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갈등, 화쟁으로 해소하자

2014년 6월 진행된 화쟁코리아 순례회향 모습. 사회 곳곳의 갈등 현장서 상호 이해를 위해 노력했다.

 

사찰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지내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니 갈등도 다양하게 발생한다. 사회의 여러 갈등이 그러하듯이 사찰의 갈등도 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누구에 대해 험담을 했거나, 누구를 흉보았거나, 무언가에 대해 거짓말을 했거나 하는 구업(口業)은 잘잘못이 분명하다. 이런 경우는 책임소재의 판단도 비교적 용이하고, 상대적으로 갈등해결의 시간도 짧다. 그러나 이익과 손해가 발생하거나, 쌍방의 의견이 각각 부분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갈등은 상대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기가 어렵고 해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잘못된 이해서 갈등 발생
갈등해소 첩경은 이해·수용
이에 바탕해 비판대응이 ‘화쟁’

불교에는 유명한 갈등해소 방법이 있다. 화쟁(和諍)이다. 그런데 혹자는 화쟁을 사회의 모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만능으로 알고 있지만 불교의 방법이라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쟁을 전제로 한 불교계 단체와 기구들이 있지만 사회와 종단의 갈등 해결에 있어서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뭇사람들의 화쟁 만능 인식은 화쟁이라는 용어의 해석 오류 내지 화쟁이 주는 단순한 어감에 기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즉 화(和)와 쟁(諍)을 조합하여 “화쟁이 ‘분쟁’의 ‘화합’에 유효하다.”고 막연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쟁의 쟁(爭)과 화쟁의 쟁(諍)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한다. 전자의 쟁(爭)은 ‘다툴 쟁’으로 행위로 다툼을 의미하고, 후자의 쟁(諍)은 ‘간할 쟁’으로 말이나 글로 다툼을 의미한다. 쟁(爭)에는 투쟁(鬪爭)이 해당하고, 쟁(諍)에는 논쟁(論諍)이 해당한다.

본래 화쟁은 말로 인한 갈등, 즉 쟁론(諍論)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화쟁은 원효(元曉, 617-686)에 의하여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주창되었다. 〈십문화쟁론〉은 불교의 모든 이론을 모아서 열 가지(십문, 十門)로 분류하여 난구(難句), 이설(異說)에 대한 쟁론을 일심(一心)의 지향으로 조화·통일시킨 저술이다. 원효는 화쟁을 사회에서 발생하는 제반 분쟁(分爭)이 아니라 불교계 내에서 생기는 불교교리에 대한 여러 쟁론(諍論)을 총화(總和)하고자 사용한 것이다.

투쟁이 대부분 논쟁으로부터 야기됨을 통하여 쟁(爭)은 대부분 쟁(諍)으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쟁론의 해소 방법인 화쟁은 말로 하는 쟁(諍)은 물론이고 행위로 하는 쟁(爭)의 해소에 있어서도 기본이 될 수 있다.

쟁론이든 투쟁이든 다툼 즉 갈등은 어떻게 비롯되는 것일까? 전술하였듯이 그것은 말에서 비롯된다. 갈등의 발생과 해소, 모두 대부분 말에 기인한다. 갈등은 말에 의하여 야기되지만 그 해소 역시 말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알기 위해서는 말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말이 본래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말로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사람들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뒤늦게 이렇게 말할 걸 저렇게 말할 걸 하고 아쉬워하고 후회를 한다. 원효는 그 원인을 명(名)과 의(義)의 불일치에서 찾았다. 이름(名)과 뜻(義)의 불일치를 쟁론적 갈등의 원인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름은 가리키는 것이고 뜻은 가리킴을 받는 대상이다. 그런데 이름과 뜻, 즉 가리키는 것과 가리킴을 받는 대상은 고정불변의 관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름과 뜻의 관계는 말이 매개가 되어서 맺어지는데, 모든 말에는 불변의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나비와 나방을 구별하지 않는다. 나비와 나방이라는 각각의 대상(뜻)은 있지만 각각을 지칭하는 이름은 별도로 없기에 나방도 나비도 모두 ‘빠삐용(papillon)’으로 부른다. 이와 같이 말은 대상과 이름을 불일치하게 전달한다. 말은 부정확한 것이다.

원효는 이것을 일컬어 “일체 언설은 가명(假名)이어서 실체가 없다.”(諸言說唯是假名 故於實性不得不絶), “능연(能緣, 생각하는 마음 작용)이니 소연(所然, 마음 작용에 의해 포착된 대상)이니 하는 것이 다 본래 이름뿐이요, 자성(自性)이 없다.”(能緣所緣 俱是本來但名無自)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화쟁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전제가 되는 말의 속성을 살펴보았다면, 이제부터는 화쟁의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그 첫 번째 방법은 언표(言表)의 본질 이해다. 이는 전술한 말의 부정확성과 맥을 같이 한다. 화쟁은 말로 나타나는 쟁론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쟁론은 일차적으로는 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화쟁을 위해서는 말로 나타낸 바인 언표(言表)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말이 의사소통을 완전히 해주는 도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 자체에 집착하고는 한다. 이 때문에 말꼬리만 잡다가 정작 본질을 놓치기가 일쑤다. 말이 내포한 뜻을 살려서 이해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서로가 그 속성이 부정확한 말에 집착하여 말꼬리를 잡는다면 상대방의 견해를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 초래되지만, 말을 새겨듣고 뜻을 살려서 이해한다면 상대방의 견해를 수용하기 쉬운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원효는 “말과 같이 취하면 모두 다 허용되지 않고, 뜻을 얻어 말하면 용납하지 못할 것이 없다.”(如言而取 所說皆非 得意而談 所說皆是.)고 했다. 서로가 언어의 본질이나 한계를 모르고 사용한 말을 맹신함으로써 일어나는 공허한 논쟁을 경계해야 상대방의 본래 의도를 이해하고 수용하여 화쟁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화쟁의 두 번째 방법은 말하는 사람[話者]의 정확한 표현과 듣는 사람[聽者]의 올바른 이해다. 견해를 말하는 사람은 말로 나타내고자 하는 바[言表]의 본질이 정확히 전달될 수 있도록 말을 하여야 하며, 견해를 듣는 사람은 말 자체의 부정확성을 인지하여 상대방이 말한 언표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시종일관 정확하게 인지하고 상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확한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여 말하고는 한다. 또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화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이 아니라 말 자체에 집착하여 말꼬리를 잡고는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쟁을 이루기 위해선, 화자의 입장에서는 각각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밝힘에 있어서 말로 나타내고자 하는 바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하고, 청자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말 자체에 집착하지 말고 말이 내포한 뜻을 살려서 올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화쟁의 세 번째 방법은 아집(我執)의 타파와 부분적 타당성의 수용이다. 사람들이 쟁론에 빠지는 것은 아(我)와 아소(我所)에 집착하는 아집(我執) 때문에 야기된다. 이를 좀 더 해석하면, 아는 자아를 뜻하며 아소는 자기 소유를 뜻한다. 사람들은 각각의 자아와 자기 소유를 위하여 아집이 생겨나 작용하여 남을 욕하고 비방하는 쟁론을 하는 것이다.

쟁론은 자기의 주장만을 옳다하고 상대의 주장은 그르다고 하는 아집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아집에 의한 쟁론은 자기의 존엄성은 존중하고 상대방의 존엄성은 무시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갈등을 유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아집을 벗어나 상대의 주장과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 화쟁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옳고 상대방을 그르다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주장은 그러하나 상대방의 주장은 그러하지 못하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말이 한도 끝도 없게 된다. 상대를 부정하고 나만을 긍정하는 주장은 끝없는 쟁론만 이어갈 뿐 화합의 결론을 맺을 수는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상대방의 주장이 갖는 부분적 타당성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상호배타적 자기주장은 부분적 타당성을 붙들고 그 완전성만을 주장하는데서 비롯된다. 부분적 타당성에 안주하여 그것으로써 완결시키려는 태도는 다른 부분적 타당성을 놓치게 하거나 배척하게 만들어 상호간의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상호갈등에서 나타나는 견해의 배타적 주장은 흔히 무조건적·절대적·전면적 진술로써 독단적이고 독선이고 무지로써 일종의 언어폭력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혹 놓쳐버린 상대방의 조건들을 포착하고 수용하여 자기보완과 수정을 하여야 한다.

편협한 생각에 얽매여 일방적으로 한 면에 집착하거나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시하여 집착하는 사람들은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격이다. 이를 원효는 다음과 같이 빗대어 비판한다.

자기가 조금 들은 바 좁은 견해만을 내세워, 그 견해에 동조하면 좋다고 하고, 그 견해에 반대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 적은 것을 믿어 많은 것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彼自少聞 專其狹見 同其見者 乃爲是得 異其見者 咸謂脫失.

猶如有人 葦管窺天 謂諸不窺其管內者 皆是不見蒼天者矣 是謂恃小誹多遇也.

서로가 무조건 ‘당신의 주장이 잘못이야!’라고 비난하고, 그에 대해 역시 무조건 ‘아니, 나의 주장이 옳아!’라고 반박하는 것은 쟁론이다. 반면 ‘잘못이야라는 판단을 성립케 한 조건’을 밝히면서 비판하고, ‘잘못이야’라는 그 비판이 유효할 수 있는 조건을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그 비판에 대응하는 것은 화쟁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