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

주제 : 나무가 안내하는 마음공부법

“나무, 관세음보살”을 외는 한 인문학자가 있다. 그는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처럼 나무에 귀의하길 제안한다.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이각범)은 6월 19일 서울 마포 다보빌딩 3층 다보원에서 책 <나무예찬>의 저자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를 초청해 화요열린강좌를 개최했다. 강판권 교수는 ‘나무처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주제로 강의했다. 강 교수는 “나무는 누구든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는 존재”라며 “나무 관찰을 통해 자기 자신과 삶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판권 교수는… 계명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 청대사를 전공, 계명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역사학자이자 인문학자로서 나무를 16년간 연구했으며, 25권의 관련 저서를 썼다. 주요 저서로는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 '나무예찬' 등이 있다.

나무 관찰 통해 자기수용해야
잠재성 드러내는 ‘自尊’의 삶
역할·가치의 차이 구분으로
관계의 평등성 회복해야 한다

저는 오늘 인문학자로서 나무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 방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나무는 여러분들이 다 아는 존재이지만, 정작 나무를 만나는 방법을 잘 모르거나 오해해서 나무와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는 사례가 굉장히 많습니다. 나무 만나는 법을 제대로 알면,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훨씬 더 우리가 쉽게 극락에서 사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나무에 귀의하는 염불
제가 좋아하는 염불이 ‘나무, 관세음보살’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아재개그같은 말이지만, 그걸 좀 더 뜯어보면 나름의 철학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전각을 ‘원통전’이라고 부릅니다.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데, 원은 둥글 원, 통은 통할 통을 씁니다. 나무도 둥급니다. 둥근 모양의 나무가 이 세상 소리를 다 듣고, 또 사람들이 그 나무를 만나서 나무에게 많은 지혜를 배우는 것처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는 것처럼 우리가 나무에게도 귀의한다면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제가 나무를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상에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나서 거기서 혁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무와 진정으로 만나는 것을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일상에서, 삶속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겁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아도, 나무 만나는 법만 제대로 안다면 가장 가까이, 쉽게, 저렴하게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나무를 이야기해야만 우리의 존재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큰 주제는 ‘자존(自尊)’입니다. 자존을 핵심으로 해서 관련한 이야기를 몇 가지 말씀드리고, 자존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써 나무를 이야기하고, 나무를 보는 법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자존을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가 결국 삶의 가치와 의미를 갈라놓는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존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목적이고, 그 방법 중 하나로 나무를 이야기하려 하는 것입니다.
 

나무를 통해 자기수용하기
나무를 만나는 법 첫 번째는 ‘관찰’입니다. 자존은 하늘이 부여한 그 자체이고, 정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은 애초부터 청렴한 존재입니다. 하늘에게 받은 착한 본성을, 자존을 드러내는 작업을 우리가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이걸 다른 말로 ‘창의성’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제가 나무를 통해서 드러낸 삶이고, 그 덕분에 여러분과 만나고 있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서 제가 좋아하는 불교의 구절이 있습니다. <숫타니파타>라는 초기 경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많은 분들이 살면서 조그만 일에 많이 놀랍니다. 강아지가 작은 소리에도 짖는 것에 반해 사자는 어지간한 소리에 놀라지 않습니다. 또 대부분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 걸려 넘어지지만, 바람의 경우에는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무한한 잠재능력이 여러분 몸속에도 있고 사실 그 연씨 같은 종자가 빛과 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의 문제입니다. 

자존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세 가지입니다. 자존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은 탓을 합니다. 핑계를 대죠. 두 번째 특징은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죠. 세 번째는 수용성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나무를 하면서 자존을 확인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과정인데, 개인적으로 수용을 못했던 것이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나무 하기 전에 이마가 돌출된 것이 콤플렉스였습니다. 하지만 이 콤플렉스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돌출한 이마를 깎아낼 수 없잖아요.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수용하는 겁니다. 그걸 인정해야한다는 겁니다. 그걸 부정해버리니 남 탓, 부모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의 탓을 하면 어마어마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그 비극은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막혀버린다는 겁니다. 

자존에서는 ‘자기수용’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합니다. 나무를 하기 전까지 전 키가 작은 줄 알았습니다. 제 키를 수용하면 키가 작지 않습니다. 크지도 않습니다. 제 키는 ‘제 키’이지, ‘작은 키’도 ‘큰 키’도 아닙니다. 오로지 ‘제 키’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무려 4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인정하고 수용하는 그 찰나에 잠재능력을 드러낼 기회가 옵니다. 
 

나무를 본다는 것의 의미
관세음보살 할 때 ‘관’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상’자도 중요합니다. 관이라고 하는 것은 자세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관찰은 대충 보는 게 아닙니다. 상이라고 하는 글자는 간단한 글자지만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이란 글자를 보면 눈 목 자하고 나무 목이 있죠. 눈으로 나무를 보는 것이 서로라는 뜻이 됩니다. 서로 '상' 자입니다. 이 관계성이 생태입니다. 마주하는 평등의 관계성이 바로 생태 그 자체입니다. 눈으로 나무를 보는 것. 마주 보는 것, 그것이 서로가 됩니다. 관상의 상 자는 얼굴이란 뜻입니다.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은 눈으로 나무를 보는 것과 같이 합니다. 얼굴은 결국 얼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무를 보는 그 찰나가 결국은 내 얼굴을 만나는 다른 과정이죠.

그런데 관상을 보니까 놀라운 반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했던, 수용하지 못했던 바로 그 이마가 절 있게 했다는 겁니다. 저를 여기 있게 한 원동력이 다 이마에 있다는 겁니다. 어록에다 그래서 이렇게 썼습니다. 본인이 가장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장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거야말로 장점입니다. 사실은 그게 장점인데도 쳐내고 맙니다. 그걸 딱 인정하면 콤플렉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관심을 내가 다른 데 두면서 그것이 내 마음 속에서 떠나있는 겁니다. 의미를 계속 두지 않는 찰나에 다른 데 관심을 옮기는 순간 이것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어디에 초점을 두고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가치의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데 가치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치의 전환은 곧 세계관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생태맹’ 극복, 그리고 ‘평등’
생태는 영어로 ‘Ecology’입니다. 이 에코에 대해 많은 분들이 오해합니다. 에코는 관계성입니다. 평등의 관계성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에코는 자연생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에코는 자연상태가 아니라 관계성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갑을 관계에 대한 문제, 갑질의 문제는 생태의 문제입니다. 한 존재를 평등한 관계에서 바라보는 생태의식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생명체 간의 관계는 역할의 차이인거지, 가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역할의 차이를 가치의 차이로 치환해버리는 겁니다. 대통령이나 나나 역할만 다른 것이지 가치의 차이는 없습니다. 역할이 다른 거지 다 똑같은 거잖아요. 그 생태의식의 부재를 ‘생태맹(生態盲)’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려면 이 생태맹이 사라져야 합니다. 문맹, 컴맹이 있었지만 지금 이 시대의 화두는 바로 이 생태맹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관계성을 우리가 회복해야하고 평등한 관계를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데 말이죠. 

앞서 말씀드렸듯이 생태의 관계성을 가지고 저마다 품고 있는 수많은 종자가 있다면 이를 어떻게 드러낼까에 대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이때 ‘관찰’이 나옵니다. 은행나무 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열매는 많이 봤는데 암꽃, 수꽃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나무를 바라보십시오. 나무를 관찰해보세요. 나무는 수직으로 자라는데 옆으로 나이를 먹습니다. 이를 두고 종횡무진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적으로 살기 때문에 남들과 나를 비교하게 됩니다. 진정한 삶은 나무처럼 수직과 수평의 삶을 동시에 사는 종횡무진 사는 삶입니다.

나무는 하늘을 닮아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해버립니다.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뿌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나무를 안다는 것은 천지를 아는 것입니다. 요새 사람들 좀 보세요. 대중교통 타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마트폰만 전부 봅니다. <역경>에 유명한 구절 ‘자강불식(自强不息)’은 스스로 힘쓰면서 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않지만 한 찰나도 흐트러짐 없이 이 움직임 때문에 여기에 존재합니다. 나무가 한 순간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만들고, 반복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나무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평등’입니다. 재벌이라도, 정말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도 내가 보고 싶은 나무를 만나러 간다면 똑같이 가야됩니다. 비행기를 타고 와도 나무 앞까지는 직접 가야합니다. 그리고 나무는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이 대해주죠. 돈 많다고 더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존재인 나무, 그것이 제가 나무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