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불교학연구회 춘계 학술대회...조명제 신라대 교수

 주제 : 고려후기 수선사 결사운동과 사상적 위상 재검토

그동안 학계는 수선사 결사운동을 타락한 불교의 현실을 비판하며 불교 신앙 본질에 충실하는 개혁운동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학설이 실제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명제 신라대 교수는 5월 18일 ‘2018년 불교학연구회 춘계학술대회’서 ‘고려후기 수선사 결사운동과 사상적 위상 재검토’를 주제로 발표했다. 조 교수는 “수선사 결사가 사회변혁적 성격이나 불교 개혁운동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다”며 “이는 공안선의 수용, 송대 문화의 수용과 유행이랑 맥락을 같이한다”고 강조했다.

송광사 승보전에 그려진 벽화. 보조 지눌국사가 정혜결사문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수선사는 사회변혁적 성격 NO
불교계혁운동으로 보기 어려워
결사라는 프레임으로 고려후기
불교사 흐름 규정해선 안된다

한국 불교사는 근대 이후 학문적인 연구가 시작됐지만, 근대학문에 입각한 연구 성과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해방 이후의 한국 불교사 연구는 고대에 편중되는 모습을 보였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고려 불교사 연구가 시작되었다.

신앙결사론은 한기두에 의해 최초로 제시되어 채상식, 고익진, 진성규, 최병헌 등에 의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은 고려의 불교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신앙결사라고 규정하였다. 이 신앙결사를 통해 소수의 중앙 지배층이 독점하던 사상계의 주도권을 지방 지배층과 서민층까지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사회변혁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신앙결사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수선사 결사, 백련사 결사를 제시한다. 이러한 신앙결사론은 1970, 80년대 사회 변혁을 중시하는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제기되었고, 그 이후 특별한 반론 없이 통설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신앙결사론은 여러 가지 모순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신앙결사는 고려 불교계의 자각적 개혁운동이나 사회변혁적인 운동으로 규정하기에 그 실체와 근거가 부족하다. 또한 신앙결사를 특정 시기나 특정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닌, 동아시아 불교의 보편적인 현상 차원에서 접근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이 논문은 기존 연구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수선사 결사운동을 재검토하였다. 이어 수선사 결사는다양한 선문과 마찬가지로 수선사가 수용한 공안선과 맥락을 같이 함을 서술하였고, 이것이 송대 문화의 수용과 유행이 관련된 것임을 밝혔다.

수선사 결사운동에 대한 재검토
기존의 신앙결사론은 무신의 난 이후 부패하고 타락하고 세속화된 불교계의 상황을 제시하고, 그와 상반되는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결사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신앙결사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을 살펴보면, 불교계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예불 독경과 참선 노동에 힘쓰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당시의 사회적인 모순이나 고려 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찰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지눌이 세 번째 깨달음을 이룬 계기가 된 〈대혜어록〉 역시 일상생활의 선을 강조했을 뿐, 승려를 중심으로 한 결사를 표방했고 세속인까지 포괄한 사회 변혁적인 성격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즉 결사의 주도층이 불교계 개혁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것은 중국 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결사문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수선사 결사 운동은 일반적인 신앙결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수선사는 이름 그대로 선 수행에 중점을 둔 승가 중심의 수행공동체 성격이 강하다. 더욱이 결사의 초기 단계에 참여한 수선사의 사회적 기반을 이뤘다고 보는 지방토호나 향리층 등은 결사 자체에 참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기존 연구는 수선사가 등장한 이후 불교계를 주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수선사 결사를 통해 교단을 어느 정도 장악하였는지, 독자적인 세력을 어느 정도 구축하였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수선사 결사가 지향하는 정신과 그 구체적인 내용이 지눌을 계승한 2세 혜심부터 6세 충지까지 계승되거나 표방되는 양상에 대한 해명도 필요하다.

또한 기존 연구는 수선사 결사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수선사는 최씨 정권의 후원에 의해 불교계에서 입지를 굳혔다. 1196년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선종 중심의 교단을 구축하는 것으로 기존 불교계에 대한 개편작업이 이루어졌다. 최충헌은 1204년에 정혜결사를 수선사로 사액하고, 지겸을 왕사로 책봉하였다. 1219년 최우가 집권하면서 그의 아들 만종, 만전을 출가시키고, 그의 핵심세력을 수선사의 주요 단월로 참여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수선사는 정혜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지만, 최씨 정권의 후원을 통해 불교계에서 크게 부각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신의 난 이후 선종은 지겸, 승형을 중심으로 한 희양산문의 위상이 수선사와 함께 부각되었기 때문에 수선사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수선사 결사 운동은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당시 사대부를 대표하는 이규보가 혜심의 비명을 찬술하였지만, 혜심과 직접 교류한 적은 없다.

수선사의 공안선 수용과 사상적 위상
신앙결사론에서는 수선사가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게 된 사상적 요인에 대해서 간화선과 정토신앙을 든다. 곧 지눌, 혜심은 고려 사상계에서 유행하던 간화선을 단순히 답습하고 계승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종합, 발전시켰으며, 당시 불교계뿐만 아니라 독서층에게 참신한 사상체계로서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또한 수선사는 공덕과 정토신앙을 포용하는 불교관을 표방하여 지방사회의 서민대중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됐다고 보았다.

나아가 수선사는 차츰 선사상을 강조하며 독서층이나 문신관료층의 지지를 받았다. 아울러 수선사가 중심교단으로 떠올랐다는 것은 지눌의 사상체계가 사회사상으로서 일정한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수선사의 역대 주법이라는 대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형성과 사상적 전개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사상체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구축되는가의 문제와 그것이 사상계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이해됐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수선사가 불교계를 주도했다고 평가하거나 조계종의 형성으로 귀결됐다는 설명은 실제 역사상을 반영한 것인지 의문이며, 고려후기의 불교사를 선종사 위주로 파악하는 문제점을 갖는다.
13세기 고려 선종계에서 문자선의 수용과 이해는 〈염송집〉 〈삼가염송집〉 〈염송설화〉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문헌의 성격을 단순히 도식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자선의 단계별 이해 수준이 어느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런 문제는 13세기 후반까지 고려 선종에서 편찬, 간행된 선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선사 단계에서 송대선의 이해가 간화선 일변도로 전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문자선의 이해에 초점이 맞춰졌다. 아울러 이러한 경향은 13세기 후반에 일연을 중심으로한 가지산문까지 이어졌다.

오히려 북송 이후 선종의 주요한 종파였던 운문종, 임제종, 조동종의 선에 대한 관심이 고려 선종계에서 존재했으며, 그런 경향은 송대 선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공안 비평을 중심으로 한 문자선의 수용과 성행으로 표출됐다.

신앙결사론은 종래 불교의 사상적 역할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재단하는 분위기에서 탈피하고자 하였지만, 여전히 종교, 사상을 정치사회적 틀에서 접근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더욱이 고려불교사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결사라는 프레임으로 고려전기에서 후기로의 불교사 흐름을 이해하는 방식은 오히려 불교사의 이해를 축소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신앙결사론이 제기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통설로 군림하면서 별다른 문제제기가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연구자들이 여전히 한국불교사라는 일국사적 연구의 틀에서 탈피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근대 불교는 동아시아 불교사의 차원에서 접근하여야 하며, 고려불교사의 경우 송대 불교의 수용과 이해가 기본적인 과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송대 불교는 불교라는 틀을 넘어서 주자학, 도교 등과의 교류, 상호 대응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사상사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고려불교사의 흐름과 의미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수선사는 신앙결사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사회변혁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으며, 불교계 개혁운동으로 보기 어렵다. 수선사는 승가 중심의 수행공동체로서 의미를 갖고 있지만, 결사라는 프레임으로 고려후기 불교사의 흐름을 규정할 수 없다.

또한 수선사에서 지향한 선은 12~13세기 고려 선종에서 폭넓게 이루어졌던 송대선, 곧 공안선의 수용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흐름은 수선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선문에서 공유된 것이다. 나아가 공안선의 이해는 간화선 일변도가 아니라 오히려 문자선의 이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경향은 선시의 유행이라는 현상과 관련되며, 선승과 사대부 계층에 폭넓게 공유되던 송대 문화의 수용과도 관련된다. 다시 말해 수선사를 중심으로 한 문자선의 성행은 이러한 송대 문화의 폭넓은 유행과 병행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간화선은 수용 단계에 머물렀고, 14세기에 이르러 태고보우, 나옹혜근 등이 활약하는 단계에 이르면 간화선이 선종계를 석권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명제 교수는… 신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로 부산대학교 사학과 학사와 동 대학원 박사 졸업했다. 일본 고마자와대학 불교학부 박사후과정을 밟았으며, 교토대학 연구원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 ‘근대불교의 지향과 굴절’ ‘백암성총의 불전 편찬과 사상적 경향’ ‘선문염송집의 편찬과 종문통요집’ 등의 논문과 〈고려 후기 간화선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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