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산신도… 우리 문화 담긴 불화 어디에

1997년 도난된 수덕사의 회화 성보들. 사진 왼쪽부터 수덕사 산신도·현왕도·칠성도·신중도·독성도. 함께 도난됐던 지장도는 2014년 문화재청과 경찰청의 공조수사 끝에 돌아올 수 있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숭산 기슭에 위치한 수덕사는 조선 말기에 경허 스님이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에 경허 스님의 제자 만공 스님이 중창한 후 많은 선지식을 배출한 사찰이다. 현재는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고, 조계종 제7교구본사로 충남 지역에 47개의 사찰과 관외 지역에 21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수덕사 창건에 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지만, 설화로는 〈덕산향토지〉의 수덕도령과 덕숭낭자 이야기와 함께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편에 있는 바위로 관세음보살의 현신 묘령여인과 정혜청년에 관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또 백제 위덕왕(554~597)대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경허 스님이 禪風 진작한 수덕사
1997년 신중도 등 5건 도난맞아
함께 도난된 지장도 2014년 환수
재산대장 기록 범종·大鼓 돌아와야

〈삼국유사〉와 〈속고승전〉에는 백제 무왕 때 고승 혜현(惠現) 스님이 〈법화경〉을 독송하고, 〈삼론〉을 강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했다고 전해온다. 또한 일설에 599년(법왕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한 후, 원효(元曉) 스님이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수덕사 대웅전은 1936년부터 4년간 해체·수리하던 시 벽체를 분리하던 중에 ‘지대원년무갑사월십칠일입주(至大元年戊甲四月十七日立柱)’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1308년(충렬왕34)에 대웅전 건립과 벽화 조성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벽화는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며, 임천(林泉, 1908~1965) 선생이 모사한 작품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 벽화는 건물 결구 사이의 작은 공간에 그려진 것으로 모두 40점이며, 주로 소불삼체, 주악비천, 나한도, 청·백 극락조, 수생화, 야생화 등을 그린 장엄용 벽화들이다. 따라서 수덕사는 14세기 초에 중심 전각의 중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 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에서 대웅전 내 목조대좌의 수종과 연륜분석 등의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목조대좌가 1309년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수덕사는 1530년에 작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덕숭산 사내에는 취적루와 불운루의 2개의 누각이 있다(在德崇山寺翠積雲二樓)”는 기록이 남아있고, 1528년에 대웅전을 단청 보수하고, 1673년에 노사나불괘불도(盧舍那佛掛佛圖)가 조성되었다.

또한 1751년과 1770년에 대웅전을 보수하였으며, 1803년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 보수와 풍판(風板) 개수 등이 이루어졌다. 19세기 말에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이 머물면서 중창한 후 사세를 넓혀갔다. 1908년에 법륜동월(法輪東月)이 화주가 되어 삼세불도, 산신도, 독성도, 현왕도를 조성하였다.

대웅전 내에 석가모니를 중앙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한 삼세불(보물 제1381호)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목조삼세불좌상은 만공 스님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다. 이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1939년 음력 12월에 남원 만행산(萬行山) 풍국사(豊國寺) 보강전(普光殿)에 봉안되었다가 귀정사를 거쳐 수덕사로 옮겨진 것이다.

수덕사 재산대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조선총독부 관보본이 남아있지만, 품목과 수량이 각기 달라서 다른 시기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총독부 관보본은 1932년 11월 12일에 작성된 것이어서 두 개의 재산대장을 비교하면 수덕사에 소장되었던 성보물의 품목과 수량 및 규격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재산대장에는 불상, 불화, 석조미술, 공예품 등이 23건이 적혀 있고, 1932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 재산대장에는 불상과 불화 등 16건이 언급되었다. 두 재산대장에 적힌 삼존불은 현재 무위당에 봉안되어 있다. 이외 1939년에 조각승 수연 스님이 제작한 목조삼세불좌상과 1931년에 만공 스님이 건립한 7층석탑은 적혀있지 않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2016년 발간한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에는 수덕사에서 도난당한 문화재는 칠성도, 현왕도, 독성도, 산신도, 신중도(1997.7.10 도난)가 실려 있고, 당시 이 불화들과 같이 잃어버렸던 지장시왕도는 2014년에 문화재청과 경찰청의 수사를 통해 사립박물관에서 회수되었다.

현재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불화는 5점으로, 이 가운데 산신도, 독성도, 현왕도는 1908년에 금호약효(錦湖若效), 청응목우(淸應牧雨), 천일(天日), 봉주(奉珠), 창일(昌日)이 영산회상도를 그릴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산신도는 크기가 가로 100㎝, 세로 136㎝로, 산신, 호랑이, 동자가 전면에 배치되고, 배경으로 소나무와 폭포가 그려져 있다. 산신은 투명한 두건을 썼으며 금색의 원형 무늬가 있는 붉은 포복을 입었다. 오른손은 옷자락 안에 감췄고, 왼손은 파초선을 들고 있다. 연잎 모자를 쓴 두 명의 동자가 공양구를 들고 있으며, 산신 뒤에 누워 있는 호랑이는 표범 같이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수덕사 산신도는 단순화된 구성으로 인물과 호랑이가 배치되었고, 설채법은 적색과 청색을 주조색으로 하였다.

독성도는 크기가 가로 64㎝, 세로 104㎝로, 산신도와 마찬가지로 중앙에 독성(나반존자)을 배치하고, 배경으로 소나무와 폭포를 그려 넣어서 천태산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원형 두광을 두른 붉은색 옷을 입은 독성이 오른손에 영지(靈芝)를 들고 있다. 이 두 작품은 20세기 전반의 금호약효가 그린 불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산신과 독성의 형태와 소재가 유사하다. 이외에 현왕도 역시 1908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배경으로 네 폭의 병풍을 두르고, 화면 중앙에는 다소 크게 염라대왕을 배치하고 상하좌우로 권속이 둘러 배치된 기본 구성을 따르고 있다. 현왕의 머리 위에는 천도재에 독경(讀經)되었던 〈금강경(金剛經)〉을 얹은 관(冠) 대신에 면류관을 쓰고 있어 특이하다. 현왕 좌우로는 판관(判官), 녹사(綠事), 시자(侍者)가 서 있다. 현왕의 관복을 비롯한 권속들의 의복과 탁자, 병풍 등의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칠성도(138㎝×118㎝)는 기존 자료에 의하면 1870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치성광여래는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채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고, 좌우에 보관을 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서 있다. 그 옆에는 2단으로 홀을 든 칠원성군이 시립하였으며 그 뒤로는 합장을 한 칠성여래가 위치한다. 치성광여래는 당당하면서 광배 테두리를 구름으로 장식하고, 상단에 7명의 동자가 합장하고 있다. 또한 신중도(136㎝×182㎝)는 화기가 원래 없는데, 중앙에 위태천을 중심으로 상단에 범천과 제석천을 배치하고, 하단과 중단에 신장상을 화면을 가득 채워 그려넣었다. 화면의 인물의 배치와 설채법 등에서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산 수덕사는 공주 마곡사와 더불어 충남을 대표하는 사찰로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만공일면(滿空月面, 1871~1946), 혜암현문(1884~1985), 벽초경선(1899~1986), 원담진성(1926~2008), 숭산 스님(1927∼2004) 등의 선지식이 거주한 사찰이고, 현재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은 성보박물관 중에서도 복장 유물에 관한 전시와 연구를 선도하는 기관이다.

수덕사에서 도난당한 유물이 지장시왕도와 같이 빨리 환수되어 잊혀진 연혁이 복원되기를 바라고,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재산대장에 적혀 있는 범종과 대고(大鼓) 등의 유물 소재 파악이 하루빨리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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