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라이벌에게 존경 담아 쓰다

설두 봉기가 1845년 8월 21일 초의 스님에게 보낸 편지〈사진 왼쪽〉와 1869년 2월 16일 준 대사에게 보낸 편지〈사진 오른쪽〉. 설두 봉기는 초의와 선리 논쟁을 벌였던 백파의 제자로 논쟁 당시 백파를 옹호했다. 논쟁 라이벌이었지만, 논쟁 후에는 존경의 마음을 담은 정중한 언사의 편지를 보내 초의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높은 인격을 보여줬다.

조선 후기 승려 설두 봉기(雪竇奉琪, 1824∼1889)는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의 제자이다. 초의와 백파의 선리 논쟁에 참여하여 〈선원소류(禪源遡流)〉를 지었으니 이는 스승 백파의 〈선문수경〉을 비판한 초의와 홍기 등의 주장을 반박하고 백파의 선리를 옹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초의의 선리 입장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그가 초의에게 정중한 문안 편지와 부채를 보냈던 정황은 1845년 8월 21일에 쓴 편지에서 드러난다.

백파 제자였던 설두 봉기 스님
초의·백파 禪 논쟁서 백파 옹호
논쟁 후엔 정중한 서간을 보내
초의 스님의 그간 안위 묻기도

준 대사 편지엔 향·종이 동봉해
당시 향·종이는 주요 봉물일 듯


그의 편지 규모를 살펴보니 편지의 크기는 25.1×39.5cm로 행서체로 썼고 진한 먹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편지의 피봉은 망실된 채 편지만이 전해진다. 특히 편지의 보관을 위해 편지에 기름을 도포했던 흔적과 제법 두꺼운 재질의 한지를 사용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뿐 아니라 초의에게 부채를 보내면서 부채를 납월선자(臘月扇子)라 칭한 점이 이채롭다. 아마 그의 뜻은 무더운 여름을 지낼 초의를 위해 납월(12월)의 차디찬 바람을 선사할 부채를 보내려는 그의 성의가 담뿍 담긴 선물이리라. 비록 치열한 논쟁을 개진했던 사이일지라도 논쟁은 논쟁으로 끝내고 서로를 아끼는 성의가 다한다는 점이다.

수행의 넉넉함을 보인 설두! 과연 그는 어떤 수행자였던 것일까. 그의 생애를 살펴보자. 우선 설두는 그의 자(字)이다. 초명(初名)은 봉기(奉琪), 유형(有炯)은 그의 호이다. 전라도 옥과현(玉果縣, 현 전남 곡성) 출신으로, 유년기에 서숙(書塾)에서 유가서(儒家書)를 섭렵했고, 19살 되던 해에 백암산 지장암(地藏庵)에서 쾌일(快逸)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도암(道巖)을 계사로 삼았고 조계산 한성 강백(翰醒講伯)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한성에게 구족계를 받은 뒤 여러 대덕을 찾아 교학을 문답하였다. 이후 백파에게 나아가 〈화엄경〉을 배웠다. 28세에 백파의 강석(講席)을 이어받아 화엄강주가 되어 20여 년 동안 학인을 가르쳤다고 한다.

1870년에 그가 퇴락하여 빈터로 남아있던 불갑사(佛岬寺)로 자리를 옮겨, 불갑사를 중창하였다. 그가 양주 천마산에서 〈선문염송(禪門拈頌)〉강회를 베풀었는데 〈선원소류〉와 〈염송회편(拈頌會編)〉은 이곳에서 저술했다. 그 해가 1889년경이다. 이 해 구암사로 돌아와 입적했다.

그의 제자로는 처명(處明, 1858~1903), 호정(鎬政), 만익(萬益) 등이 있으며 서관(瑞寬), 태선(太先)과 함께 화엄의 삼대 강백으로 손꼽힌다. 〈선원소류〉와 〈설두시집〉은 그가 남긴 저술들이다. 따라서 그는 백파의 선리를 이었고 화엄학의 근기를 이어 받았던 조선 후기 대표적인 승려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가 백파의 선의 입장을 옹호하고 초의를 비판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선리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입장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그와 초의가 지속적인 인연관계를 이어가고 있었음은 바로 그의 편지에서 알 수 있는데, 그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 슬픔이 큽니다. 이 때에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만 가을 일이 점차 긴박해져갑니다. 사주의 문후는 연일 만강하신지요. 향하는 마음이 구구하여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소승은 겨우 의지하고 있습니다만 가난한 암자에는 불행하게도 갑자기 명진사주(明眞師主)의 상을 입어 일이 많고 분주합니다. 민망함을 어찌합니까. 봄 제사에 나아가 문후를 살피고자하여 이로서 편지에 가득 정회(情懷)를 늘어놓습니다. 공교롭게 사주께서 다른 곳에 출타하게 되시면 다만 시자의 편지를 얻어도 조금이나마 멀리 있는 사람의 정회에 위안이 될 것이니 기대에 어긋나지는 않겠지요. 여기에 다시 정의(情意)를 말씀드리니 회답하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1845년 8월 21일  소승 설두 봉기 배상
부채 하나를 삼가 올리니 이는 납월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날씨가 고루지 않습니다. 웃으며 받기를 기다리니 어떨지요. 

久阻多?謹未審此時秋事漸緊 師主法候 連爲萬康 伏區區 不任下?小僧 身僅姑依 而鄙庵不幸 奄遭明眞師主之喪 事多紛擾 悶悶 奈何 就控春享欲爲探候 以?滿幅情懷矣 巧値師主出他之時 但得令佐之書 稍慰遠懷 而不無齟齬 玆以更伸情旨 以爲回示 如何 餘不備 伏惟
 己巳 八月 二十一日 小僧 雪竇 奉琪 拜上
扇子一柄伏呈 此所謂臘月扇子 然寒暄不常 笑領以待 如何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편지는 1845년에 초의에게 보낸 설두의 편지 내용이다. 이 무렵 설두가 지장암에서 쾌일을 은사로 출가한 이듬해 즈음일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므로 1845년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설두가 지장암 쾌일의 문하에 있을 때 보낸 셈이다. 특히 백파는 편양 언기의 문손이므로 설두 또한 편양 문손이다. 따라서 초의와 백파, 그리고 설두 또한 모두 편양의 문손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내왕은 그리 낯선 일은 아닌 것이다. 특히 설두가 초의를 사주(師主)라고 표현한 점에서도 이런 문파의 인연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인 것이다.

아무튼 그가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 슬픔이 큽니다”라고 한 점이나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만 가을 일이 점차 긴박해져갑니다”라고 한 말에서도 이들의 교류 관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 그가 “가을일이 점차 긴박해져갑니다”라고 한 내용이 무슨 일인지를 알 수 없다. 다만 “가난한 암자에는 불행하게도 갑자기 명진사주(明眞師主)의 상을 입어 일이 많고 분주합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그가 긴박하다고 말한 전후의 내용을 추정할 뿐이다.

한편, 이 무렵 지장암의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어려웠음도 드러난다. 조선 후기 사찰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으로 등촉계(燈燭契), 창호계(窓戶契) 등을 구성하여 보사(補寺)하였다. 경제적으로나 하위의 신분으로 전락했던 승려들이 사찰을 유지하기 위한 대안적인 성격의 보사 제도는 불심이 충만했던 시대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다시 그의 편지를 살펴보니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 연유를 “봄 제사에 나아가 문후를 살피고자하여 이로서 편지에 가득 정회(情懷)를 늘어놓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언급한 봄 제사는 임진왜란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서산 휴정(西山休靜)과 사명당 유정(泗溟堂惟政), 뇌묵당 처영(雷默堂處英)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 후기에도 표충사에서 거행되는 제사, 즉 춘향(春享)와 추향(秋享)은 대흥사에서 거행된 중요한 제사의 하나이다. 정조 12년(1788)에 서산과 사명당, 뇌묵당을 기리는 사당이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표충사는 임금의 친필이 하사된 사액 사당이다. 그런데 그가 봄 제사를 참여하려고 하며 이때 초의를 뵙고자한 것이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성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중한 언사로 초의의 안위를 걱정했던 설두의 온화함이 행간마다 묻어난다.

또 다른 설두의 편지를 살펴보자. 이는 1869년에 준 대사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그러나 준 대사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편지는 1869년경 설두의 근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편지의 크기는  23.4×39.5cm이며 피봉도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자료이다. 그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년 가을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는데,  소식이 없음을 책망하는 줄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산과 물이 높고 넓어서 소식을 전하기 어렵다는 정황은 사실일 듯합니다. 그러나 환하게 등잔의 심지를 돋우면 중앙이 밝으니 이것을 어찌 산수가 막고 끊을 수 있겠습니까. 소식을 듣지 못한 채 해가 바뀌었고, 달은 또 북두(北斗)의 자루가 인시(寅時)에서 묘시(卯時)로 돌아갔습니다. 묘시에는 모든 맛이 달고 뿌리와 줄기도 다 달게 되는 경지에 이릅니다. 은로(恩老)의 문후는 한결같이 청후하시길 빕니다. 아울러 그리운 마음이 지극하고 간절함을 어찌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저는(門末) 정신과 힘이 날로 더 떨어져서 마음공부는 초심의 약속을 저버렸으니 스스로 민망해짐을 어찌해야합니까. 다만 제가 맡은 일을 잡고 있을 뿐입니다. 귀 산문의 여러분들이 매우 저를 기다리시니 제가 부덕하여 실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또한 자산을 탕패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거늘, 이런 말을 누구에게 말하겠습니까. 그대는 응당 알아야할 것입니다. 향(香) 한 봉지와 두루마리 종이 한 축을 보냅니다. 향은 즉 삼가 은사에게 올리는 것이고 다른 물건은 변변치는 못한 것이지만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머지는 입을 떼지 않겠습니다. 예의를 다 들어내지 못했습니다.
1869년 2월  16일  문말  봉기 재배하고 올립니다.

昨秋有書無答 非不知責其無信 山水高? 魚?難通 勢實然矣 而一炷 不昧于中 此豈山水之所能隔絶哉 未審信後歲改 月又斗柄 自寅旋卯 卯俱做味啖到 根?俱甛之地 恩老法候 一向淸淳 倂仰不任至切 門末 精力日益層落 心工浪負初心 自悶奈何 第控鄙之主管任事 貴山僉尊 待余之深 而余以不德 實?其位 又資産蕩敗之餘 難堪其事 則此言向誰言之 君應知之矣 香一封 周紙一送送似 香則謹呈于恩老座下焉 物惟菲薄 出於情感耳 餘在去口 不宣狀禮
己巳 二月 十六日 門末 奉琪  拜

설두의 편지에 “소식을 듣지 못한 채 해가 바뀌었고, 달은 또 북두의 자루가 인시에서 묘시로 돌아갔습니다. 묘시에는 모든 맛이 달고 뿌리와 줄기도 다 달게 되는 경지에 이릅니다”라 하였다. 인시는 오전 3시 30분에서 4시 30분까지이며, 묘시는 오전 5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새벽에 일어나 참선의 일경에 들었던 그는 모든 맛이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벽 참선의 묘미를 맛본 걸일까. 아무튼 늙어가는 설두를 준 대사 문중에서 부른 듯, 하지만 그는 “제가 부덕하여 실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부끄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준 대사에게 “향 한 봉지와 두루마리 종이 한 축을 보냅니다. 향은 즉 삼가 은사에게 올리는 것이고 다른 물건은 변변치는 못한 것이지만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수행자들이 봉물(奉物)은 향과 종이가 주류였던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 보낸 선물, 즉 준 대사에게 보낸 향과 종이는 승가의 요긴한 물품이다. 그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나 준 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느껴지는 정회(情懷)는 겸손과 온화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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