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선종사원의 방장과 주지

‘방장’은 주지의 거실, 당우명
독참·청익·입도·오도의 공간
청말부터 정식 직함으로 사용

선종사원의 최고 어른 스님을 ‘방장(方丈)’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 ‘방장’은 직함이 아니고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당우(堂宇), 즉 거실 이름이었다. 사진은 교토 천룡사 방장

선종사원의 최고 어른 스님을 ‘방장(方丈)’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 ‘방장’은 직함이 아니고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당우(堂宇), 즉 거실 이름이었다. 당호(堂號)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하나의 직함이 된 것이다. 지금 중국과 한국은 직함(소임)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일본은 여전히 옛 청규제도를 고수하여 당호로만 쓸 뿐 직함으로는 쓰지 않는다.

‘방장(方丈)’의 어원은 유마경에서 비롯한다. 유마경에 보면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법전(法戰)이 전개되는데,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청중들이 법전을 경청하기 위하여 그 방에 집합했다. 유마거사의 방(거실) 크기가 ‘사방 1장(四方一丈)’이고, 거기서 줄여서 쓴 말이 ‘方丈’이다.

사방 1장을 오늘날로 환산하면 사방 3.3m²로서 약 두 평 정도이다. 그런 작은 방에 3만 명이, 그것도 의자를 놓고 앉았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유마경〉에서는 이것을 ‘불가사의 해탈경계’라고 한다. 사방 1장으로 작은 방이지만 이 방은 인간의 지능, 중생의 지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무한대이다.

우리가 염불처럼 외우고 있는 신라 의상조사 법성게에는 “미세한 먼지 속에 온 세계가 들어가 있다[一微塵中含十方]”라고 하는 법문이 나오는데, 현실적,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불교는 마음의 세계이다. 마음은 허공처럼 사물을 초월한 무한대이다. 특히 화엄의 사법계관(四法界觀)에서는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하여 ‘사물과 사물 간에도 걸림이 없다’고 한다. 화엄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도 그런 뜻이다. 물리적인 세계를 벗어난 마음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유마경〉은 불이(不二)와 공(空)을 사상적, 실천적으로 보여준 선(禪)의 경전이다. 중국 선승들의 사고 및 대화 전개 방식은 거의 〈유마경〉의 논법에 바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기(禪機)가 물씬 풍기는 경전이다.

방장은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다. 방장은 독참(獨參, 단독으로 방장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 청익(請益, 개인적으로 별도로 방장으로 가서 법을 묻는 것), 그리고 소참법문을 통하여 납자들을 깨달음으로 들어가게 하는 입도(入道)의 공간이다. 본래면목을 깨달아 부처가 되게 하는 오도(悟道)의 공간이다.

〈전등록〉 6권 ‘백장회해’ 장(章) 부록 ‘선문규식(禪門規式)’에는 방장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방장은 정명(유마)의 방과 같은 곳이다. 개인적인 침실이 아니다.”(方丈, 同淨名之室. 非私寢之室也. 대정장 51권, p.251a)라고 정의하고 있고, 또 백장 선사도 “방장은 개인의 방이 아니다. 법을 통하여 수행자를 교육시키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방장은 수행자들에게 선(禪)의 진수를 보여주고, 불이(不二)의 법을 보여주는 공적인 장소이다.

주지의 거실 당호인 방장을 직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북송 1103년에 편찬된 자각종색의 〈선원청규〉와 남송말(1274년)에 편찬된 〈총림교정청규〉(함순청규)에는 당호로만 사용되었을 뿐, 직함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 후인 1311년 원나라 때 편찬된 〈선림비용청규〉와 1338년에 편찬된 〈칙수백장청규〉 등에는 정식 소임이나 직함은 아니지만, 종종 직함처럼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방장이 특별히 새로 괘탑(입방)하는 납자를 위하여 차를 내다[方丈特爲新掛搭茶]’ 등이 그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선원청규〉나 〈칙수백장청규〉 등에 ‘방장’이 직함이나 소임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다만 당호(堂號) 겸 직함으로도 애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장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직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청말 근대이다. 근대의 고승인 내과 선사(來果, 1881~1953) 연보 1919년조(年條)에는 “사(師)가 방장의 자리에 오르다(一九一九年 師升座方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근대에는 방장이 직함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진각어록〉·〈태고집〉·〈나옹어록〉·〈편양당집〉 등에도 종종 ‘방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주로 당호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고 직함으로 사용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장이라는 말을 직함으로 쓴 경우는 1928년부터이다. 조선총독부학무국에서 발행된 〈조선승려 수선제요(朝鮮僧侶修禪提要)〉(1928년 9월) 송광사 선당 소임 난에는, 여러 소임과 조실 화상을 열거한 다음 괄호 속에 ‘방장화상’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처음이다. 그 후 1967년 해인총림(가야산 해인사)이 설립되면서 이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방장 당우는 주지실이므로 선종가람의 7당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지가 총림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행자를 지도·교육하고 있고, 또 법왕으로서 부처를 대신하여 법을 설하고 있으므로 그 어느 당우보다도 중요한 당우이다. 예컨대 선종사원이 화재나 수해(水害) 등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건축하는 당우가 법당과 방장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당대(唐代) 선종사원의 방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송대에 와서 주지의 역할과 위상이 증대되고 사대부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방장의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남송 때에는 5산이 생기면서 주지의 위상이 선종사상(史上) 최고조에 달해서 방장실을 두 채나 두었다. 이를 전방장(前方丈)과 내방장(內方丈, 혹은 小方丈)이라고 하는데, 전방장은 소참법문, 독참, 접빈실, 회의실 등으로 사용되었고, 내방장(소방장)은 주지의 개인적인 거실, 즉 침소(寢所)로 사용되었다. 또 소방장, 내방장을 침당(寢堂)·정당(正堂)·정침(正寢)이라고도 한다.

또 동서 양쪽으로 배치하여 ‘동방장(東方丈),’ ‘서방장(西方丈)’이라고도 했는데, 이런 용어가 들어가면 원대 선종사원의 구조라고 보면 된다.

〈남송오산십찰도〉를 보면 남송시대 전방장의 규모는 매우 커서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불전(대웅전)·법당 크기와 같았다. 대혜 선사가 주지로 있던 경산사는 법당을 중각(重閣, 2층)으로 지어서 아래층은 법당으로, 위층은 전방장으로 사용했다. 대혜선사가 사용했던 전방장의 편액은 ‘능소지각(凌?之閣)’이었다. 이는 ‘능소지지(凌?之志)’에서 따온 말로서 ‘웅비하다·’‘날아오르다’는 뜻이다. 아마도 ‘중생에서 부처로 웅비하다. 날아오르다’는 뜻일 것이다. 능소화(凌?花)라는 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방장 건물이 선문답 가운데는 등장하는 경우는 꽤 많다. 임제 선사가 상당법어를 했다.

“벌거벗은 몸에 한 무위진인(無位眞人, 무애한 참사람)이 있다. 그는 항상 그대들의 얼굴(面門)로 출입하고 있는데, 아직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지금 즉시 살펴보도록 하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지위 없는 참사람입니까[無位眞人]?” 임제 선사가 선상에서 내려와서 그 스님의 멱살을 잡고 다그쳤다. “말해 봐라 말해 봐!” 그 스님이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은 그를 밀쳐 버리고 말했다. “무위진인(無位眞人)!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 같은 소리인고!” 그러고는 곧 방장으로 돌아가 버렸다〈임제록〉 3단. “上堂云, 赤肉團上 有一無位眞人,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 未證據者看看. 時有僧出問, 如何是無位眞人. 師下禪牀, 把住云, 道道. 其僧擬議. 師托開云, 無位眞人 是什?乾屎. 便歸方丈.”. 대정장 47권, p.496c)

황벽이 하루는 스승 백장 선사에게 물었다.

“위로부터 전해온 법을 화상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가르쳐 보여주시겠습니까?” 백장 화상이 아무 말 없이 선상(禪床)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자 또 황벽이 말했다. “후대 아손(兒孫, 후학들)들은 장차 무엇을 전수받습니까?” 백장이 말했다. “나는 평소에 그대가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箇人)이라고 생각했는데(실망했네).” 하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古尊宿語錄〉 41권. “黃檗一日問百丈云. 從上相承底事, 和尙如何指示於人. 百丈據坐. 檗云. 後代兒孫將何傳受. 百丈云. 我將謂是箇人. 便歸方丈.”(신찬속장경 68권, p.266b).

이처럼 종종 선승들은 법어를 마무리 하면서 아무 말 없이 방장으로 돌아가 버리는 때가 있다[歸方丈], 여기서 자신의 거처인 방장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법을 보여줄 것도 없고, 전해 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또 선어에 ‘귀가온좌(歸家穩坐,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와도 같은 뜻이다. ‘온좌(穩坐)’라는 말은 본래면목의 자리, 진여불성의 자리, 본연의 자리를 뜻한다.

일본 선종사원의 방장은 매우 크다. 방장 건물을 중심으로 앞에는 석정(石庭, 枯山水)이, 후원(後苑)에는 산을 배경으로 한 연못과 정원이 있다. 교토(京都)에 있는 톈류지(天龍寺), 료안지(龍眼寺) 등 선종사원의 방장은 그 규모가 조계사 대웅전 정도로 큰데, 앞뒤 문을 열면 일시에 만법일여(萬法一如)의 세계가 나타난다.

앞에는 카레산스이(枯山水) 석정(石庭)이 펼쳐져 있고, 후원(後苑)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다. 분명 사바세계지만, 그 정경은 유토피아, 극락정토이다. 그런 곳에서 돈·출세·명예 따위는 부질없는 중생들의 욕망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료안지(龍眼寺) 방장의 ‘카레산스이(枯山水 石庭)’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5개의 크고 작은 돌과 모래를 적절히 배치하여 산수를 나타내고 있는데, 돌의 크기와 위치 등이 가히 예술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선의 세계관을 표현한 료안지 석정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우리나라에도 방장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하동 쌍계사에 있는 동방장(東方丈)과 서방장(西方丈)이다. 현재는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 그곳은 방장채의 하나였다. 봉암사에도 최근에 동방장 건물이 신축되었는데, 수좌스님의 거실이라고 한다. 동방장, 서방장의 명칭은 원대에 생긴 것이다. 동방장(東方丈)이라는 편액을 붙인 당우가 있다는 것만 해도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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