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人- 이건열 동국대 야구부 감독(55)

누군가 그랬다. 야구는 인생과 같다고. 홈런 같은 한방도 있지만, 대부분 차근차근 출루해 1, 2, 3루를 돌아 홈 플레이트를 밟아야 점수가 난다. 이기기 위해서는 계속 점수를 내야 한다. 9회 말까지 매 회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 역시 완생(完生)을 위해 하루하루 미생(未生)의 삶을 산다. 그 미생의 삶 안에서 우리는 매일 이기고 지는 게임을 반복한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그 스코어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완생의 삶이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전설의 포수 요기 베라의 말처럼 야구도, 인생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부임 후 5년 만에 통산 100승을 달성한 이건열 동국대 야구부 감독(55)도 마찬가지다. 어려웠던 선수 생활부터 여러 구단을 전전했던 코치 시절도 모두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완생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래서인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100승 달성을 한 이 감독은 “기쁘기보다는 그냥 무덤덤하다”고 했다.

“다른 대학의 좋은 감독님들도 거의 100승을 하셨을 겁니다. 저는 조금 빠르게 100승을 한 것일 뿐이에요. 비결이요? 그냥 한 게임, 한 게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6월 16일 건국대와 경기서 승리
부임 5년 만에 통산 100승 달성
올해까지 동국대 10회 우승 견인
“매 게임 집중하니 여기까지 와”

1983년도 동국대 첫 우승의 주역
당시 동대문 퍼레이드 기억 ‘생생’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기”


사실 100승 달성을 앞둔 건국대와의 경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경기에서는 현재 동국대 에이스 최이경 선수가 7이닝 무실점, 이어 나온 장웅정 선수 역시 나머지 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3회와 8회에 박형석·석호준 선수가 각각 타점을 올려 2대0으로 신승했다.

“초반에 점수를 좀 냈으면 편한 경기를 했을 텐데 생각하는 것보다는 엇박자가 많이 났어요. ‘100승이라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도 했는데 결국 선수들이 마지막까지 잘 풀어줘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동국대 야구부 ‘제2 전성기’ 이끌어
지난 2013년 이 감독의 부임 이후 동국대 야구부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 1980~90년대 대학야구의 강자로 군림했던 동국대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진한 성적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 감독 부임 첫 해에만 대학리그에서 3관왕을 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고 다음 해인 2014년에만 4관왕을 달성했으며, 현재까지 총 10회의 우승컵을 동국대에 안겼다. 특히 2014년의 대학야구 4관왕은 1977년 故 최동원 선수가 투수로 맹활약한 연세대 이후 37년만의 대기록으로 야구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이 감독 본인도 동국대 동문(경찰행정학과 82)으로 야구부 첫 우승의 주역이다. 1983년 대학야구 춘계연맹전 당시 건국대와의 결승에서 홈런 2방을 터뜨려 우승을 결정지었던 장본인이 바로 이 감독이다.

“프로야구에서 8번 우승을 했지만, 동국대 2학년 때 우승했던 것이 가장 오래 기억이 남아요. 특히 결승에서 우승하고 학우들과 동대문에서 역까지 걸어갔을 때의 추억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2013년 제69회 대학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기념촬영. 이 해에만 동국대 야구부는 3관왕을 달성했다.

“좋은 선수는 바른 인성서 나온다”
이내 궁금해졌다. 부임 이후 5년동안 우승 10회, 준우승 1회를 이끌어낸 비결은 무엇인지를 이 감독에게 물었다. 이 감독은 ‘인성’이라고 했다. 인성이 나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요즘 대학야구 선수들의 기량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결국 팀 실수를 줄이고 실수해도 빠르게 커버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등의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죠. 그래서 저는 선수들의 인성을 가장 중요하게 봐요. 복장도 깔끔해야 합니다. 지방 원정 경기가서 트레이닝복,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절대 안되고, 숙소 정리도 잘해야 합니다. 작은 것부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시합에서도 자기 자신의 컨트롤이 가능합니다.”

인성을 중요시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팀워크 때문이다. 이 감독은 독불장군과 같은 개인 플레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자신이 좀 잘한다고 거만함을 보이거나 백업 플레이를 잘 하지 않으면 시합에 기용하지 않는 것이 이 감독의 원칙이다.

“선수는 시합에서 자기 포지션과 플레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실수는 할 수 있어요. 다음 플레이에서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타석이든 수비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플레이들이 팀워크로 이어집니다. 팀이 우선이 되면 프로에 가서도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인성’을 강조하는 이 감독은 동국대에서 진행하는 명상 강좌들이 선수들의 인성 함양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야구부원들 중 불자들도 있지만 다른 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명상 강의는 필수 교양이기도 하니 대부분 수강하게 됩니다. 대부분 선수들이 종교를 떠나 명상 수업을 참 좋아합니다. 저 역시 심란하면 정각원에 올라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몇 몇 선수들도 틈틈이 정각원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명상 통한 인성 함양, 바른 선수 양성 효과

1985년 해태 입단, 12년 선수 생활
“주목받는 선수 아냐… 2군 강등도”
선수 시절 역경이 현재 위치 만들어
어려웠던 사람이 어려운 사람 알 듯
‘이심전심’ 리더십으로 선수들 교육

기본기·인성, 선수에게 제일 강조
인성 부족 선수, 기용 불가 ‘원칙’
학교 명상 교육 인성 함양 효과 커

“내게 불교는 마음의 고향 같아”
틈틈이 정각원서 명상·기도하기도
부인은 일산 군법당서 신행 생활

이건열 감독이 동국대 금강관 뒤에 마련된 배팅박스서 선수들에게 타격폼을 지도하고 있다.

실패에서 나아갈 길을 찾다
이 감독은 우승과 인연이 깊다. 동국대 야구부의 첫 우승을 이끌었고, 감독 부임 후에는 10회 우승을 안겼다. 대학 졸업 후 1986년 해태 타이거즈(現 기아 타이거즈)에 입단해 프로야구에 데뷔한 이 감독은 12년간 8번의 우승을 맛봤다. 특히 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 때에는 2방의 홈런을 쏘아 올리기도 했다. 적지 않은 프로야구 선수들이 한 번도 우승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은퇴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감독은 정말 우승과 인연이 깊다.

그렇지만, 이 감독 자신은 스타플레이어는 되지 못했다. 김성한, 장채근 등과 포지션이 겹치면서 출장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1997년 은퇴하기까지 12년간의 선수 생활동안 896경기에 출장해 2할 4푼의 타율을 기록했다. 주전 경쟁이 치열해 포지션도 자주 바꿨다. 투수와 유격수를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을 뛰었다. 본의 아니게 ‘멀티플레이형 선수’가 됐다.

“말이 좋아 ‘멀티플레이’지, 그냥 떠돌이였어요. 주전 경쟁에서 미끄러진 것이죠. 심지어는 결혼 직후에 2군에 내려간 적도 있어요. 2군 가면서 1군 연습간다고 부인을 1주일동안 속였죠. 얼마나 슬펐겠어요. 야구가 너무 안 돼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이 감독에게 정말 잊을 수 없고 힘든 시절이 또 있다. 군산상고 2학년 당시다. 월산초등학교와 동성중학교를 거쳐 군산상고에 진학한 그는 2학년 청룡기 준준결승에서 대전고와 맞붙었다. 연장 10회말 4대4인 가운데 1아웃에 상대팀 주자는 3루. 타자가 3루에서 들어오면 경기는 끝났고, 그렇게 되면 3학년 선수들의 대학 진학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다.

상대팀 타자가 친 땅볼을 3루수가 잡아 포수인 그에게 던졌고, 실수로 공을 놓치고 말았다.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3루수도 긴장했는지 불안한 송구였어요. 그 볼을 잡았어도 주자를 아웃시켰을지는 모르지만, 어찌됐던 공을 놓친 것은 놓친 것이니까요. 그때 엄청 울었습니다. 같이 운동한 선·후배 동기에게 미안했습니다. 야구를 그만두고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날의 경기는 이 감독의 야구 인생에 큰 좌우명 하나를 새기게 됐다. ‘끝까지 정확하게 잡아라.’ 이는 지금 자신의 선수들에게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후로 어느 경기든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한 볼도 끝까지 따라가서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잡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제가 가르치는 선수들에게도 ‘확실하게 잡아라.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로 실수할 수 있다.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선수 어려움은 내가 잘 알지
‘스타플레이어가 좋은 감독은 아니다.’ 야구를 비롯해 어느 스포츠 계에나 적용되는 명제 중 하나다. 이 감독도 마찬가지다.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명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부임 이래 졸업생 30명 이상을 프로야구에 진출시킨 것이 이를 보여준다.

이 감독은 선수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들의 어려움은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이기도 해서다. 선수들에게 요구하고 강조하는 것은 인성과 기본기뿐이다. 두 가지가 돼야 앞으로의 선수 생활을 좋게 이어갈 수 있는 것을 이 감독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저는 안 해본 것이 없어요. 선수 시절에는 투수, 유격수 빼고는 다 할 줄 알았어요. 코치 시절에는 2군·재활군·1군까지 다 거쳐 봤어요. 그러니까 기본기는 지도가 가능하죠. 한 포지션에만 있었으면, 그 포지션은 알아도 나머지에 대한 이해는 떨어져요. 그리고 저는 절대 선수들의 기를 죽이지 않아요. 저도 실수해보고 방황도 해봤어요. 어린 선수들이 실수하고 방황할 수 있는 거죠. 선수들의 어려움은 제가 겪었던 것들 입니다. 저는 선수들 스스로 자율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유도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웠던 시절 경험들이 지금의 제겐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었네요.”

불교, 내게 힐링을 주는 곳
이 감독에게 불교는 모태신앙이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독실한 불자였고, 부인도 일산 백마부대 군법당을 다니며 신행생활을 한다. 그래서 이 감독에게 불교는 ‘힐링’이자 ‘회귀처’다. 비워내고 집착을 버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마음을 비우면 게임이 잘 풀려요. 제가 느끼는 건데 내가 뭔가 하려고 하고, 이기려 하고, 꼭 이겨야 되고, 욕심이 생기면 역효과가 나더군요. 실패하고 지더라도 ‘여기 와서 내가 많이 배우는 구나’하며 집착을 끊으면 도리어 일이 잘 풀리죠. 사찰은 제게 비움의 공간입니다. 제가 선수들에게 사찰에 가 볼 것을 권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인터뷰 말미 야구공의 실밥이 정말 108개인지 물었다. “야구공만 입니까. 안 세어 봤지만 야구장 라이트도 108개라네요. 그래서 야구는 번뇌의 종목”이라는 이 감독의 답변이 돌아왔다. 번뇌는 집착에서 나온다. 상황이 바뀌면 ‘나’라는 존재의 사고와 행동이 바뀐다. 공 하나, 타석 하나, 경기 하나가 집착을 낳는다. 없었던 집착이 생기고 이것이 번뇌가 된다.

야구인으로써 인생을 통해 이 감독은 알게 됐다. 야구도 인생도 완생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야구와 인생의 길이다.

“야구란 건 인생이지. 승부는 중요하지만 절대 매달려선 안됩니다. 사람이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고 하죠. 그렇잖아요? 내가 볼 때는 야구는 인생이야.”

이건열 동국대 감독은?
1963년 4월25일 전남 함평 출생. 광주 월산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동성중학교, 군산상고, 동국대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해 12년간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 일본 주니치드래곤스 코치 연수를 거쳐 SK, LG, KIA에서 코칭스태프로 활약했다.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도 지냈다. 2012년 12월 동국대 야구부 감독을 맡은 이후 10차례 전국대회 우승을 이뤘다. 2015년 5월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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