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재 교수, 21일 지광국사탑 학술심포지엄서 주장

1911년 촬영된 지광국사탑의 모습.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지광국사 해린의 역사관이 자신의 가문과 원주 지역 학풍에 기반을 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인재 연세대 원주캠퍼스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6월 21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최한 학술심포지엄서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비문을 분석하고 이 같이 주장했다.

원주 원씨 후손인 지광국사
집안 가풍따라 복희역 연구
‘기자고도’ 주장, 가풍 영향
승탑비 상단 묘사된 이상세계
고구려·고조선 등 역사상 구현


이 교수는 ‘지광국사 해린 비탑과 남한강 원주풍’ 발제에서 지광국사 승탑원과 비탑의 역사적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관련 문서와 도판 사료들을 복합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전제하며, 정유산의 해린 비문과 이오의 소현(해린의 제자) 비문을 살폈다.

이를 통해 이 교수는 “정유산은 주나라 목왕을 문수보살이 돕고, 양나라 무제를 미륵보살이 도왔듯이, 지광국사 해린이 고려 현종의 고려 중흥과 문종의 불교국가 건설을 도왔다고 판단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 교수는 “고려 문종의 불교국가 건설은 대장경 각경 사업 주도로 해석되지만, 고려 현종의 고려 중흥을 어떻게 도왔는지는 분명치 않다”면서 이에 대한 해답으로 지광국사가 1021년 평양 중흥사 법회에서 ‘기자고도(箕子古都·기자 조선의 옛 수도)’를 주창한 사실에 주목했다.

이인재 연세대 원주캠퍼스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6월 21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최한 학술심포지엄서 발표를 하고 있다.

당시 고려는 거란과 경쟁을 하고 있던 시절로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서는 기자 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 확보가 중요했다. 지광국사는 현종을 보좌하며 이 같은 역사적 전통성을 확립하는 데 일조했고, 이는 자신이 성장한 원주 원씨의 가풍과 지역 학풍에 기반한다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실제 지광국사의 할아버지는 음양학에 조예가 깊었고, 증조부·고조부는 모두 복희역을 연구했다.

이 교수는 “지광국사는 가문에서 배운 역학과 음양학, 역산학 등을 토대로 기자 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 의식을 확보했다”면서 “그 결과 현종은 고려 중흥주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문종은 거란에 대해 고려는 기자 조선을 계승한 왕조라는 점을 당당히 설명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 교수는 승탑비와 승탑의 제작자들은 지광국사 역사관들을 반영했다고 추정했다. 특히 승탑의 상단에 표현된 이상세계는 “용화세계 구현보다는 기자 조선과 고구려, 단군 조선의 역사상을 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려 미(美) 상(想), 지광국사탑을 보다’를 주제로 열린 이날 학술심포지엄에서는 △‘고려중기 법상종(자은종)과 지광국사 해린’(남동신, 서울대) △ ‘고려중기 법상종 사원의 불교조각’(최성은, 덕성여대) △‘탑비를 통해 본 남한강 유역의 불교미술’(정성권, 동국대) △‘지광국사탑 장엄의 이해’(박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지광국사탑의 외래적 요소와 성격‘(박대남, 국립문화재연구소)이 발표됐다.

한편, 지광국사탑은 국권침탈 직후 일본인에 의해 국외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됐으며, 한국전쟁 당시 포탄의 피해를 보았고, 10여 차례의 해체와 이건(移建) 과정에서 본래의 모습을 일부 상실한 상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6년 지광국사탑의 보존처리를 위해 탑을 해체하고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보존·복원 과정에서 석재의 산지를 추정하고 과거 복원에서 뒤바뀐 옥개석 도상의 위치를 바로 잡는 등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