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위한 자비는 없다/우 빤디따/케이트 휠러 엮음/윤승서·이승숙 번역/불광 펴냄/1만 4천원

전 세계 위빠사나 명상의 위대한 스승
“해탈의 가능성을 품었기에 우리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이야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위빠사나의 성자’ ‘위대한 성인’ ‘법(Dhamma)의 거인’ …. 우 빤디따 스님을 소개할 때 붙는 수식어들이다. 스님을 이렇게 표현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명상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전하며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데 열정을 쏟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20세에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29세 나이로 미얀마불교의 고승(高僧) 마하시 사야도로부터 사띠빠타나 수행에 입문한 상수제자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입적 후 마하시 센터 원장을 역임했고, 이후 빤디따라마 센터를 열어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그 대표적 인물로 현대 서양 명상계의 유명 지도자 조셉 골드스타인, 잭 콘필드, 샤론 살즈버그 등을 들 수 있다. 혹자는 말한다. 스님의 등장으로 인해 서양에서의 위빠사나 명상 지도와 수행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말이다. 국내의 경우 이들 서양 명상 지도자들의 위빠사나 수행 지침서나 연구물이 다수 소개된 상황에서 중요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님이 처음 서양 땅에 발디딜 당시 세랍 63세.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가르침을 펴 온 스님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 시대 최고의 명상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스님이 2003년 5월, 미국서 진행한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법문을 엮었다. 

삶은 왜 고통스러운가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번뇌(kilesa)’라고 말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 역시 번뇌이다. 우 빤디따 스님은 수행의 목표가 우리 삶의 고뇌와 고통의 모든 요소들, 즉 번뇌를 끊어 냄으로써 해탈(vimutti)을 이루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우리 내면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가장 위험한 것으로 규정한다. 욕망, 미움, 어리석음 등의 내적 번뇌는 외적 번뇌의 원인이다. 결국 내적 번뇌로부터의 해방은 모든 번뇌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번뇌는 모든 고통의 시작이다
‘잔인하고 사악한 지배자’인 번뇌는 결과적으로 삶의 모든 찰나서 일어나는 윤회의 순환을 만들고, 고통스런 삶을 반복적으로 일으킨다. 윤회(輪廻)는 태어나고, 죽고, 존재하는 순환을 말한다. 윤회를 못 벗어나는 것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노화, 부패, 사망은 단지 삶이 끝났을 때만 겪는 것이 아니라 매 찰나마다 일어난다. 삶 자체가 고통이다. 스님은 어린 나무의 비유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

어린 나무는 몸 안서 일어나는 수액의 흐름에 의해 성장하고, 어느새 열매를 맺는다. 다 여문 열매는 땅에 떨어져 또 다른 싹을 틔운다. 여기서 나무 안 수액의 흐름은 곧 번뇌의 순환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맺는 열매는 행위의 순환, 그리고 그 열매가 떨어져 새로운 생이 시작되는 것은 결과의 순환을 나타낸다. 이 비유서도 알 수 있듯이 윤회의 순환 과정 모두는 결국 번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그 근본 원인인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중생의 번뇌 끊기에 대한 간절함은 스님의 신조서도 드러난다. “번뇌에게 베풀어 줄 자비는 없다” 이 책 제목인 이 명제를 통해 우리가 숨 쉬는 이 순간, 모든 찰나에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해탈은 특정 인물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해탈’을 특정 인물이나 이룰 수 있는 특수한 수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님은 이 책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해탈의 가능성을 품었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이야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라고. 불교서는 붓다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중생에 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우리 모두가 부처의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의 이야기는 불교의 여러 경전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 빤디따 스님 역시 해탈을 이루는 데는 그 어떤 차별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불법은 남녀, 노소, 빈부 등의 차별이 없는 완전히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우 빤디따 스님은 불교의 가르침으로 모든 사람이 해탈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한다.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는 일. 그것은 오직 자기 스스로 앎과 실천의 길에 들어 나아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를 물리치는 궁극의 수행법
스님은 해탈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제시한다. 이는 몸과 감각, 마음과 모든 현상(사물)의 생멸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념처 수행을 근간으로 한 마음챙김 수행법이다. 스님은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의 과정과 의의는 물론, 수행의 흐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장애나 꼭 잊지 말아야 할 점 등을 꼼꼼히 지적한다.

불교의 근본 교설과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이 책서 눈여겨 볼 부분 중 하나는 도덕성과 집중, 지혜, 즉 삼학(三學)의 관계가 체계화 된 점이다. 도덕적인 삶(戒)은 충동에 따른 행동을 억누른다. 그러나 무조건 억누르면 내부 충동이 더 깊어질 수 있는 역효과를 낸다. 이때 우리는 집중을 통해 마음을 돌림으로써 강박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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