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도신의 선법과 일행삼매

단체생활 등 수행풍토 수정
〈능가경〉 위주 탈피 대승경전 수용
선종의 사상적 체계와 틀 넓혀
〈능가경〉 〈반야경〉의 합일
염불과 성불·禪과 戒 합일
5조 홍인과 ‘동산법문’ 완성 창시

도신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보이는 곳은 〈송고승전(續高僧傳)〉이고, 그 외도 〈정법보기(傳法寶記)〉,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 〈전등록(傳燈錄)〉 등에서 그에 관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4조 도신은 중국 선종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로서, 중국선종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하기도 한다. 농선병중(農禪?重)을 주장했고 두타행을 이어오던 초기 승단을 안정된 주거로 전향하는 체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동시에 5조 홍인과 함께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도신에 대한 고사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사미인 도신이 승찬 대사를 처음 참알하고 말하기를 “화상께서는 자비로서, 해탈법문을 베풀어 주기를 원합니다”고 하자, 승찬 대사가 “누가 너를 속박하느냐?”고 하자, 도신이 대답하기를 “아무도 속박하지 않습니다”고 했다, 승찬 대사가 “(그렇다면)어찌 다시 해탈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자, 도신이 대오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대화는 〈불설전여신경(佛說轉女身經)〉에도 비슷한 고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사리불과 한 여인의 대화에 나오는 이야기와 매우 닮아 있다. 여인이 사리불에게 “존자는 해탈을 얻었는가?”라고 물었고 사리불이 말하기를 “나는 해탈을 얻었다”고 하자, 여인이 말하기를 “누가 존자를 속박했다고, 해탈을 얻었다고 하는가?” 사리불이 말하기를 “속박한 자가 없기에 해탈을 얻었다고 하며, 그리고 그 본성이 해탈상이다. 이런 연고로 나는 해탈을 얻었다고 말 할뿐이다”고 하고 있다.

도신은 승찬으로부터 10여 년 동안 선법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는 남방을 20여 년 동안 유역했는데, 그 시절을 전후로 ‘반야사상’과 ‘천태선관’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점은 ‘동산법문’을 완성하는 데 관건이 되었을 것이다. 반야사상은 양진(兩晉ㆍ동진과 서진)이래로 남방의 현학과 서로 보안을 이루면서 발전해 오고 있었다. 도신과 반야사상에 대한 한가지의 고사가 전해져 온다. 그가 당시 길주(吉州ㆍ현재의 강서성 길안)에 있을 때 도적들이 성을 에워싸고 물러가지 않자 도신은 군중들에게 ‘마하반야(摩訶般若)’를 염하기를 권했다. 군중들이 ‘마하반야’를 모두 다 같이 염하자, 도적 무리들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 고사는 남방에 〈반야경〉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신은 많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 40세 때에 점주황매(州黃梅)의 쌍봉산에 돌아왔다. 이때에 그는 달마 이래로 선종 선사들의 두타행 및 무거주의 형태를 탈피하는 안정적인 주거에서 수행하는 체제를 확립했다고 한다. 그가 쌍봉산에 돌아온 후에 크게 법석을 열었는데, 그의 명성을 전해 듣고 많은 학자들이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몰려들었다고 하며, 함께 참학을 하는 자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선종사에서는 이때부터 달마선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한다.

또 그는 일찍 제방을 참방하면서 선종의 실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크게 초기 선종의 형태 중에서 세 가지를 고쳤다.

첫 번째는 달마 때부터 이어온 두타행과 무거주의 형태의 수행풍토를 바꾸었다. 고정적인 주거를 마련하고 집단적인 단체생활의 체제로 돌입하게 했다. 두 번째는 유일하게 〈능가경〉 위주의 수행지침서를 신봉하던 것을 기타 대승경전을 겸하게 함으로서 선종의 사상적 체계를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적인 틀을 넓혔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불립문자(不立文字)만을 주장하지 않았다. 즉 도신은 먼저 외부적으로 선종의 주거를 확립해서 집단생활을 통한 승가의 외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면, 내부적으로는 초기 선종의 사상적 확장 및 체계를 수립했으며, 동시에 문자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새로운 선종의 지평을 열었다고 하겠다. 이 점은 그가 선종사에 남긴 하나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의 선법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는 〈능가경〉과 〈반야경〉의 합일이다. 두 번째는 염불과 성불의 합일이고, 세 번째는 선(禪)과 계(戒)의 합일이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능가경〉과 〈반야경〉의 융합은 ‘동산법문’의 초석을 다지는 〈입도안심요방편(入道安心要方便)〉을 탄생을 시켰으며, 그 후 〈입도안심요방편〉은 ‘동산법문’을 조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또 위의 세 가지의 특징은 도신과 홍인의 ‘동산법문’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했으며, 특히 동산법문은 선종 형성에 과도기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 ‘楞伽’와 ‘般若’를 결합한 것은 능가사(楞伽師) 계통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게 했으며, 선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도신 이전의 북방에서 달마선이 사회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주무제(周武帝)의 훼불 및 기타 요인으로 인해서 대부분 선종의 승려들도 남하를 하게 된다. 도신이 장기적으로 은거하면서 활동했던 지역은 장강 유역의 안휘성 호북성 일대로서, 이 지역은 남북조 시기에 삼론종이 유행을 했던 지역이고, 아울러 천태종 전교의 중심지였다. 때문에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도신은 천태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그가 말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는 입도(入道)의 방편법문으로 천태종이 온힘으로 제창한 것이기도 하다. 또 일행삼매는 〈천태지관〉의 4종삼매 가운데 상주삼매(常坐三昧)라고 하기도 하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일행삼매’와는 연관성이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도신의 ‘일행삼매’의 근본적인 사상적 뿌리는 〈능가경(楞伽經)〉과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 등이다. 〈역대법보기〉에서 도신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관해서 말하기를 ‘유심염불(唯心念佛)과 실상염불(實相念佛)을 결합했으며, 〈능가경〉의 여래장불성사상과 〈반야경〉의 반야학설을 융합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혹자는 ‘일행삼매’는 정토사상을 융합한 것으로 선정합류(禪淨合流)사상의 체현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선정합류(禪淨合流)의 시조는 동진혜원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위진 시대에 반야학설이 유행을 했다면, 남북조시기에 여래장불성사상이 중국 불학에 중요한 지위를 점유하면서 중국불교의 실천수행으로 반본정심(返本淨心)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선종에서 주장하는 ‘명심견성(明心見性)’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이렇듯 일행삼매에 대한 많은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림, 강병호

 

또 도신은 능가사(楞伽師ㆍ달마계통 선법)의 전통인 안심(安心)법문을 계승하고, 새롭게 안심법문을 개조해서 말하기를 “또한 염불도 아니며, 마음을 잡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보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분별하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사유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관을 행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산란한 것도 아니며, 직관으로(바로) 임운하는 것이다.(亦不念佛, 亦不捉心, 亦不看心, 亦不計心, 亦不思惟, 亦不觀行, 亦不散亂, 直任運.)”고 하였고, 또 “염불하는 마음이 부처이며, 망념은 범부이다.(念佛心是佛,妄念是凡夫)”고 하였는데, 즉 도신은 염불을 통해서 안심에 도달할 수 있으며, 입도(入道)는 최종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염불은 단지 방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선종의 청규하면 백장청규와 백장선사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청규의 모태는 4조 도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선종은 당나라 초에 이르러서 중대한 변화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작과좌(作與坐)’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전법보기(傳法寶紀)〉의 도신조에 의하면, “도신의 구호는 작무에 종사해서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고 하고 있다. 즉 ‘능작삼십오년(能作三十五年)’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작(作)’은 ‘작무(作務)’. 혹은 ‘작몰(作沒)’이라고 하며, 일체의 생산노동을 가리킨다. 그의 문하에 집결한 500인들로 하여금 신도의 시주에 의존하지 않고 산야를 개간해서 ‘득일구요기창(得一口療飢瘡)’, 즉 스스로 각자의 의식주를 책임지게 하였다. 물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이것은 전체 불교사에서 매우 창의적이고 획기적인 사건으로서, 선종은 물론이거니와 불교역사에서 혁명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단체가 모여서 노동을 의지해서 생활을 영위했던 것은 맞지만, 사실은 당시 이미 불교에서는 산간을 개간하고 상업 및 무역업에 종사했던 사례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이 당시에 비교적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것 같다. 동진도안 스님은 12세에 출가를 하였는데 “농가에서 부역한지, 삼년에 이르렀고, 부지런히 노동을 하였다.(驅役田舍, 至於三年, 執勤就勞)”고 하였고, 법현(法顯)은 사미니 때 “항상 동학 수십인과 더불어 농가에서 벼를 베었다.(嘗與同學數十人於田中刈稻)”고 하고 있으며, 요진(姚秦)때 도항(道恒)이 지은 〈석교론ㆍ釋敎論〉의 기록에도 “사미 중에는 혹은 황무지를 개간해서 채소를 심고, 농부와 함께 교류하고, 혹은 장사와 무역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었다.(或墾殖田圃, 與農夫齊流, 或商旅博易, 與衆人競利)”고 하였고, “혹은 가축을 기르고 재물을 모으고, 보양해서 나머지가 있다(축적하였다). (或聚畜委積, ?養有餘)”고 하였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전통 불교와는 상충되는 것이지만, 위의 내용을 축약해 보면 당시의 일부 승려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수행을 병행한 것 같다. 다만 “진실로 마땅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誠非所宜, 事不得)”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에 종사했던 승려들은 사미니와 하층 승려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도신에 대한 약간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수나라 개황15년(595)에 황제의 모친이 불치의 병에 걸렸는데, 백약이 무효하였다. 황제는 모친의 병을 낳게 하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 명령을 내려서 방을 붙이게 했다. “만약에 황제 모친의 병을 고쳐준다면 삼급(三級)에 해당하는 관직을 줄 것이며 상금도 은 만냥(萬兩)을 주겠다”고 했다. 당시 도신은 황제가 내린 방을 보게 되었다. 도신은 곧 본인이 살고 있는 근처의 산에서 오가피, 전삼칠(田三七) 등의 약재를 구해서, 인편으로 성에 보내서 황태후의 병을 낳게 해 주었다. 그 후 황제는 도신을 국사에 봉하려 하자 도신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는 원래대로 수행을 하였고 황궁에도 가지 않고, 큰 상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황제는 친히 도신에게 대의조사(大醫祖師)라고 봉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신의 별칭을 대의조사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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