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마음을 남과 내가 더불어 같이 이익 되게 생각하세요

 

죽는 공부가 과연 무엇일까

질문 지난 주 참석했던 법형제회 법회에서 한 거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큰스님 법문집인 『허공을 걷는 길』을 13번이나 읽었는데도 마음 한구석에 해결되지 않고 정체된 것이 있어 그것이 무엇인가 숙고하다가 2년 동안 선원에 나오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진짜 죽는 공부를 하지 않고 머리로 입으로 읽고 알아서 무언가 되려고 하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새롭게 초심자의 마음으로 선원에 다닌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문득 ‘자기를 어떻게 죽여야 하나? 죽는 공부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진짜 죽는 공부가 무엇인지,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한 걸음 떼어 놓을 수 있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이 껍데기를 벗기 전에 자생중생들을 화(化)하게 해서
즉 말하자면 보현(普賢)으로 해서 응신(應身)이 돼서
뭇 중생들의 마음을 통해서 응해 주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답변 이 우주 전체는 인간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 살아나가는 건 이 마음 근본에 가설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이 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대로 우리가 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 그것이 바로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이 세상은 상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금 생활하는 것이, 즉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 내는 거,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 이 삼합이 한데 돌아가는 이 자체가 그대로, 즉 아까 한 일이 지금 없기 때문에 그렇게 죽이는 것입니다. 한군데다가, 주인공, 한마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맡기고 살면 그게 죽이는 거라고요.

자기 마음이, 즉 말하자면 마음을 내기 이전은 기름과 같고 마음을 내는 것은 차를 끌고 다니는 법이 되고, 그러니깐 몸이 움죽거리는 건 차와 같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삼합이 한데 합쳐서 이렇게 지금 돌아가고 있는 이 자체가 그대로…. 우리는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또는 먹는 거, 가고 오는 거, 만나는 거 하나도 고정된 게 없기 때문에 그걸 공했다고 하고 그거를 놓고 가는 거라고 하고 그거를 죽이는 거라고 한다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가정에서 잠깐 사이에 아내가 와서 “여보!” 그런다면 바로 자연스럽게 남편이 되고 또는 “아빠!” 하고 부르면 자연스럽게 아버지 노릇을 합니다. 그런 많은 이름들을 자연스럽게 자기가 해내고 돌아가는 것이 바로, 아버지 됐을 때, 남편 됐을 때 찰나찰나 이렇게 돼 돌아가는 것을, 착을 두지 않고 지금 그대로 돌아가는 것을, 그 도리를 알면 바로 죽이는 거다 이겁니다, 놓고 돌아가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불바퀴는 항상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그냥 불바퀴가 같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으로 항상, 지금 습관에 의해서, 물질적인 습관에 의해서 항상 거기에 이게 옳으니 이게 그르니 이러기 때문에 걸려서 고통을 받습니다.

사람은 항상 마음에 의해서 모든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데, 내 과거에 살던 그 자체가, 인연으로 인해서 인과가 돼서 현실에 내 몸뚱이 속에 모두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에 그 몸뚱이 속에, 즉 말하자면 생명이 간단히만 추려도 13억이 됩니다. 그 의식이 한마음에서 수만 개도 나올 수 있으니까 그건 숫자적으로 헤아릴 수가 없는 거고, 이 몸속에 있는 그 의식들이, 많은 의식들이 내 한마음에서 좋게 생각하면 좋게 따라 주고 언짢게 생각하면 언짢게 따라 주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남과 내가 더불어 같이 이익 되게 생각을 한다면, 좋게 생각을 하고 자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도 모든 거를 용도에 따라서 아주 이익하게만 생각한다면 몸속에 있는 그 의식들이 다 그 이익한 대로 따라 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국말로 이 불가에서 말하는 건 숙명통이라고 그러는데 여기서 비유해서 말할 때는 컴퓨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 거기 입력이 됐던 것이 현실에 나오는데, 현실에 용도에 따라서 내 앞에 닥친 병고라든가 가난이라든가 또는 우환이라든가 어떤 안 되는 일이라든가, 모든 일체를 거기다가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과거에 입력됐던 모든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팔자나 운명 같은 것이 다 바꿔질 수도, 좋게 바꿔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모든 거를 자기 한마음 주인공에 맡기고 사는 것이 바로 죽이는 거며, 다시 되입력을 시키는 거며, 앞서 입력된 게 다 없어지는 거며, 동시에 이렇게 가기 때문에 벌써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정에 우환이 있던 게 없어지고 병고가 없어질 수도 있고 모든 가정이 화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세요. 자기가 없다면 상대가 없으니까. 자기 탓으로 돌리고 모든 걸 거기 맡겨 놓는다면 바로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을 하는 거와 같아요. 그래서 앞서의 팔자나 운명에 입력이 된 거는 다 녹아져 버리니 삶의 보람과 자유인의 그 참, 광대무변한 인간 자체의 삶을 맛볼 수 있다 이겁니다.

참다운 불공이 되려면

질문 불공(佛供)이라고 하면 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께서도 법당에서 매일 사시 불공을 모시고 있고 국가적인 염원을 담아서 전국의 사찰에서 수륙재도 많이들 모시는데 그것은 공불(供佛)이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신도들이 개별적으로 원하는 바가 있어서 공양물을 올리면 기복 불공이라고 치부하는데 그것은 모순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저희들이 올리는 부족하나마 작은 정성 하나하나도 기복이 되지 않고 참다운 불공이 되려면 어떤 마음으로 올려야 하는지요.

답변 여러분이 불공을 드린다 하고 절에 오고, 불법을 믿는다 이러면서 그냥 갖다 놓고 빌고, 그저 나 잘되게 해 달라고 비는 그런 것이 불교인 줄 알고 또 그러한 것이 진짜 불공을 드리는 건 줄 아는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개선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불’이라는 건 모든 일체 만물만생이 그 영원한 생명을 가졌을 때 비로소 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밝은 겁니다. 그것은 변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림살이할 때 찰나 생활로 들어갑니다. 우리 사는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일체 만생 만물이 다, 우주 전체가 지금 그렇게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그 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입니다.

그래서 불공을 잘한다 하는 건 내 마음을 잘 세운다 이겁니다. 세워서 자기의 주인공을 잡고 공부할 때는 모든 걸 거기에 맡겨 놓고 굴려서…. 예를 들어서 그냥 맡긴다면 그것이 공으로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아, 거기서밖에 해결 못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거기다 놓을 때에 바로 자기 불바퀴에 놔서 굴리니까, 즉 말하자면 용광로에 헌쇠나 나쁜 쇠나 쪼가리 쇠나, 뭐든 놔 버리니까, 거기 넣어 버리니까 새로이 새 쇠로서 생산이 돼서 또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진출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어서 탁 주인공에 맡겨서 놓을 때에 ‘아, 이거는 내 주인공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러면 벌써 여기는 불바퀴에 돌아가는 겁니다. 재생이 돼서 나가는 형국이죠. 그래서 내 인간의 힘이 아닌 그 불바퀴의 힘으로써 굴려져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서, 몸뚱이가 없으면, 남이 볼 때에 없으면 무효니까 상대를 해야 되겠죠.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뛰면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이 마음의 도리를, 50%를 지금 보이는 세상에 충당해야만이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을 그렇게 해서 놓는다면 어떠한 사람이고 “아이, 스님. 나는 항상 놓아 가는데도 안 됩니다.” 이런 소리를 할 일이 없죠. 그렇게 “안 됩니다”, “됩니다”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릇을 크게 만들었느냐, 또는 작은 것이 그대로 있어서 소견으로 사느냐, 또는 그냥 무조건 맡기고 한번 아주 가긍하고 정성스럽게, 한번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당신밖에는 할 수 없어.’ 하고 그 뜻을 가지고 말없이 지키면서 그렇게 믿어 봤느냐, 이런 것도 생각 안 해 볼 수가 없죠.

그래서 지난번에 설할 때도 그렇게 얘기했죠. 첫 번에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전자의, 내가 나기 이전의 그 습을 다 떼야만이 내가 발견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둘째는 벌써 그렇게 맡겨 놓으면 내 가정과 내가 마음이 편안하니까 놓는 거고, 셋째는 모든 걸 놨기 때문에 얻을 게 없이 항복을 받는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무조건 놔라” 이러는 겁니다.

세 번 죽어야 도를 이룬다 했는데

질문 『한마음요전』의 내용 중에 “세 번 죽어야 도를 이룬다. 첫 번째로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를 버려서 나를 얻는’ 소식이다. 두 번째로 또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와 더불어 일체를 버려서 일체를 얻는’ 소식이라, 이 소식은 너무 광대무변하기에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세 번째로 다시 또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와 더불어 일체를 버려서 일체로 나투는’ 소식이다. 역시 말로 할 수 없으니 옛날 선지식들이 다만 법상을 침으로써 소식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스님, 진정 말로는 할 수 없다는 세 번 죽는 도리를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첫째는 모든 것을 한데 뭉쳐서 맡기고 놓는 반면에 자기 영혼을, 자기 영혼의 부(父)를 얻는 것입니다. 자기는 지금은 자(子)고, 과거에 자기가 살던 그 모든 능력은 바로 자기의 부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은 ‘부’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를 발견하기 위해서 죽인다, 첫째.

두 번째, 이 세상의 모두가 수억겁 광년을 내려오면서 쫓고 쫓기면서 진화돼서, 즉 말하자면 뜬구름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짐과 같이, 또 모이고 또 흩어지고 하는 것과 같이 사람도 자식이 됐다 부모가 됐다 또는 형제가 됐다 자식이 됐다 부모가 됐다, 짐승으로부터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게 해서 자꾸자꾸, 네 부모 내 부모가 따로 없고 네 자식 내 자식이 따로 없이 수억겁을 거쳐 왔기 때문에, 지금도 잠깐 우리가 사는 거다 이겁니다.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또 죽어야 된다. 또 놓고 거기에 맡기고 가야 된다 이겁니다.

세 번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쉬는 게 없이 찰나에, 아까 아버지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이렇게 찰나에 돌아가듯이, 이 도리를 완전히 배워서는 이 몸속에 있는 의식들이 천백억화신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화해서.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모든 것을 둘이 아니게 무조건 응해 주고 건져 주고 사랑해 주고, 모든 게 이렇게 되기 때문에, 그걸 비유하자면 원자에서 입자가, 입자에서 분자가 화해서 화신으로서 이 몸 바깥이나 또는 지구의 바깥이나 대기해서 통신이나 결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그 단언, 또는 들이고 내는 작업, 이 세 가지를 하면서 모든 대기를 지킨다. 이 몸도 그렇고 지구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둘이 아닌 도리, 즉 말하자면 내가 저 사람을 하나 건지기 위해서 내가 저 사람에게 들어가서, 저 사람은 모르지만 내가 만약에 저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저 사람이 안 되는 일을 했다면 그건 둘이 아니에요.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들어가서 할 수 있는 까닭에 나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한 찰나에 들어갔다 한 찰나에 나오고 그러기 때문에, 또 한 찰나에 둘이 아닌 까닭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한 찰나에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게.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는 네가 됐다가 내가 되고 내가 됐다 네가 되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돌아가는 이 블랙홀 이 자체가, 천체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기 때문에 세 번 그렇게 뭉쳐 놔야만이, 거기 맡기고 나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다 놔야만이 세 번 죽는 거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만약에 완전히 안다면 살아서 안방에 앉아서 TV를 보고 세계를 보듯이, 안방에 앉아서 세계의 모든 정세를 듣듯이, 그냥 안방에 앉아서 모든 세상을 이 손아귀에 무(無)의 법, 유(有)의 법을 같이 쥐고서 중용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 이겁니다.

평등공법(平等空法)에 대해서

질문 저희들이 자주 부르는 ‘삼세가 둘 아닌 노래’를 무심코 음미해 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절의 가사 중에 “일체가 내 부모 내 자식 아님 없거늘 어찌 끝없는 흐름에 평등공법 아니랴.” 하는 대목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둘 아닌 도리인 법을 설하는 내용인 것 같고, 2절의 가사 중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이면 자유권을 자재하는 평등공법 아니랴.” 하는 대목에서는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인, 행 아닌 행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본래 그대로인 평등공법을 우리가 진정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유권을 자재할 수 있어야만 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의 생각이 맞는지요.

답변 우리가 생각하면 걸어온 발자취가 없듯이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가는 것이, 듣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또 보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말하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먹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만나는 것도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이 더불어 돌아가는 이치죠. 그렇기 때문에 상하, 즉 사방을 총합해서 우리가 평등공법(平等空法)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 모두를 합해서 공했다…. ‘색(色)이다, 공(空)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말하듯이 하나도 혼자 하는 게 없고 혼자 걸어온 게 없어요.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걸어왔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하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내세울 게 없어요.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몸속에 내 자생중생들이 많은 것이 다 나이기 때문에 내가 혼자 걸어온 게 없노라.” 하는 거요. 혼자 보는 것도 없고 혼자 듣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니 내세울 게 어디 하나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외부의 모든 생활 자체가 혼자 사는 게 또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이 세상만사가 다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그 자체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원칙은 영원한 것을 우리 자체가 모르기 때문에, 즉 50% 반쪽만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다, 산다’ 여기에도 무척 걸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릴 게 하나도 없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일체 만물만생이, 즉 말하자면 가다가 만나고 가다가 보고 가다가 듣고 할 때마다…, 이런 게 있죠. 밥을 지어야 될 텐데 소켓이 맞지 않으면, 거기다 끼워도 맞지 않으면 불이 들어오질 못해서 밥을 못 지어 먹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모든 내 자생중생들을 다스리면서 화(化)하게 만들어야 바로 그게 화한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항상 소켓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신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과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즉 말하자면은 주장자라고 하죠. 그런데 그걸 안테나라고 해도 됩니다. 내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 놔야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불이 들어올 수가 있고, 즉 말하자면 만약에 소켓이 맞지 않는다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밥을 지어 먹을 수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어항 속에서 한 발짝도 떼 놓을 수 없는 그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기주머니에 있는 것이 어항 속에서 고기가 살듯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그 어항 속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며, 내 자생중생들 그 자체 악업 선업에서, 그 업 굴레에서 벗어나야 될 것이다. 첫째는 내 업 속에서 벗어나야 그 어항, 업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벗어나야 구경경지(究景境地)에 이르게 되어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인! 즉 자유인이란 부처를 뜻하는데 여래(如來)라고도 할 수 있죠. 여래라는 뜻은 우리가 한데 합쳐서 전체 돌아가면서 나투고 화(化)해서 돌아가는 그 평등공법(平等空法)이 즉 여래의 집이라고 합니다. 여래의 부처라고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생활선(生活禪)이자 여래선(如來禪)으로서 지금 공부하는 것입니다. 여래선!

전체 우리가, 하나하나가 이렇게 가다가 보면 꽃이 이쁘게 피었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찰나에 꽃과 나와 둘이 아니게 그 소켓이 맞기 때문에 딱 맞아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꽃은 화(化)합니다. 꽃이 화해서 내가 됨으로써 바로 나는 수많은 거를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여기서 수없이 꺼내도 줄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렇게 알아야만 되겠다 하는 겁니다.

이 모두가 그러하니 우리는 이 껍데기를 벗기 전에 우린 자생중생들을 화(化)하게 해서, 즉 말하자면 보현(普賢)으로 해서 응신(應身)이 돼서 뭇 중생들의 마음을 통해서 응해 주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할 줄을 모르는 말이지마는 현재의 우리가 알고 듣고 감지하고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광대하고 무변하고 아주 참, 말로는 행할 수 없는, 말로는 수요를 말할 수 없는 이런 평등공법(平等空法)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알아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듯이 우리가 평등공법이라 하는 것은 그대로 마음이 연결이 돼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그 뜻의 그릇을 말하고, 한 찰나에 만났다 한 찰나에 떨어지고 하는 그 자체를 볼 때에 우리는 한 찰나에 붙으면 바로 부(父)가 되고 한 찰나에 떨어지면 자(子)가 되듯이 한 찰나에 붙었다 떨어지면은,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느니라.” 성철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자체가 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법이 한데 공(空)한 것을 말할 때는 바로 둘이 아닌 까닭에 법은 법대로 있고 바로 행은 행대로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찰나에 붙었다 찰나에 떨어집니다. 여러분도 그러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여보!” 하고 부르면 “그래.” 그러곤 대답을 하고 한 찰나에 그 마음이, 소켓이 딱 끼어지니까 둘이 아니게 불이 일어나서 마음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딱 떨어지면 소켓이 싹 빠져서 딱 떨어져서 또 나는 나, 너는 너예요. 나는 나, 너는 너. 이렇게 떨어졌다가 또 한 사람하고 또 딱 붙으면, “아버지” 하고 붙으면 또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돼서 딱 붙어서 또 소켓이 싹 들어가서 “아버지! 뭐, 어쩌고….” “응, 응….” 이러곤 한데 붙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수없이, 끝없이 돌아갑니다, 이 세상만사가.

그러는 것을 어떻게 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아이고, 잘했다, 내가 설법을 했다, 내가 잘 안다’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여기 와서 수없는 사람들이 좋아지고 모두 깨쳐지고 또는 병도 낫고 여러 가지 각색으로 성취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낫게 해 주고 내가 말을 해 줘서 여러분이 깨쳤단 말 안 합니다. 왜? 내가 없기 때문이죠. 내가 따로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여러분이 있듯이 또는 내 몸도 공(空)해서 내가 혼자 한 게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게 없다는 사실이죠.

그러니 여러분도 그 뜻을 아시고 그저 자유스럽게 살 수만 있다면,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모든 그 오신통(五神通)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신통도 벗어나야 하니까요. 벗어날 수 있다면 정말 자유스러운 자유인으로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세세생생에 남의 모든 마음을 집어넣어서 굴려 내도 손색이 없고 굴려서 내보내도 손색이 없는 그런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경(究竟)에 이르고 열반(涅槃)에 이르는 그런 길입니다. 여러분이 잘 생각하고 다스리시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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