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 스님(52ㆍ헝가리 원광사 주지)

청안 스님은…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1990년 헝가리에서 숭산 스님의 참선법회에 참가한 후 선수행을 시작했으며, 1994년 한국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2000년까지 한국 화계사에서 수행했으며, 1999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지도법사 인가를 받았다. 2000년 헝가리로 돌아가 2010년 한국식 전통사찰 원광사를 열고 선수행과 지도, 전법의 길을 열고 있다. 저서로는 법문집 『꽃과 벌(The flowers and the Bee 2007)』 『마음 거울(Mind Mirror 2009)』 『청안 스님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How may I help you 2011)』가 있다. 2009년 제7회 대원상 승가 부문 대상을 혜총 스님과 함께 공동수상했다.

 

법 찾아 헝가리서 한국으로
헝가리서 숭산 스님 첫 친견
한국선불교 알게 되고 禪 입문
<예불문><반야심경>듣고 감명
숭산 스님의 ‘십문관’에 매료
세 번 발심 후 한국서 출가
1995년~2000년 화계사서 수행
1999년 숭산스님 지도법사 인가

부처님이 법을 남긴 후, 법은 시ㆍ공간적으로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불법(佛法)에 다가가기 위한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양한 모색이 전개됐다. 법은 하나였지만 길은 수없이 많았다. 그것은 사자상승의 쉼 없는 구법과 전법이 거듭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도 쉼 없는 구법과 전법의 사자상승이 이어져왔다. 그 사자상승 중에는 멀리 헝가리에서 온 푸른 눈의 청년도 있었다. 한국 간화선의 세계화에 앞장섰던 숭산 스님을 통해 불법(佛法)을 만나고, 헝가리에 한국의 선불교를 심고 있는 헝가리 스님, 청안 스님이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 옛날, 달마가 동쪽으로 갔던 것처럼 한국선불교를 전 세계로 전파하기 위해 먼 길을 오가며 한국의 간화선 알리기에 애를 쓰신 스님이 있다. 2004년 입적하신 화계사 前 조실 숭산 스님이다. 세계 4대 생불로 불렸던 숭산 스님은 1966년 일본 홍법원 개원을 시작으로 2004년 원적에 들 때까지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곳의 홍법원을 개설하고 5만여 명의 눈 푸른 제자들에게 법을 전했다. 청안 스님은 그 5만여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안 스님은 청년기 시절부터 세상과 인간의 삶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세상은 무엇이며 인간은 또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왜 왔으며 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 푸른 눈의 청년은 세상과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상과 인간을 정리하고 정의한 사상과 철학은 넘치고 넘쳤지만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한 청년의 가슴은 고요해지지 않았다. 청안 스님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의문들을 나누며 쉼 없이 답을 찾고 있었다. 청안 스님과 그들은 유럽의 사상과 철학을 넘어 동양의 사상과 철학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청안 스님은 친구들과 함께 요가와 티베트불교에도 문을 두드렸다.

“티베트불교에서 부처님의 법을 보았고, 처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실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물론 티베트불교에도 길은 있었지만 제가 찾고 있는 길을 열어주지는 못했어요. 티베트불교에는 공안과 선문답이 없었어요.”

청안 스님이 스물네 살 때였던 1990년, 청안 스님은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숭산 스님을 보게 된다. 숭산 스님의 두 번째 헝가리 참선법회였다. 청안 스님의 귀의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길을 찾다 ‘숭산’
1990년 9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세계일화’를 서원하며 한국불교의 간화선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었던 숭산 스님의 두 번째 헝가리 참선법회가 열렸다. 친구들로부터 숭산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청안 스님은 설레는 마음으로 법회에 참석했다. 한국불교의 선(善)과 숭산 스님의 수행가풍을 알게 된 청안 스님은 무릎을 쳤다. 마침내 길을 찾은 것이다.

“<예불문>과 <반야심경>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처음 듣는데, 마음이 고요해졌어요. 그냥 좋았어요.”

그 해 12월 초 헝가리에서 다시 숭산 스님의 참선법회가 열렸고, 청안 스님은 주말 수행 프로그램에 정식으로 참여한다.

“처음이었어요. 그런 경험은. 망상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에 품었던 의문들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던 청안 스님은 ‘숭산’이라는 이름과 한국불교의 간화선을 만나면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1991년 4월, 또 한 번 숭산 스님의 참선법회에 참석한 청안 스님은 숭산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숭산 스님을 정확히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선(禪)을 통해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숭산’이라는 이름을 태양으로 선택하면, 숭산의 위성으로서 나의 궤도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안 스님은 그것을 ‘직관의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때, 스님은 ‘직관’에 의한 소통을 경험했다고 했다. 그 ‘직관’은 의문들로 가득했던 청안 스님을 다른 세계와 언어로 확장시켰다. 품었던 의문들을 풀기 위해 그 동안 언어와 논리에만 기대왔던 청안 스님이었다. 언어와 논리 너머에도 소통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처음 알게 된 ‘숭산’이라는 이름과 내가 하나의 길에 묶여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것은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인연이라는 생각을 일으켰고요. 그냥 설명 없이 일어난 생각이고, 찰나에 지나가는 생각이었지만 확실하고 분명한 느낌이었어요.”

청안 스님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지나간 생에서 숭산 스님과의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면서 지금의 인연은 다하지 못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나고 그렇게 찰나에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스승을 만나고 길을 찾았다.

 

본래 자리 헝가리서 전법
2000년 고향 헝가리 행
헝가리 최초의 한국사찰 불사
2010년 원광사 열고 수행지도
“수행엔 ‘끝’ 없어요. 계속해야”
숭산스님 수행체계 그대로 따라
헝가리에 한국 간화선 심어
등록된 회원(신도) 1200여 명
2020년 예정, 제2의 불사 시작

청안 스님은 1999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지도법사 인가를 받았다.

 

출가
청안 스님은 1995년 한국에서 정식으로 출가한다. 청안 스님은 숭산 스님을 만나고 난 후 세 번의 출가발심이 있었다.

처음은 스님이 대학을 졸업하던 1992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중고등학교에서 실습 과정을 하고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숭산 스님을 만나고 난 후부터 생각이 더 많고 깊어진 청안 스님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법의를 입고 법석에 앉은 숭산 스님의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그리고 숭산 스님처럼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1993년 숭산 스님을 따라 미국 프로비던스 선센터에서 동안거를 나던 중이었다. 법회 때였다. 법의를 입은 스님들과 재가 수행불자들이 줄을 맞춰 서있었다. 청안 스님의 눈에는 스님들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 스님들 속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어요. 아! 나도 스님 되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세 번째는 다음해인 1994년이었다. 두 번째 발심이 있었던 미국에서의 법회 모습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스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이렇게까지 나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거야.”

청안 스님은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 스님은 1995년 해인사에서 출가한다. 사미계를 받고 난 후 청안 스님은 2000년까지 숭산 스님이 계신 서울 화계사에서 수행한다. 1996년에는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고, 1999년에는 숭산 스님으로부터 지도법사 인가를 받는다. 헝가리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수행…‘숭산’에서 시작되다
“한국불교와 한국간화선을 공부하기 위해선 비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숭산 스님의 공부법이 좋았고, 제가 할 수 있는 공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출가했고 숭산 스님 밑에서 공부했어요.”

청안 스님은 처음부터 ‘숭산’이었다. 숭산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 아기가 처음 보고 처음 듣는 엄마의 모습과 말(言)에서부터 삶을 시작하듯 청안 스님은 삶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삶, 즉 삶에 대한 근본적 물음들을 품고 시작한 또 다른 삶을 ‘숭산’으로부터 시작한다. ‘숭산’은 ‘청안’의 ‘첫’ 언어였다.

“숭산 스님의 공부법을 듣는 순간 가슴이 뛰었어요. 마음에 분명하게 와 닿았어요. 숭산 스님의 공부법을 따라가면 내가 원하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앞서 말했듯이 숭산 스님은 당시 세계 각국에 한국의 간화선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숭산 스님의 수행법에 대한 성과는 앞서 말한 산술적인 수치만으로도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숭산 스님의 간화선 수행체계인 일명 ‘십문관’은 전에 없던 공부법으로, 산술적 수치로 따져 물을 수 없는 ‘성과’이면서 한국불교의 커다란 불사로 평가된 업적이다.

쉬운 공안(1단계)으로 시작해 단계적으로 공안의 근기를 높여 최종 단계(10단계)에 이르는 수행법인 ‘십문관’은 출가자는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적합한 수행법으로 회자되며 한국간화선의 세계화와 대중화를 이끌었다.

“공안엔 역설이 많아요. 일반적인 생각과 언어로는 이해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것들이에요. 숭산 스님의 공부는 그 역설과 소통할 수 있는 직관의 근기를 단계적으로 높여준다는 것에 방점이 있어요. 공안타파는 어려운 일이에요. 쉽지 않죠. 그래서 ‘공부’이고요. 그 공부는 문자나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문자나 말이 필요 없어요.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지요. 숭산 스님의 공부법에 그 답이 있어요.”

청안 스님은 2000년까지, 6년 동안 화계사에서 수행했다. 쉽지만은 않은 길이었다. 출가란 삶을 바꾸는 일이다. 그 삶은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숭산 스님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은 쉬울 수만은 없었다. 더구나 언어로 해결할 수 없는 간화선을 두 번 세 번 번역된 언어(영어)로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릎을 꺾고 앉아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생각’들을 부수는 일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물론 공부란 쉽지 않죠. 이 세상의 모든 공부가 쉽지 않죠. 더구나 생각을 부수고 언어를 넘어서는 공부가 쉬울 수 없죠.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이 했어요. 언어와 문자는 여러 가지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에요. 가는 길이 여러 가지일 뿐이죠. 가다보면 결국 하나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공부에 장애란 없었어요. 무릎을 꺾고 앉는 일도 그랬어요. 고단한 마음의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확신이 힘든 육체를 잊게 했죠.”

그렇게 헝가리 청년은 먼 나라를 찾아와 힘든 길을 시작했다. 아니 찾아낸 길을 묵묵히 걸었다.

헝가리에 심는 한국불교
청안 스님은 2000년 헝가리로 돌아간다. 1999년 8월, 청안 스님은 숭산 스님으로부터 지도법사 인가를 받았다. 그 때 청안 스님은 숭산 스님으로부터 숙제를 받는다.

“한 자리에 3년은 있어야 한다. 꽃처럼 자기가 살아야 할 땅을 찾아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제는 너만의 공부가 아닌 중생과 함께 하는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그 자리를 찾아가거라.”

청안 스님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은 ‘헝가리’였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이고, 떠나온 곳이기도 하죠.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뿌리 내릴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는 숭산 스님이 헝가리에서 법회를 열지 못하셨어요. 헝가리 사람들은 숭산 스님의 육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죠. 그래서 헝가리에 한국불교, 한국선, 숭산 스님의 가르침 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헝가리로 돌아간 청안 스님은 헝가리를 비롯해 미국 등을 돌며 선(禪)을 알리고 지도했다. 하지만 스님은 늘 아쉬웠다. 자연 속에 있는 한국의 도량과 선방이 늘 그리웠다. 청안 스님은 한국에서 보았던, 한국에서 자신이 살았던 한국식 사찰을 짓기로 발원한다. 2004년 9월 부다페스트에 60km 떨어진 필리스산에 터를 정하고, 2005년부터 불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0년 4월 문을 연다. 헝가리 원광사다. 헝가리 최초의 한국식 전통 사찰이다.

불사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식 사찰을 짓는 것이었다. 청안 스님은 한국에서 배운 부처님법대로 했다. 기도하고 수행했다. 인연은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바른 마음을 품고 한 가지 생각으로 발원한다면 언젠가 인연은 만나고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헝가리 원광사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청안 스님은 헝가리에 한국의 선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럽 사람들의 생각은 한국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죠. 처음부터 숭산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아요. 숭산 스님이 있기까지를 이야기해야 숭산 스님을 받아들이죠. 그래서 부처님부터 시작했어요. 그리고 용수보살, 달마대사, 육조, 경허, 만공까지 이야기를 해야 했죠. 한국불교와 한국선을 널리 알리기 위해선 전법의 대상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지역의 정서와 문화에 맞는 전법 시스템을 개발해야 효과적인 전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헝가리 원광사는 유럽 최초의 한국식 사찰로서 숭산 스님의 본찰인 덕숭총림 수덕사의 말사이다. 다양한 종교와 연령의 참가자들이 한국 전통의 선(禪)과 서양의 수행방식을 접목하여 수행할 수 있는 수행공간이다. 원광사는 동안거와 하안거 등 사찰에 거주하는 스님과 재가자가 모두 참가할 수 있는 장ㆍ단기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원광사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유튜브 채널에서 사찰의 일정과 법문, 활동사진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헝가리 원광사에 등록된 회원(신도)은 1200여 명에 이른다. 그렇게 ‘청안’이라는 꽃은 헝가리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다. 이제 원광사의 선방은 좁아졌다. 청안 스님은 내년 봄부터 다시 불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2020년 점안식을 예정으로 또 하나의 불사를 시작한다.

“수행은 계속해야 해요. 휴대폰을 충전해야하는 것처럼 수행도 계속해야 해요. ‘끝’ 없어요.”

헝가리에서 전법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청안 스님은 “전법은 자신의 쉼 없는 수행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법을 찾아 한국을 찾아왔던 맑고 푸른 눈의 헝가리 청년, 그는 헝가리로 돌아갔다. 언젠가 헝가리에서 ‘청안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수행과 전법이 하나라고 이야기 하는 청안 스님의 ‘상구보리하화중생’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2010년 문을 연 헝가리 원광사 전경.
헝가리 원광사 선방내부
헝가리 신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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