅)’이며, ‘무부위(無不爲ㆍ有爲(하는 것이 있다)’이는 곧 ‘무위’에 주하지 않고, 무기의 수행을 하며, 무기를 쓰지 않는 것으로 증을 삼는다. 공을 쓰지 않고 증을 삼는다. 곧 이것은 무부위(無不爲)의 뜻이다.(不住無爲. 修行無起. 不以無起爲證. 修行於空. 不以空爲證. 卽是無不爲義也.)”고 하기도 했다. 즉 노장학의 특유의 은유법 내지 반어법으로 진리를 구사하거나 표현한 것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 점은 약간의 중국인들의 독특한 화법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무튼 무주선사는 해탈의 관건을 도가의 ‘무위(無爲)’의 개념을 빌려서 해석을 하고 있다.

결국에 그는 해탈의 의미상정을 불교의 ‘무념(無念)’과 도교의 ‘무위(無爲)’와 연관 지어서 그의 해탈관을 말하고 있다. 그는 세간은 본래 하나의 실상(實相)이며, 천하도 본래가 동정(動靜)도 없는 무사태평(無事太平)한 상태, 즉 본래 청정무구한 상태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번뇌를 조작하고, 그 스스로 조작한 번뇌에 집착해서 고통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때문에 무위(無爲)로서 수행의 원칙을 삼고, 임운자연(任運自然) 및 순기자연(順其自然)하면 자연히 환지본처(還至本處), 즉 반본귀진(返本歸眞ㆍ본을 돌이켜서 진에 돌아간다)할 수 있으며, 그러나 비록 무소득(無所得ㆍ얻는 것이 없지만)이지만 반드시 성불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무위(無爲)’로서 성공적멸(性空寂滅)의 경계에 이를 수 있으며, 이것은 곧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ㆍ하는 것이 없지만 하는 것)의 상태의 경지가 된다는 것이다. 무주선사는 곧 불교의 ‘무념(無念)’을 강령으로 삼으면서 도가의 ‘무위(無爲)’를 관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무주선사가 도가의 개념과 사상만을 인용한 것은 아니고, 유교사상을 흡수해서 사용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보당선의 사상적 체계 및 독립성을 유지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위의 내용과 같이 유ㆍ불ㆍ도를 사용해서 서로의 뜻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지만, 유ㆍ불ㆍ도 삼가(三家)의 사상을 혼용해서 사용했거나 혹은 인용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는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에서 “장자, 노자는 모두 무위무상(無爲無相)을 설하고, 하나를 설하고, 깨끗함을 설하고, 자연을 설한다(說一. 說淨. 說自然).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같지 않다. 이러한 인연, 자연은 모두 희론이 될 뿐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일체현성들은 다 무위법(無爲法)으로써 차별법을 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곧 무위에 주하지 않고, 무상에 주하지 않으면서, (無相)에 주한다.(佛卽不住無爲. 不住無相. 以住於無相)”고 하였다. 다시 불교와 유교의 차이점을 강조해서 말하기를 “이승인(二乘人)은 삼매(三昧)술에 취해 있고, 범부인은 무명의 술에 취해 있고, 성문인(聲聞人)은 진지(盡智ㆍ灰身滅智ㆍ신심의 번뇌를 완전하게 단멸한 상태, 즉 소승 아라한과의 경계)에 취해 있고, 연각인(緣覺人)은 적정지(寂淨智)에 취해 있고, 여래 지혜의 생기(生起)는 무궁무진하다. 장자 노자의 설은 성문 등의 설과 같다. 부처님이 성문인(聲聞人)을 꾸짖기를 맹인과 같고 농아와 같다고 했다. 예류일래 불환아라한(預流一來果不還阿羅漢)등 모든 성인의 그 심(心)은 다 미혹(迷惑)하다. (때문에)부처님은 중수(數)1)에 떨어지지 않는다. 일체를 초과했기 때문에 법의 구정(垢淨)도 없고, 법의 형상(形相)도 없고, 법의 동란(動亂)도, 법의 처소(處所) 및 법의 취사(取捨)도 없다. 이로써 공자, 노자, 장자를 초월하는 것이다. 불법은 항상 세간에 있으나, 세간법에 물들지도 않고, 세간을 분별하지도 않는다. 고로 예경을 관하는 바가 없다(공자는 신분의 차등에 근거한 예법내지 처세법을 말했다). 공자가 설한 많은 것에는 집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평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유ㆍ불ㆍ도를 회통하고 인용하였지만, 불교와 혼용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 유교의 분기점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 인용하였다. 이러한 점을 현대에 비추어 보면 요즈음은 불교의 정확성을 모르면서도 현대의 기타 학문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번쯤 반추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1) 〈성실론〉에 보면 부파불교시대에 논쟁의 쟁점가운데 하나인 부처님도 승려의 숫자에 해당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을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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