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 사진 확보, 도난 성보 환수 ‘첫걸음’

예산 향천사에서 사리진 불화들. 사진 왼쪽부터 예산 향천사 지장보살도, 예산 향천사 현왕도, 예산 향천사 산신도.

지난해 예산 향천사와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의 후원을 받아서 <예산 금오산 향천사 문헌집>을 간행했다. 그 과정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관련 기록과 사진 등을 수집할 수 있었는데, 올 해 사찰 유출문화재 기고를 준비하면서 향천사에 소장된 성보물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일제강점기 두 건의 재산대장을 찾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성보 도난 시작돼
불화 9점 훔친 도둑 검거되기도
현재 지장시왕도·현왕도 등 묘연
천불전 석조불상 460점도 유출


충남 예산 금오산 기슭에 자리 잡은 향천사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로, 652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승려 의각이 귀국해서 656년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은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조성된 것이 없고,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탑을 제외하면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성보물이다.

예산 향천사에 전하는 사적기에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기간에 천불전을 제외하고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승군으로 활동한 기허영규를 따라 참여한 멸운혜희가 1596년에 사찰에 돌아와 전각과 요사 등 100여 칸을 복원하였는데, 1634년에 노덕(老德) 계리가 여러 불화를 조성하기 위해 여러 관청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으나 1636년에 병자호란으로 인해 추진하던 탱화 불사를 멈추었다. 이후 1662년에 지방의 시주자들에게 후원을 받아서 괘불도, 극락전 후불도와 중단도 등을 조성하였다.

1692년에 화재로 전각이 소실된 후, 1693년에 안성 청룡사에 살던 거사 관능과 사당(舍堂) 각심이 재물을 보시해 불사를 시작하여 1694년에 극락전과 동서 선당(禪堂), 노전(爐殿)과 향적전을 중건하였다.

1801년에 다시 화재로 천불전만 제외하고 사찰 전부가 소실될 때 마을 입구에 사는 권 씨가 불길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삼존불상, 후불탱 및 지장탱을 구출하였으나 괘불은 구하지 못하였다. 1803년에 중건을 시작해서 극락전과 양쪽 선당, 노전과 향적전 등 4~5동의 50여 칸을 겨우 지었으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로 전각이 다시 소실되어 불탄 나무와 남은 나무로 요사 4칸 앞뒤로 기둥을 세워 조그만 방을 덧달고 노전 3칸 앞에 쪽방을 달아내어 2동을 근근이 건립하였다. 1846년에 계율로 고명(高名)한 영파경훈이 사찰 전각을 중건하여 대중 50여 명이 거주하였다.

1909년에 극락전 이하 큰 방 전부가 무너지기 직전이라 청응목우와 호봉법신이 함께 서원을 세우고 무너진 사찰을 일으켜 세우기를 약속하여 전각을 중수하고, 전각의 탱화도 전부 새로 조성하였다. 1911년에 박청응 주지스님이 아미타삼존상과 3,513불 등을 개금하였다. 1913년에 천불전과 극락전의 단청불사를 새로 하고 극락전 내 범종 1구를 신도로부터 기부받았다.

향천사 재산대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조선총독부 관보본이 남아있지만, 품목과 수량이 달라서 다른 시기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1924년 예산리에 거주하던 김진섭 집안의 후원으로 향천사 괘불을 조성한 사실을 감안하여 두 건의 재산대장이 작성된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는 이 괘불도가 적혀 있지 않아 1924년 이전에 작성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보본은 1932년 11월 11일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두 개의 재산대장의 비교를 통해서 향천사에 소장되었던 성보물의 품목과 수량 및 규격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재산대장은 불상, 불화, 석조미술, 전적, 공예품 등이 42건이 나열되어 있지만, 1931년 조선총독부 관보 재산대장에는 불상과 불화 등 17건만 적혀 있다.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재산대장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성보문화재를 비교하면 현재 향천사에 현존하는 성보문화재는 불상이 아미타삼존상, 석조불상(1,540구), 석조나한상(16점)이고, 불화가 아미타회상도(1점), 칠성도(1점), 신장도(1점), 산신도(2점)가 남아있다.

향천사의 성보문화재는 1970년대 일부 도난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74년 5월 3일에 발간된 경향신문 기사 중에 “寺刹佛畵만 훔쳐, 行者 가장, 1명 拘束 2명 令狀 - 서울중부서는 3일 金榮烈(30·전과2범)를 절도혐의로 구속하고 서울 용산구 한남동 동양당 주인 金基昶(33)과 서울 종로구 관훈동 고금당 종업원 金忠男(31) 등 2명을 장물 알선 및 취득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金씨는 행자승을 가장, 전국 유명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지난 1일 충남 예산군 수덕사 대웅전에 걸어놓은 山神佛畵 2점, 七星佛畵 1점 등을 훔친 것을 비롯, 충남 공주 갑사, 경기도 남한산성 장경사, 충남 예산군 향천사에서 모두 9점의 불화를 훔친 혐의다”라는 기사 중에 어떤 불화가 도난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본격적인 유물의 유출이 이 시기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2016년 발간한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에는 향천사에서 도난당한 문화재는 지장시왕도(1991.12.2. 도난), 현왕도와 산신도(1991.2.1. 도난)가 실려 있지만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에 신고된 도난문화재는 지장시왕도 밖에 없다.

이 가운데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삼존상과 팔대보살을 배치하고, 상단 좌우에 판관과 녹사 등을 그린 구도의 작품이다. 지장보살은 높은 대좌에 결가부좌한 자세이고, 비구형의 민머리에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그 안에 보주를 들고 있다. 높은 대좌 앞에 위치한 지장보살과 같은 얼굴을 한 도명존자는 육환장을 쥐고, 무독귀왕은 두 손으로 경함을 받쳐 있다. 시왕들은 붓 혹은 홀을 들고 원유관, 책관 등을 쓰고 있다. 특히 열 번째 왕인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은 투구를 쓴 장수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화면상단의 나머지 공간에는 동자, 판관, 사자, 옥졸 등의 명부 권속이 빠짐없이 그려져 있다. 설채법은 적색, 녹색 등이 주조색을 이루고, 백색이나 청색 등을 보조색으로 사용하였다. 이 지장시왕도는 구도와 설채법 등을 보면, 현재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회상도와 1782년경에 같이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지옥도가 생략되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의 현왕도는 중앙에 크게 염라대왕이 배치되고, 좌우로 권속이 둘러 배치되는 조선후기 현왕도의 기본 구성을 따르고 있다. 구름을 배경으로 중앙 탁자 뒤에 현왕이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어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있다. 현왕은 머리에 천도재에 독경(讀經)되었던 금강경(金剛經)을 얹은 관(冠)을 쓰고, 한 손에는 붓을 들고, 다른 손으로 탁자를 잡고 있다.

현왕 좌우로는 판관(判官), 녹사(綠事), 시자(侍者)가 서 있다. 현왕의 관복을 비롯한 권속들의 의복과 탁자, 병풍 등의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이 현왕도는 구도와 설채법을 보면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같은 시기에 조성된 현왕도와 달리 현왕의 뒤편에 병풍이 생략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예산 향천사는 여러 스님들의 수행정진, 포교활동으로 예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시내에 위치한 접근성의 강점으로 근대 시기 사찰 촬영 사진만 정비된다면 유출된 문화재의 현황을 보다 더 정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천불전에 봉안된 석조불상이 일제강점기에 비해 대략 460점 정도가 유출된 것으로 보여서 체계적인 조사만 이루어진다면 현재 석불들의 위치 또한 파악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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