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근중 두루 통하는 하나의 의식을 택해 감상을 따라 흐르는 식심을 두루 원만한 각성으로 몰입시키면 마침내 정각을 이루리라 했는데, 그 유일한 수행법 역시 ‘이 뭣고’이다. 

일체법은 모두 여래장심을 따라 일어나 망념의 분별로 나왔으므로 일심은 법계총상 자체이며, 본래 불생(不生)하여 끝내 한 법도 없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일체법은 모두가 망념을 따라서 의(意)가 일어나 나왔을 뿐, 일심(一心)의 자체가 일체법으로 나온 것은 아니며, 또한 세간의 일체경계와 차별상은 모두가 중생이 무명망심(無明妄心)을 의지해서 현재에 안주하고 미래의 종자(種子)를 지니게 된다. 

시고(是故) 일체법(一切法) 여경중상(如鏡中像) 무체가득(無體可得) 유심허망(唯心虛妄) 이심생즉(以心生則) 종종법생(種種法生) 심멸즉(心滅則) 종종법멸고(種種法滅故)라,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에 나타난 허상과 같아 얻을 만한 실체가 없듯이, 삼계(三界)도 심의식(心意識)의 허망한 망상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왜냐하면 일심이 무명으로 나오면 갖가지 법이 따라 나오고, 일심의 무명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도 따라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식은 “모든 현상은 모직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일체유심조도 일체가 심식(心識)에 의지해 존재하고 작용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이며 기본이다. 삼라만상 우주 땅, 사람들이 몽땅 의식으로 빚어낸 허망한 업(業)의 그림자일 뿐이다.

생사 또한 하나의 환상(幻想)이다. 진실(眞實)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또한 묘각(妙覺)의 여명(黎明)
으로 생긴 허망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식심(識心)인데, 이 식(識)이 육근에 붙어 육근(六識)이 되는데 심왕(心王)의 육문성(六門城)을 점령하는 마왕(파순)과의 전쟁이 수행인데, 육문성곽(六門城郭)을 옛날 화살로 아무리 쏘아봐야 성벽을 넘어 마구니를 물리 칠 수 없는 것이다.

원자폭탄으로 성안을 바로 폭파시킬수 있는 최신 무기가 바로 ‘이 뭣고’이며, 찰나간 한생각의 뿌리를 ‘이 뭣고’로 잘라 버림과 동시에 생각 이전의 근본자리를 자동적으로 ‘이 뭣고’로 관(觀)하게 되는데, 이것이 회광반조이며 마구니를 항복받아 업장을 소멸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지금 현재 면전에 전개된 온갖 법이 심식으로만 헛되이 지어진 것이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고, 즉 무자성(無自性)으로 자체성이 없고 진심(眞心)의 거울에 비친 망념(妄念)의 그림자 일뿐이며, 꿈과 같고 환(幻)과 같다는 것이니, 거기에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수능엄경>에 보면 제 8장식(藏識)인 아타나(阿陀那)란 미세한 식(識)이 수만 생의 인습(因習)으로 굳어진 것이 식심이다. 그 것으로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마치 폭포처럼 흐른다.

그래서 육근중 두루 통하는 하나의 의식을 택해 감상을 따라 흐르는 식심을 두루 원만한 각성으로 몰입시키면 마침내 정각을 이루리라 했는데, 그 유일한 수행법 역시 ‘이 뭣고’이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감분불이(心滅則龕墳不二)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심외무법(心外無法) 호용벌구(胡用別求)’이라.

이 말은 마음이 생기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니 토굴과 분묘가 둘이 아니고, 마음밖에 일체법이 없는데 무엇을 밖에서 구할것이 있을까, 어젯밤 마신 감로의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 바가지에 담긴 것을 보고, 토해내면서 깨친 원효대사의 오도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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