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전 상서]13. 성윤과 성유가 보낸 편지
[초의 전 상서]13. 성윤과 성유가 보낸 편지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8.07.0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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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정감 어린 교류 담아낸 서간들
1856년 5월 성윤이 초의 선사에게 보낸 편지〈사진 왼쪽〉와 1856년 9월 성유가 보낸 편지〈사진 오른쪽〉. 둘 다 초의를 그리는 절절함이 담겨있다.
1856년 5월 성윤이 초의 선사에게 보낸 편지〈사진 왼쪽〉와 1856년 9월 성유가 보낸 편지〈사진 오른쪽〉. 둘 다 초의를 그리는 절절함이 담겨있다.

오랜 세월동안 편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소통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편지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아마 소통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듯하다.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편지를 쓰는 일이 적어진 걸 보면 편지란 이미 사라져가는 소통 수단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스마트폰이 일반화된 작금의 현실은 더욱 손 편지의 의미가 희미해져간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는 원초적 정서를 일깨워준다. 특히 이들의 성의를 다한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따뜻한 정감이 전해지는 듯 한데 성윤(聖閏)과 성유(性惟)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도 그런 경우이다. 

상질의 차 의미하는 운유 보내며
살갑게 초의의 안부 물었던 ‘성윤’
차에 일가견 있던 승려임이 확인

봉은사 신중탱 증명 참여한 ‘성유’
초의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 보내 

먼저 소개할 성윤의 편지는 1856년 5월에 보낸 문안 편지이다. 크기는 29.2×41.5cm이며, 피봉엔 “영각 상원 소승 성윤이 삼가 올립니다(影閣 上院 小僧 聖閏 謹上狀), 초의사주 대법좌하 입납(草衣師主 大法座下 入納)”라 하였다. 피봉의 정보는 바로 성윤이 영각 상원에서 초의사주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밝힌 셈이다.

그렇다면 영각 상원에서 수행했던 성윤은 누구일까. 아마 초의를 사주라 칭한 것으로 보아 대흥사 승려일 것이라 추정된다. 그의 편지에 초의에게 차를 보낸다는 내용이 있다는 점에서 그도 차에 능했던 승려라고 짐작된다. 간곡하게 초의의 안부를 물었던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안을 드리지 못하고 소식이 끊긴 사이, 빠르게 세월이 이미 지났습니다만 뵙고 싶은 마음 어찌 다 하겠습니까? 삼가 더위에 법리도체를 살피지 못했습니다. 편안하신지요. 사모함이 구구하며 이 간절한 마음을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소승은 옛날처럼 죽을 쑤어 먹는 승려처지이므로 한갓 땔나무와 물만 허비할 뿐입니다. 민망함을 어찌 다 할까요. 아뢸 것은 춘추향제가 이리저리 돌아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많은 특별한 은혜를 입고 돌아와 깨어 있을 때나 잘 때에도 마치 묶여 있는 듯하여 더욱 흉중이 가득 찬 듯합니다. 일에 정성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한갓 헛되고 거칠어질 뿐입니다. 민망함이 더합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운유(雲?), 한 봉지를 상봉하오니 받으심이 어떨지요. 1856년 5월 6일 소승 성윤 올립니다.
拜違門屛 ?已經歲 瞻望曷極 謹伏未審端炎 法履道體 神扶萬安 區區伏慕 不任誠切 小僧依舊
作粥 飯僧樣子 徒費柴水 伏悶何達 就白 客秋享祀 轉到側下 多蒙殊遇而歸 悟寐如結
彌滿胸中 物無露誠 徒脩空簡 只增?然 餘萬謹不備 伏唯雲?一封上送 考納如何 丙辰 五月 初六日 小僧 聖閏 謹拜上書

병진년(1856) 5월은 추사가 해붕 대사의 화상찬을 썼던 때이다. 몇 달 후 추사는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때가 1856년 10월 10일이다. 그가 편지를 보낸 무렵은 막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그가 편지에서 “더위에 법리도체를 살피지 못했습니다. 편안하신지요”라고 말했으며, 자신의 처지를 “소승은 옛날처럼 죽을 쑤어 먹는 승려 처지이므로 한갓 땔나무와 물만 허비할 뿐입니다. 민망함을 어찌 다 할까요”라고 언급하였다. 아울러 그가 대흥사에서 지내는 춘추향제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한 터이다.

아무튼 그가 초의에게 문안 편지를 올리면서 “운유(雲?)를 한 봉지를 상봉하오니 받으심이 어떨지요”라고 한 말이 눈에 띈다. 운유(雲?)는 좋은 차의 별칭(別稱)으로 단차(團茶)을 말한다. 초의도 〈동다송〉에도 운유를 언급한 바가 있다.

한편 운유가 얼마나 훌륭한 차인지는 당 피일휴(皮日休)의 〈봉화로망사명산구제청령자(奉和魯望四明山九題靑?子)〉에 “맛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듯하고 모양은 둥근 옥뢰와 같다(味似云?美 形如玉腦圓)” 고 했으며 송나라 황유(黃儒)의 ‘품다요록서(品茶要錄?)’에 “가령 육우가 다시 일어나 금병(좋은 차)을 본다면 맛은 그 운유라 하고 그 맛의 상쾌함에 말을 잊을 것이다(借使陸羽復起 閱其金餠 味其云? 當爽然自失矣)”라고 하였다.

이뿐 만이 아니다. 운유가 얼마나 훌륭한 차인지는 명대 가중명(賈仲名)도 〈금안수(金安壽)〉에 “손톱으로 금 같은 차를 쪼개고 은사(銀絲)를 가늘게 자른 듯한데 차를 다리면 풍요롭다고 하였다(瓜分金子 膾切銀絲 茶煮云?)”고 하였다. 그러므로 잎차를 즐겼던 명대에도 운유가 가장 좋은 차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윤이 초의에게 보낸 운유는 최상품의 차를 보낸다는 것이므로 그 또한 차를 잘 아는 승려였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소개할 편지는 성유(性惟)가 1856년 9월에 초의에게 보낸 편지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성윤의 편지보다 4개월 뒤에 보낸 편지인 셈이다. 크기는 31.8×46.8cm이며 피봉엔 “대둔사 간행소에 머물고 있는 소승 성유가 삼가 올립니다(大屯寺 刊所留 小僧性惟謹上)”라 하였고 “초의 사주의 대법안에 입납합니다(草衣師主大法案入納)”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간행소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성유가 초의사주에게 보낸 것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성유가 어떤 인물인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대흥사와 관련이 있는 승려로, 봉은사에서 판전을 건립하고 신중도를 그릴 때 초의와 함께 증명법사로 참여했다는 단편적인 정보만이 알려져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봉은사 판전 신중도(奉恩寺 板殿 神衆圖)’ 화기에 “봉은사 판전 중단에 봉안하여 주상전하께서 만세를 누리시고 왕비전하께서 천수를 사시며 대왕대비전하께서 무량수를 누리시기를 기원하며 인연에 따라 비구 의순과 성유 일원을 증명법사로…(奉安 于奉恩寺板殿中壇奉… 主上殿下壽萬歲 王妃殿下壽千秋 大王大妃殿下壽無彊 王大妃殿下壽無窮 大妃殿下壽齊年 緣化秩 證明比丘意恂 性惟 日圓…)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유는 초의처럼 증명법사로 초청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봉은사의 판전은 1856년에 건립되었고 1857년에 신중탱화가 조성되었다. 당시 화승(畵僧)으로는 선율(善律), 유진(有進), 법인(法仁), 진조(進浩) 등이 참여했다고 하며 2007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편 성유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일종의 안부 편지이지만 그가 경전 간행에 간여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별한 것이 얼마가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없어지지 않고 남는 것이 있으니 어찌 해로서 오래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모습과 소리의 층이 가로막은 것입니다.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 노란 국화가 울타리에 가득합니다. 대법안의 기체후는 늘 만안하시지요. 멀리 사모하는 마음 이루다 할 수 없습니다. 소승은 아직도 옛날과 같으니 겉으로 어찌 번거로움을 다 말하겠습니까? 다만 간역(刊役)도 이미 다 마쳤습니다. 여러 곳에서 호위하는 마음이 이를 완성하게 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백단향 일편을 올립니다. 밤새도록 전로(篆爐)에 향을 피워 축원하실 때 쓰시면 어떨지요. 이만 줄입니다. 삼가 살피소서. 문후 드립니다.1856년 9월 11일 소승 성유인허 재배
奉別幾至忘記 然而只有不亡者存 何必以年記久遠 爲形聲之層?也 伏未審 黃菊堆籬 大法案氣體候 連爲萬安 遠伏慕區區 無任之至 小僧姑依疇樣 外何煩達 第刊役已至終竣 知諸方護念之所?也 白檀一片仰呈 以爲一夜篆爐?祝 如何 餘不備 伏惟下照 謹候狀
丙辰 九月 十一日 小僧 性惟 印虛 再拜

성유가 인허(印虛)라는 승려였음은 편지의 말미에 성유(性惟)라고 표기된 곁에 인허(印虛)라고 쓴 묵서 때문이다. 바로 인허라고 쓴 묵서가 초의의 글씨이므로 그가 성유 인허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이들이 한동안 관계가 소원했었다는 사실은 “이별한 것이 얼마가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라고 한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가 초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대법안의 기체후는 늘 만안하시지요. 멀리 사모하는 마음 이루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무튼 편지를 보낸 시점은 “노란 국화가 울타리에 가득한” 계절이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때이다.

그런데 그가 “간역(刊役)도 이미 다 마쳤습니다. 여러 곳에서 호위하는 마음이 이를 완성하게 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혹 이 일은 봉은사에서 판전을 건립한 후 〈화엄경〉을 간행 할 때 그 또한 간행 사업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봉은사 판전은 〈화엄경〉을 간행한 후 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간역을 마쳤다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무렵 초의는 추사가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해에 상경하지 못하고 다음 해인 1857년 봄 해남을 출발하였다.

그가 상경한 것은 추사의 상청을 찾아 조문하는 일이 가장 급한 일이겠지만 완호의 탑명을 받는 것도 상경의 한 가지 연유였다. 이뿐 아니라 그는 봉은사 판전의 신중탱화가 조상될 때 증명법사로 참여하기 위한 일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아무튼 초의는 1857년 상경하여 이 해 겨울을 과천 추사 댁에서 머물다가 1858년 2월 〈완당공제문〉을 지어 평생지기(平生知己)의 상청에 고했다. 물론 차를 좋아했던 추사를 위해 비장했던 자신의 차를 영정에 올렸으리라.

추사가 “오래도록 잊지 말자(長毋相忘)”라는 인장을 새겨 자신의 글씨 위에 찍었던 건, 초의와의 우정을 기리기 위함이었던가. 서로를 잊지 못했던 사람들, 추사와 초의가 그런 교유를 나누웠던 인물들이다.

실제 해남 대흥사로 돌아온 초의는 더 이상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이미 자신을 알아주던 벗이 떠난 세상이란 모두가 무의미했던 것일까. 7월 첫 날, 창문밖엔 하염없이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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