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비수관 - 3) 자비수관 명상하는 방법

자비손의 역할
자비수관의 명상 방편은 자비손이다. 자비손은 시각화한 심상(心像)의 손으로 몸에 접촉하는 마음의 손이다. 이 자비손이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자비심을 이끌어내고 증장시키면서 탐욕과 분노, 슬픔과 해치고자하는 마음을 제거한다. 또는 자비손은 감로수를 머리위로 부어주는 관상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자비손은 상상으로 만든 방편
효과는 실제 손과 다르지 않아
접촉은 필요하지만 만들어
지혜로 관찰해야 보살로 산다

지금부터 자비손을 시각화하여 몸을 관찰해보도록 한다. 물론 자비심이 직접 몸의 구성요소인 흙···바람·허공의 5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손을 형상화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무형상의 의식이 움직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의식을 움직이려면 의식을 형상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손은 움직여서 어떤 것이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형상화한 손은 의식을 움직이며 자비심을 전달한다. 그래서 손은 자비심과 궁합이 맞다.

()’가 베풀어서 기쁨을 주는 것이라면 ()’는 고통을 빼앗아 없애주는 것이며, 손 또한 그런 기능이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자비심과 손은 닮은꼴이다. 그런데 상상력으로 시각화한 것은 대상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TV화면 속의 영상이 시청자에게 영향을 주는 것처럼 상상으로 시각화한 것도 대상에게 영향을 끼친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중심으로 한 자비손 움직임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자비손의 순서
자비손이 움직이는 길은 몸, , 마음과 관련되는 중요한 24가지 신체부분이다. 먼저, 마음의 8개 부분과 관련되는 것으로 정수리 차크라-이마 미간에 나 있는 백호 두 눈썹 두 눈 오른쪽 귀(귓부분) 왼쪽 귀(뒷부분)-뒷머리 목 뒷부분 어깨 양옆 목으로--코다. 8개 부분은 의식을 깨우고 의식과 관련되는 심리, 사상과 철학 등 학문적인 것 또는 심오한 종교적 진리와 관련되는 부분을 깨운다.

입의 중요한 8개 부분은 코 끝--구개를 비롯한 혀 안쪽-목 차크라 겨드랑이-양 옆구리-겨드랑이 젖꼭지 가슴-명치-횡경막-갈비뼈-배꼽 신장을 둘러싼 복부다.

몸의 중요한 8개 부분은 생식기 차크라 항문-골반-엉덩이뼈-꼬리뼈 넓적다리 관절들 무릎 장딴지 발가락-엄지발가락-양 발바닥-양 뒤꿈치-양 장딴지-양 허벅지-골반-꼬리뼈-척추 24마디--주걱뼈 관절-양 어깨-팔꿈치-손목-손등 손가락-엄지손가락이다.

신구의 삼업의 순서는 몸--마음으로 다시 마음--몸의 순서로 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몸에서 시작하여 몸에서 끝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마음--몸으로 다시 몸--마음의 순서다. 여기서는 모든 행위는 마음의 움직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에서 끝나는 것이다.

접촉의 중요성
자비손은 자비심이 생기게 하는 매개체이다. 자비손과 몸이 접촉하게 되면 몸에서는 갖가지 반응과 심리현상이 일어난다. 동시적으로 또는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몸의 현상과 심리현상을 정념으로 관찰함으로써 마음은 자비심으로 안정을 얻고 지혜가 계발된다. 이 과정에서 육체적 심리적 장애도 치유된다. 치유 효과의 핵심은 자비심이다.

자비수관 수행의 시작은 자비손으로 몸에 접촉하는 데에 있다. 접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할까? 숨 쉬는 생명은 공기 등의 접촉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접촉은 감각을 일으키고 감각은 사랑과 집착을 낳고 집착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정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자기 복제를 한다.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자손을 둘 수 있다. 부모에게서 자식이 태어나고 ()’이 유지되어 나간다. 이때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물질이 유전정보를 가진 ‘DNA’. 또 생명은 개체를 유지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음식물을 섭취하여 당을 얻는다. 또 단백질을 소화해서 아미노산을 얻고 당을 태워서 얻은 에너지를 사용하며, 아미노산을 필요한 단백질로 스스로 바꾸어 만든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몸은 매일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기능을 생물학에서는 물질대사또는 대사라고 부른다. 대사에 필요한 것은 화학반응을 촉진시키는 장치로 작용하는 단백질이며, 이러한 작용들은 생물학적인 생명이다.

정신적인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감정을 일으키고, 의지 작용을 가지고 행위를 하는 것이다. 생각과 감각을 일으키는 생리학적인 과정에서 다른 모든 기관들은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생각·감각·감정 등은 모두 마음이고 마음의 속성은 대상을 아는 앎이다. 이 앎에 의해서 인간은 사회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생각과 감각 등 정신적인 것과 대응 관계를 맺는 물리적 조직체와의 결합이다. 그리하여 다른 대상과의 접촉에 의해 관계를 맺고 반응하는 것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생명은 몸과 마음의 긴밀한 결합으로 색((((()의 결합체인 오온(五蘊)을 말한다. 오온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생각을 하는 마음이 있는 생명체 모두에게 해당한다. 첫째 감정이 있으며, 둘째 생각할 줄 알고, 셋째 기억을 하며, 넷째 고통을 느낀다.

이 네 가지는 사람과 동물의 같은 점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다. 이 모든 정신과 물질의 결합체들의 생명활동은 접촉이 없으면 죽는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만 먹인다면 어떻게 될까? 아기는 접촉이 없으면 죽는다. 그래서 어머니가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행위가 매우 중요하다. 어머니가 아기를 안아주는 접촉에 의해서 감각이 일어나고, 그 감각 정보가 중추신경으로 또 말초신경으로 간다. 몸의 모든 세포를 활성화시키고 특히 뇌신경 조직도 형성시킨다. 한마디로 생명활동은 접촉이다. 접촉이 있어야 감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을 아기라고 생각하고 자비손을 어머니 손으로 시각화하여 머리부터 쓰다듬어주는 것은 바로 생명의 활동이 된다.

아기가 태어나고 몇 달간은 감각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발달할 수 있도록 부모가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는 등의 접촉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 시기에는 부모와의 접촉이 뇌세포를 긴밀하게 만들어 뇌를 효과적으로 발달시킨다. 특히 신체놀이와 운동 등을 통하여 아기의 뇌를 자극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생후 3년간은 온몸의 감각기관을 일깨우고, 감정기능과 언어중추를 자극해야 하는 시기이다. 이때는 사회성의 기초가 되는 감각, 감정, 언어 등의 뇌가 발달한다. 충분한 접촉을 통해 뇌를 자극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지각의 활성화가 아기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른들도 시력, 청력, 후각이 약해지면 치매가 올 수 있다. 외부의 접촉 자극이 약해지면 뇌신경 세포의 생성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접촉하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생명의 현상이다.

지혜로 관찰하는 삼법인
뇌는 우리 몸의 제약 공장이라 한다. 신체에 아픔이 생기면 뇌에서 치유 호르몬을 분비하여 아픈 부위를 치유한다. 일상생활 중에 질병 또는 사고로 다쳐서 몸이 망가져 있을 때에는 몸의 기혈이 많이 막히게 된다. 이럴 때 자비심을 담은 자비손으로 신체의 망가진(아픈) 부분을 쓰다듬어주면 효과적이다. 실제로 손을 움직일 때나 움직이는 상상을 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는 동일하다. 접촉(자비손도 동일)을 통한 감각정보가 뇌의 인체 부분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고, 그 정보를 통해 뇌와 신체부위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신체 회복 시스템이 자연적으로 가동된다.

자비손 접촉을 몸의 건강 측면에서 보면 뇌의 신경세포를 형성하고 활성화하여 치매를 예방하고, 우리 몸을 건강하게 만들며 젊음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자비손 접촉을 마음의 측면에서 보면 몸과 마음이 별개가 아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뇌의 자비와 관련된 부위가 자극을 받아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에 따라 우리 마음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줄어들고 긍정적인 감정이 증가한다.

또한 접촉은 생존을 의미한다. 생존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괴로움을 낳는다. 집착과 괴로움이 인간계와 생명계의 생사가 유전하도록 만든다. 나도 모르게 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생사유전 현상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무지를 깨트리는 반조가 필요하다. 즉 접촉은 반응[]을 낳고, 이 반응은 또 다른 접촉을 낳으면서 끊임없이 고통이 이어지는 모습이 우리 사는 생존의 모습이다.

접촉을 인(원인)과 연(조건)으로 알아차리고, 삼법인의 지혜로 관찰하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점차 사라지면서 생사유전의 흐름이 멈추게 된다. 생존으로서의 접촉이 애착에 근거한 무명촉(無明觸)이라면 지혜로서의 접촉은 고통의 근원인 애착에서 벗어난 명촉(明觸, 연기실상에 밝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로서의 접촉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가고 옴이 자유로운 생존[보살의 삶]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자비손의 접촉은 생명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도 중요하지만 지혜를 일으켜 괴로움의 생사유전을 끊어주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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