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전 상서] 12. 발신자 미상의 편지
[초의 전 상서] 12. 발신자 미상의 편지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8.06.2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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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儒 교류 보여준 발신 미상 서간들
초의 스님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작자 미상도 있다. 산인(山人)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
초의 스님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작자 미상도 있다. 산인(山人)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생략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이런 편지들도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기에 발신자가 생략된 2통의 편지를 소개한다.

먼저 소개하려는 편지에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편지의 내용에서는 발신자가 처한 정황이나 글씨체를 통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를 추정할 정보가 숨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간명한 정보는 편지의 말미에 수록한 내용으로 보낸 이를 추정할 수 있다.

편지 내용서 친밀한 교분 확인
山人 칭한 편지, 글 수준 높아
학문적 식견 높은 유학자 추정
옹방강 영정 대여 요구한 편지
대흥사에 관련 도서 소장 확인


이 편지에도 산인추서(山人追書: 산에 사는 사람이 이어 쓴다)라 쓴 것이 편지의 아래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초의는 산인(山人)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았을 터이지만 지금 이 편지를 보고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간파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간극은 멀어 보이지만 이런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이 연구의 묘미이다.

아무튼 발신자의 편지에는 이들이 나눈 소중한 마음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편지를 보낸 이가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2)을 통해 초의의 안부를 전했던 인물이었고 승려들과도 교유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산인(山人)이란 무슨 의미이며 이렇게 자신을 표현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대개 산인(山人)은 산림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을 칭하거나 승려라는 의미로도 쓴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승려는 아닌 듯하다. 따라서 초의뿐 아니라 허련과도 깊이 교유했던 인물이면서 산인이라 별칭했던 인물로는 추사나 추사와 관련이 깊었던 인물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먼저 소개할 편지의 크기는 22.9×22.3cm이며 10월 4일에 보낸 편지이다. 행서체로 활달하게 쓴 서체라는 점이다. 아마 이 편지를 쓴 인물은 유학자로 학문적인 식견이 높았을 것이니 이는 서체나 글 쓰는 수준에서 이미 문향(文香)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치(허련)군이 오월에 보낸 편지로 인해 노사의 편안한 근황을 알게 되어 매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요즘엔 봄 날씨가 마땅하지 않은데 스님은 또 어떠하신지요. 멀리에서 자주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얼마나 서글픕니까. 나의 병든 마음은 차(泉性)로 인해 자못 상쾌해져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안개와 연무, 돌 위로 흐르는 샘, 소나무, 대, 국화는 병을 치료하고 배고픔을 달래주지 않음이 없으니 겨우 세상을 뛰어 넘을 생각이 일어나며 또한 만족하고 기쁠 뿐이니 노사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요. 다만 이웃 절에 스님이 머물 방을 얻을 수 있어서 또한 기쁠 따름입니다. 다시 어떻게 올 수 있습니까. 약간의 승려 중에 상종하는 이들은 그 말의 고아하고, 고상하지 않음과 아취가 있고 아취가 없음은 또한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상함도 좋고, 고상하지 않음도 좋으며, 아취도 아름답고 아취가 없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들으니 자연의 소리가 아닌 것이 없어서 부처의 향기 또한 기쁩니다. 이런 기쁨을 또한 노사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요. 소치군에게 세상의 고통으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 있다고 하니 가련합니다. 스스로 만든 고통일 뿐이니 누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노사는 어찌 해탈묘법으로서 깨우쳐주지 않으십니까. 자신은 금침(金針)이 있고 감로 같은 차를 가졌지만 결국은 아까워서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편지는 봄 사이에 해(海)스님이 말하지 않고 떠나서 오히려 문서만 남아 있었고 피봉은 또 아이들이 찢어버렸습니다. 이 편지를 함께 보내지만 어느 때 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원각경〉 일부는 반드시 보내주시면 어떨지요. 10월 4일 산인이 추서하다.

卽因癡君五月之書 以認老師安? 甚慰甚慰 近來春候 頗非所宜 甁鉢亦復何如耶 遠未可頻聞 何等?耿 俗人病情 因泉性頗? 得以少安 煙霞泉石 松竹楓菊 無非治病療飢 ?有出世想 亦足喜耳 老師知之否耶 但隣寺若得師置之斯間 又可喜已 復何能致也 頗有若干緇徒相從 其語言之雅不雅 趣不趣 亦不必多較 雅亦好 不雅亦好 趣亦佳 不趣亦佳 在我聞之 無非天? 佛香且喜 喜亦老師知之否耶 癡君以世?之苦 有不堪者云 可悶 特渠自苦矣 誰能解也 老師何不以解脫妙法喩之 自有金針 自有甘露 而竟?而不爲之施歟 此書 春間海?梨不告而去 尙留案牘 而皮封亦爲?輩所剝去 幷玆去 而亦未知何時登照也 圓覺一部 必須得惠之 如何
十月 四日  山人 追書

어느 해 10월 4일 초의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소치(小癡)의 어려운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바로 “소치(허련)군에게 세상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 있다고 하니 가련합니다. 스스로 만든 고통일 뿐이니 누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내용이다. 그리고 소치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을 “노사는 어찌 해탈묘법으로서 깨우쳐주지 않으십니까. 자신(초의)은 금침(金針)이 있고 감로 같은 차를 가졌지만 결국은 아까워서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실제 소치에게 어려웠던 일이란 무엇일까. 그 대강을 추적해 보면 1850년 12월 3일 허련의 아우 허종(許)이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늙으신 어버이의 병까지 더해져 조카의 통곡을 눌러 막아도 그치질 않습니다. 또 사또의 도에서 보낸 관지(關旨)까지 도착하여 동생 형제가 한바탕 옥에 갇혔으니 무슨 운수가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요”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1850년경 소치는 한양생활을 접고 진도로 낙향하였다. 이 무렵 소치는 어버이의 병환과 동생들이 옥에 갇혔던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더구나 다음 해인 1851년경엔 추사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으니 소치에게 닥친 어려움이 더욱 가중된 시점이라 하겠다.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 인물은 “이 편지는 봄 사이에 해(海)스님이 말하지 않고 떠나서 오히려 문서만 남아 있었고 피봉은 또 아이들이 찢어버렸습니다. 이 편지를 함께 보내지만 어느 때 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 구절이 눈에 띈다. 따라서 이 편지를 쓴 시점을 밝힐 수 있는 근거는 소치의 생애를 소급해 보는 일일 터이니 이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편지는 대략 1850년경에 쓴 편지라 추측할 뿐이다.

속인(俗人)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보낸 발신자 미상의 편지.
속인(俗人)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보낸 발신자 미상의 편지.

한편 발신자가 불교를 깊이 이해했던 인물이었음은 “〈원각경〉 일부는 반드시 보내주시면 어떨지요”라고 말했다는 사실에 나타난다. 불교를 깊은 천착한 인물은 제주 시절 추사였다. 따라서 이 편지를 추사나 그 주변 인물로 상정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또 소개할 편지도 발신자 미상이다. 초의에게 보낸 이 편지는 1851년 8월에 보낸 것인데 담계 옹방강(覃溪翁方綱 1733~1818)의 영정(影幀)과 소집(小集)을 빌려달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편지를 살펴보면 크기는 22.2×42.0cm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잠시 이별했는데, 갑자기 가을이 깊어져 그리움이 더욱 간절합니다. 사신을 그만두었으니 다시 제수되기는 어렵습니다. 소치를 빙자하여 한번 가려고 했지만 작은 일에 매여서 오히려 미루어졌습니다. 근래에 또 집에 여러 가지 근심이 있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문안의 편지도 늦어진 것은 또한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스님은 요즘 더욱 길하고 좋으시겠지요. 그리움이 더욱 배가 됩니다. 또 순부(巡部:감사가 관할내의 고을을 순회하는 일)가 본사(대둔사)에 머문다고 들었습니다. 그 대접하는 바가 장애가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속인의 폐국은 잡다하여 무시로 풀어야하니 정말 민망합니다. 현재의 상황으론 또 갚을 수도 없습니다. 고시(古詩) 삼수(三首)는 일찍이 지었던 것인데 지금에야 겨우 기록해 보내니 보시고 또 교정을 부탁합니다. 본사에 담계 영정(覃溪影幀)과 소집(小集)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지와 상의하여 한번 빌려 볼 수 있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죽피를 보내니 만들 수 있으면 만드시고 어려우면 버려두셔도 무방합니다. 향유 2승, 감곽 두 속을 부칩니다. 나머지는 소치 편에 남겨두겠습니다. 이만.
1851년 8월 22일 속인 늑명
서화 중에 만일 빌려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조심하여 보고, 곧 술 단지를 보내겠습니다.

暫奉旋別 遽爾秋深 懷想益切 使又難拜 憑小痴間欲一造 而緣於細務 尙爾延拖 近又在家多累 未果此一書之稽探 亦由是矣 ?錫近益吉祥 溯念尤倍 且聞巡部嘗宿本寺云 其所接應 想多?碍也 亦爲一念 俗人弊局?擾無時解胱 良悶良悶 現狀亦無可報也已 三首古詩 曾已?置 今才錄去 覽亦?正也 本寺聞有覃溪影本與小集云 與住持相議 借一覽之 則甚幸甚幸 竹皮亦送去 可造則造之 難則置之 亦無妨耳 香油貳升 甘藿貳束 付去耳 餘留痴便 不式
八月 卄二日 俗人 名
書畵中 如有可借示者 當精覽卽也

발신자는 초의에게 “고시(古詩) 삼수(三首)는 일찍이 지었던 것인데 지금에야 겨우 기록해 보내니 보시고 또 교정을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옹방강을 흠모했기에 영정과 문집을 빌려 보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청대에 고증학과 금석학에 밝았던 옹방강으로 추사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던 조선 후기의 인물이라면 누구나 담계를 흠모했던 당시의 시대 흐름을 드러낸 편지인 셈이다. 아울러 발신자는 대흥사에 순부의 관리들이 머물게 되어 절의 부담을 걱정했으니 초의에 대한 교유의 정이 깊었던 유학자이며 소치와도 관련이 있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유불의 단단한 교유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 대흥사는 옹방강과 관련된 도서들이 소장되고 있다는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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