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모든 걸 거기다 부탁해 놓고 사세요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런데 여러분, 오늘 질문들 아니 하시렵니까? 내가 알면 얼마나 더 알며, 여러분이 모르면 얼마나 모르겠습니까?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도반으로서 같이 토론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이렇게 합시다. 아마 앞으로 우리 법사님도 그러실 겁니다. 우리 두 법사님도, 또 지금 한국에 있는 법사님도 다 그러실 겁니다. 한국에 있는 신도님들, 회장님들, 신행회의 회장님들도 그렇지만 참, 여자든 남자든 이런 공부를 해 가면서 사시는 분들은 사실 아주 여여하게 사십니다. 다 깨쳤다는 언급은 안 하시지만 말입니다. 깨쳤다 할 수는 없는 거죠.

나를 깨쳤어도 육조 스님이 12년이 걸려서 지혜를 얻었듯이 그걸 실험하고 체험하고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10년 동안 걸렸단 말입니다. 내가 체험 안 해 보고 내가 실험 안 해 보고, 여러분한테 말을 해서 한데 떨어뜨리게끔 해서는 절대로…, 그건 누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죠. “나를 깨쳤어도 깨쳤다는 말은 하지 마라. 실험을 하더라도, 체험을 하더라도, 지혜를 넓히더라도 지금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하지 마라. 내가 저게 되고 저게 내가 된다 하더라도 내가 부처다라는 말 하지 마라. 부처는 없는 게 부처다.” 그럽니다.

야, 주인공! 너 오늘 하루 참 잘 지냈는가?
오늘 하루도 또 잘 지내게 나를 잘 끌고 다녀야지.
내 주인공밖에는 나 끌고 다니는 놈이 없으니까.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이 질문하시면 우리 서로 대답하고 토론할까요? 어때요?

사회자 큰스님께서는 대화를 통해서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러분께서 어제도 나오시고 오늘도 나오셨습니다만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신 여러 가지 의문점을 기탄없이 질문을 해 주십시오. 그래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가시면 그대로 훌륭한 인생의 지침이 되실 것입니다.

질문자1(남) 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림 그리는 일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참선하는 길과 어떻게 같은 길이 될 수는 없는가.’ 이렇게 사실 주욱 생각하고 있었어요. 또 그렇게 그림을 그려 왔고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서 늘 문제가 되는 게 스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대로 역시 마음이었습니다. 땅을 파지도 않아야 되고 안 파지도 않아야 되고, 그게 사실 그림 그릴 때 늘 와 닿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내 자신이 나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안목, 그림에도 물론 새로운 안목, 새로운 영역이 있으니까 거기에 내가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하는 거를 늘 고민하다 보면, 소위 이야기하는 ‘나 자신을 붙잡는다, 놓아야 된다’ 이런 여러 가지 그….

큰스님 간단하게 질문만 해 주십시오.

질문자1(남) 예, 죄송합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자기 마음을 놓아야 되는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것이 결국 마음에 귀착이 되니까요.

큰스님 어느 시골에 떠꺼머리총각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근데 나무를 태우면 숯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걸로 땅에다 항상 그림을 그렸더랍니다. 근데 하루는 자기가 여자 생각이 나니까 여자를 그려 놓고 그냥 집에 가서 자고선 저녁나절에 나왔더니 아, 거기 예쁜 여자가 그대로 말을 하더랍니다, 그려 놓은 데서. 그래서 거기에서 말을 하는 소리 듣고 ‘이 그림에서, 내가 숯으로 그려 놨는데 말을 하네!’ 하는 동시에 그 여자도 없어지더랍니다.

그런데 그려 놓은 그 여자가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모든 그림 그릴 때는 또 살아나갈 때도 생각하지 말라.” 하고선 그냥 없어졌거든. 그래서 그것을 믿고 생각을 안 한 겁니다. 인생 살아나가는 것도 생각 안 하고 그저 가다가 보기 좋으면 그린 겁니다. 그래서 그 총각은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을 했고, 지금으로 치면 미술이라고 하죠. 그림 그리기 시작을 해서 그저 어디고 붓과 먹, 종이만 사 가지고 짊어지고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산하도 그리고. 그런데 그렇게 그리고 다니면서 어느 산중에 들어서니까, 노인네 한 분이 혼자 딸을 잃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울고 있거든요. 아, 시골 초막집에서 그렇게 울고 있으니까 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을 끌어다 놓으면서 “왜 우시느냐?” 하니까 자기 딸이 이렇게 나 혼자만 남겨 놓고 죽었으니 나는 어떻게 살라느냐고 울더랍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어야 살지 않느냐고 그러더랍니다. 딸이 바느질품을 팔았는데, 인제는 살 수가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런 거 걱정 하나도 하지 마시라고, 따님이 죽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러고선 그날 저녁에 바로 큰 헝겊에다가 종이를 붙여 가지고 아주 찢어지지 않게 만들어서는 거기다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집 딸을요. 야,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딸과 똑같이 그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심안으로 그 딸을 착 놓고 보니까 아이구, 그 딸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 딸을 그대로 그렸어요. 큰 배를 하나 그려 가지고 거기 떠억 앉혀 놨단 말입니다. 그러곤 물도 그려 놓고 나무도 그려 놓고 처억 벽에다 걸어 놓고 하는 소리가, 여기서 딸이 저녁이면 나와서 항상 밥을 해 줄 테니 비밀로만 하라고, 나는 딸을 봤다든가, 딸이 이렇게 잘해 준다든가 이런 거를 비밀로 하라고 이렇게 그 그림쟁이가 일러 주고는 갔거든요. 그날 저녁부터 그 딸이 거기서 나와 가지고선 고깃국도 끓여 주고 뭐, 밥도 해다 주고 다 하고 그냥 또 새벽녘이면 그리로 싹 들어가면 고만이야.

그럼 그 그림 그린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됐기에 그렇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무심과 유심이 둘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무심이라면 유심이고 유심이라면 무심이니, 아까 얘기했죠. 무심도 아니요, 유심도 아닌 그 누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유심도 아니고 무심도 아닌 그 마음을 누가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그림 하나를 그린다 할지라도 산 그림이요, 글자 하나를 쓴다 하더라도 산 글이요, 말 한마디를 한다 하더라도 산 법이요, 이렇게 되죠.

그러니 오늘부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허허…. (대중 웃음, 박수) 내 손이 그리는 게 아니라 바로 진짜 참나 손이 내 손을 이용해서 그린다는 생각을 꼭 믿으세요, 그렇게 주인공을. 그럼 꼭 거기서 살 길이 나와요.

질문자2(남) 저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거의 공통적인 의문과 생각일 걸로 알고 제가 스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삶이랄까 생명이랄까 궁극적인 의미, 아니면 인간으로서 그 존재의 의미를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어떤 스님께 많은 말씀을 들어도 왜 존재해야 되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많은 노인 어른들이 “아,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뜬구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씀들을 하시는데 그럼 과연 인생이 그렇게 뜬구름 같은 것이고, 그저 주어진 생명을 시한부까지, 언젠진 모르지만 그때까지 유지하고 그냥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과연 인생인 것인지, 늘 거기에 어떤 답을 찾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스님께서 과연 우리 인간의 궁극적 삶, 아니면 존재의 의미가 어떤 건지 설명을 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그것을 비교해서 한번 이렇게 말씀해 드렸으면 좋겠네요. 여기서 지금 물건들이, 종이나 비품이 많이 나갑니다. 헌쇠든지 넝마든지 이런 것들이 많이 나가죠, 종이도 그렇고. 그것이 재생돼서 나오죠? 많은 게 재생돼서 나옵니다. 그리고 또 이 금도 반지가 됐다가 가서 팔면 금방으로 가져갑니다, 금이기 때문에. 그러면 거기서도 재생이 돼서 다시 나옵니다. 귀고리로도 나오고 팔찌로도 나오고 반지로도 나오고, 이렇게 다른 물건이 돼서 다른 이름이 돼 가지고 나오죠. 그 다른 이름이 돼 가지고 다른 물건이 돼 가지고 나올 동안만 안 보이는 겁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할 때도 가만히 보면 자기가 자기 수술을 하는 걸 보고 있을 때가 있죠? 허허허…. 그리고 그게 죽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재생돼서 나온 것을 지금 보시면서도 죽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최고의 바로 음, 뭐라고 그럴까요? 아주 고등 인간이라고 볼 수 있겠죠. 최고의 인간이죠. 그리고 영혼이라는 그 말 자체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대로입니다. 그 생명 자체의 근본은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습니다. 의식 자체는 바로 영혼이라고도 하고 혼백이라고도 하고 영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 자체입니다. 불성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그 불성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의식 자체는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지만, 즉 말하자면 기름 또는 운전수, 차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죠. 그러니 허무한 것이 없습디다. 이 도리를 알고 보면 여러분이 그걸 느끼지 못하고 알질 못하기 때문에 그렇지, 아무도 없어도 거긴 꽉 차 있고 꽉 차 있어도 아무도 없고 이래요. 여러분이 이렇게 많아도 그 빈껍데기만 있다면 없는 거죠. 자기라는 걸 모르고 말입니다. 좀 생각해 보시는 그런 기회를 가지세요.

댁은 고민이 많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앞으로 남들을 위해서 살아 줘야 해. 그러니까 자기만 위해서 사는 게 아냐. 그러니 오늘부터는 ‘야, 주인공! 너 오늘 하루 참 잘 지냈는가? 오늘 하루도 또 잘 지내게 나를 잘 끌고 다녀야지. 내 주인공밖에는 나 끌고 다니는 놈이 없으니까.’ 이렇게 당신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그렇게 모든 걸 거기다 부탁해 놓아요. 그러고 살아요. 그렇게 석 달만 꾸준히, 하여튼 그 사는 거 일체 다, 그렇게 하면 뭔가 자기가 느끼는 점이 있을 거야. 그럴 때 나한테 요다음에 오거든 얘기해 줘. 알았죠?

질문자2(남) 네.

큰스님 나는 얘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현재 살아나가는 도리를 가르쳐 드리는 거지 말로 떨어지게끔 하는 게 아니에요. 버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도리를, 천체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천체의 질량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고, 천체의 질량 속의 핵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미쳤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거죠, 뭐. 어떡합니까, 그거. 그러니 현실로 목마를 땐 꼭 마셔야 되겠기에 이러는 겁니다. 우리 현실이 산 불교니까 산 불교지 죽은 불교는 없는 것이죠. 하지만 첫째, 자기부터 알아야 하고 자기부터 믿어야 하고, 자기부터 이끌어 나가야 하는 그런 도리를 모르고서 항상 타의에서 구하고, 타의에서 항상 허무하게 생각하고 이런다면 안 되죠.

지금 노인네들도 이 도리를 알면 정말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가도 검어질 거예요. 왜? 걱정 근심이 없고 ‘야 참, 이런 게 도리로구나.’ 그러고 그냥 기쁜 마음이 들어가니까 그럴 거 아닙니까? 아마, 당장 밥 먹을 게 없어서 죽그릇에 숟가락을 몇 개 꽂아 놓곤 “야, 노인! 잡수시오!” 하고 갖다 놔도 ‘야, 이렇게 이런 것이 참!’ 하곤 그걸 먹으면서도 허망하기는커녕 싱글벙글할 거예요, 아마. 허망한 건 아닙니다, 절대!

또 질문하실 거 있으신가요?

질문자3(남) 언제나 대자연의 진리를 체험하신 것을 글과 말씀으로써 저희들에게 이렇게 전해 주시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자기 주인공을 찾다 보니까 이런 게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던 생, 노, 병, 사 중에 늙고 죽는다는 것에는 의문점이 없습니다. 그리고 병도 제 마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병을 고칠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의문점이 바로 생이에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생이 무엇이냐?’ 그랬더니 ‘업이다. 네 업연에서 네가 여기 나왔다.’ 그러니까 ‘그 업연이 뭐냐.’ 그랬더니 ‘제8 아뢰야식에 네가 전생에 지은 업연이 있기 때문에 너의 부모와 인연이 있어서 왔다.’ 이러는데 제가 지금 계곡에 빠진 게 뭐냐 하면, 내 전생이 뭐냐? 그럼 내 전생에 대해서 좀 밝혀 주실 분이 계셨으면 했는데 마침 스님이 오셔서 아주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중 웃음) 그것을 지금 스님께서는 “모든 걸 다 놔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모든 걸 다 놓음으로써 좋기는 좋은데 한 가지 뒷꼬리는 아직까지도 그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풀어 나가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스님께 여쭤 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지금 전생에 대해서 물어 오셨는데 만약에 여러분의 전생이 없었다면 지금 현생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전생이 없다면 송장일 것이고 육신이 없다면, 또 보이지 않으면 무효일 것입니다. 또 생각이 없다면 목석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생이 없는데 어떻게 현생이 있겠습니까? 바로 곧 전생이 현생입니다. 현생이 전생이고요. (대중 웃음) 그거 뭐, 다른 거 없습니다. 선생님 그대로예요. 우리가 죽을 때 허무하지 않다 하는 것은 옷이 헐었으니 아무 데나 앉아도 그냥 괜찮거든. 이제 늙고 그랬다고 해서 이 옷이 헐었다고 그러는데요, 아무 데나 앉아도 그냥 흙 묻었다고 걱정할 거 없고 뭐, 그렇거든요. 그래서 새 옷 입는 거보다 헌 옷 입는 게 아주 좋죠.

그래서 아무리 노인네가 늙었어도 허무하지 않은 겁니다. 이 늙었다는 것이 이게 옷이 헐었다는 얘기인데 이왕 늙어 버렸으니 아무 데나 앉은들 어떠랴 이러고요. 참, 그 마음이 지혜롭고 크면 이 우주 안에 그 마음이 꽉 찼는데 무엇이 부러울 게 있으리. 그러니 그러한 마음을 가진 분은 밥 굶을 필요도 없고 용돈 안 줄 사람도 없어요, 또.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누가 어디서 나와도 나와서 우리가 허무하게 살지 않도록 돼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해 보십시오. 그렇게 즐겁습니다. 즐거운 거보다도 허무하거나 그렇지 않다고요. 늙어지면 뭐, 허무하다고 그러는데요, 젊은 사람들이 요새 허무하다는 소릴 더 잘해요. (대중 웃음) 노인네들은 외려 덜해요. 그것 참, 어떻게 거꾸로 됐는지 그래요. 지금 이분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허무하다는 게 왜 허무한가 그거부터 알아보려면 나부터 알라 이겁니다.

질문자3(남) 근데 왜 절에서는 업장 소멸을 해야 된다 하고 업을 강조를 많이 하고 심지어는 영가 천도 내지 운동을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스님 말씀하고 이게 혼동이 와요.

큰스님 아이, 혼동할 거 없어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꼭 천도를 해야만이 좋은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하면 마음이 안심이 안 되는 그런 근기를 가진 사람 앞에는 잘 차려 드려야죠. 안 그래요? 또 그렇지 않는 사람은 밥 한 그릇 놓고도, 자기 먹는 밥 한 그릇 놓고도 천도를 하고 또 남아. 아, 사람 근기에 따라서 있는 거죠. 그러니 이것도 잘못되는 게 없고 저것도 잘못되는 게 없어요. 하하하. 안 그렇습니까? 또 이것 보십시오. 사람이 상을 크게 차려 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뭐뭐 뭐뭐 비싼 걸 사다 놨는지 싼 걸 사다 놨는지 그걸 다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게 사다 놓은 것은 혼백도 다 알게 되는 거죠, 자기가 알고 있기 때문에. 하하하. (대중 웃음)

제사를 지내는데 며느리가 돈이 많이 드니까 이거 안되겠거든. 남편이 돈 십만 원을 주는 걸 가지고 오만 원은 떼 놓고 오만 원 가지고 가서 장을 다 봐 왔단 말입니다. “여보, 장 봐 왔소? 어머님이 잘 잡숫던 것도 사 오고?” 그러니까 “예.” 그러기에 아들은 그런 줄로 알고 좋아서 인제 그랬는데, 상을 차려 놨어요. 싼 거를 사다가 이렇게 해 놨거든. 그래도 그 아들은 그것을 의심 안 하고 그냥 지극한 마음으로 했고, 며느리가 그렇게 싼 거를 그만큼 해 놨다는 거를 알기 때문에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그만큼 차렸다는 거를 알고 있었다 이겁니다.

그래 그날 저녁 꿈에 “얘야, 네가 싼 것만 요렇게 해다 놨으니 지금 너의 할아버지도 모두 계신데 내가 가져갈 것도 없느니라.” 아, 그러거든요. 그러고 꿈을 딱 깼어요. 그래서 날더러 와선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런 꿈을 꿨는데 어떡해야 하나요?” 그러기에 허, 내가 웃었어요. 하하하. 세상에 자기 마음먹는 대로 조상도 알게 돼 있고 우주간 법계에서도 알게 돼 있고 보살도 알게 돼 있고 부처님도 알게 돼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겁니다. 또 아직 진화가 되지 않은 어떠한 짐승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시각이나 촉각이나 후각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쪽에서 그만큼 아는 사람이 이것을 통해 보면 그쪽에서 그때서야 “아하!” 사람의 마음을, 문을 열어 주니까 그쪽에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듯이 영령들도 그래서 알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천도시킬 때 여러분이 상 하나 차렸다고 해서 그런 것만 생각지 마시고, 이 모든 걸 둥글려서 마음의 원을 그려서, 원으로서 그 원심력을 생각하면서 둥글려 놓는다면 이 원 속에는 다 있지 않습니까? 일체가 다 있는데 아니, 뭐 그리운 게 있겠습니까, 거기? 예? 아니, 이 세계뿐만 아니라 전체가 다 있는데 모자랄 게 뭐 있겠습니까, 원을 그려 놓으면. 그 원심으로서 제사를 지극하게 드린다면 아마 가게도 도매상이고 또 어느 호텔이고 음식점이고 뭐, 그런 데로 아니 다니는 데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마음 쓰는 자손들의 영령들, 조상들은 그냥 항상 뷔페식 하는 데 가서 잡숫고 상점에 가서 항상 자기 가지고 싶은 대로 갖고 또 상점에 가서 자기 입고 싶은 대로 입을 겁니다, 아마. 벽도 없고 봇장도 없으니까. 물도 없기 때문에 건너갈 것도 없고 오고 가고도 없이, 시간 공간도 없이. 그러니 여러분이 마음을 넓게 쓰세요. 무슨 요거 하나 있다, 요거 차렸다 하면 영령들도 조상들도 요거 하나 차린 것만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좀 넓게 가지세요. 그리고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 질문하시는데, 그 모든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거지 업이 있다…, 내가 아까 얘기했죠. 생각을, 이 환상천을 훌쩍 뛰어넘고 또는 그러한 기복적인 생각에서 훌쩍 뛰어넘으세요. 과거도 없고 현실도 찰나 생활이니까 없고 미래는 안 왔으니까 없고, 아예 없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대로 좋게 생각하라. 좋게 생각하면 그대로예요. 아시겠죠? 쓸 것도 없고 씌울 것도 없는 겁니다. 부처님이 벗겨 주려고 애를 썼지 씌워 주려고 애쓴 건 아니에요. 그러니 우린 쓰지도 말고 누구 씌워 주지도 말고 그럽시다.

질문자3(남) 예. 그러면 그렇게 됨으로써 다음에 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지금 스님의 말씀을 듣고 여기서는 마음이 굉장히 좋은데 나가면 또 달라져요. 상대편이 공격을 해 옴으로써, 아니면 내가 공격을 행함으로써, 바로 이게 습이라고 그러는데요, 이 습을 어떠한 수행 과정에서 없애야 하는지….

큰스님 이렇게 하세요. 어떤 악이 나오더라도 악도 그놈이 하는 거고 선도 그놈이 하는 거고 뭐, 별생각이 다 드는 것도 ‘아유, 이런 생각 드는 것도 내 주인공밖에는 생각나게 할 수 없는 거니까 없애는 것도 거기밖에는 없지.’ 이렇게 모든 건 거기다가 그냥 밀어 던지세요. 지금 처음이니까 그렇지, 그렇게 줄창 해 보세요. 요다음에 또 내가 말할 거니까요. 그리고 또 좋을 거니까요.

질문자3(남) 글쎄, 그렇게 스님 말씀을 따르고 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그러면 해 나가는 게 참, 물렁해 가지고 주위에서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저런 바보 천치! 저런….” 이렇게….

큰스님 이렇게 하세요. 말을 하되 유순하게, 저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말을 하라는 겁니다. 말을 누가 하지 말라고, 바보처럼 비켜서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말을 하되 하지 말고’ 이 소립니다. 그러니 말을 하되 이 마음속으로다가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그대로 말을 해라 이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을 하려면 ‘말을 하되 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되 말을 하라’ 이거죠. 땅을 파되 파지 말고 땅을 파지 말되 땅을 파라. 허, “달 스님이 왔는데 인사를 하되 인사를 하지 말고 인사를 하지 않되 인사를 해라.” 이랬으니 거 참, 우리가 요런 거를 자꾸 토론하고 살다 보면요, 한바탕 울 때가 있겠죠.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9년 6월 18일 뉴욕 한인회관 초청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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