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 스님 특별초청 토크콘서트...일미 스님 미국 예일대 한국학 교수

주제 : 청춘들을 위한 희망 만들기  

소확행(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란 용어가 핫이슈이다. 젊은 청춘을 위한 확실한 행복을 제시하는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부산 미타선원은 5월 29일 미국 예일대 교수 일미 스님을 특별 초청해 경내 법당에서 토크콘서트를 개최했다. 일미 스님은 “청춘의 시기는 가치관이 흔들리고 힘의 논리를 알게 되는 시간이다”며 “‘미국 내 유명 학자 및 교수들은 행복을 위해선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그 가치를 높이며 명상을 통해 지혜를 얻어라’고 충고한다”고 강조했다.

일미 스님은… 19세에 출가 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교 라이샤워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아리조나대 교수, 듀크대 종교학과 및 동양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예일대학교 한국학 교수이다. 

세계인의 주된 관심사는 행복
인간관계의 질로 행복 결정돼
고통을 받아들이고 명상해야

 

행복은 모든 이의 바람
예일대에 루이 상토스라는 교수님이 과목을 개설했습니다. 예일대 학생 3분의 1인, 1천 300여명이 들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끌었어요. ‘행복한 삶을 어떻게 살 것 인가?’가 주제였어요. 다들 행복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삶이 너무 힘드니까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과 맞지 않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미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10년 혹은 20년에 비해 300배입니다. 현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니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요. 현실 가운데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목표를 정해 이루고 성공을 해도 그 방법으로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목표를 정하고 노력을 해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방법을 알지 못해 여전히 버릇처럼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죠.

기본적으로 젊은이들 80%가 행복의 중요한 요건은 돈이라고 답을 합니다. 이 현실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50%는 유능해지는 것이 행복의 요건이라 생각합니다. 이 대학생들을 어떻게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지 교수들의 고민이 많습니다. 여기에 더해 또 하나 비극적인 것은 가치관에 혼돈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대학에 오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 내 대학교에 입학을 하면 55%를 빼곤 외국인이 입학을 합니다. 거기에 33%는 인도, 중국, 대만, 한국 등 동남아 학생들이 입학을 합니다. 새로운 가치관을 만나 혼란이 오는데 미국인 학생들은 대부분 기독교 세계관으로 하나님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 다른 종교는 따르지 않고 살아갑니다. 절대적 가치와 진리로 삼았던 기독교 세계관이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들을 만나면서 서로 부딪혀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 30명은 기독교, 30명은 힌두교, 30명은 가톨릭, 또 무신론자까지 포함해 모두 자신의 종교와 이념이 진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마치 현대 사회를 축소해 놓은 듯 자신의 종교가 최고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만 최고라 생각하면 그 교실에 평화가 올 수 있겠습니까?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진리가 다 맞든지 아니면 다 틀리든지 두 가지 뿐입니다. 다 맞을 순 없습니다. 모순투성이입니다.

절대적인 진리에 의문이 생깁니다. 논리적으로 비판을 하고 연구를 하면 할수록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문화나 정치, 종교, 철학 등 많은 부문의 교수들은 힘의 논리로 이뤄진 비합리적이고 잔인한 역사와 마주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동안 미국은 100년 넘게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노예로 삼았죠. 여전히 미국 내 사회에서 흑인은 차별 받고 있습니다. 힘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건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흑인인 오바마가 대통령이던 당시 한 흑인에게 물어봤습니다.“흑인 대통령 이후 인종 문제가 해소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질문하자 그 흑인은 “자신의 몸을 향해 죽은 송장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백인들은 흑인을 사람으로 안 보며 짐승이라 여기고, 겉으론 받아들인 척 하지만 몇 백 년 인종 편견과 힘 그리고 권력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흑인과 말싸움을 하다가 총을 쏴 죽여 버립니다. 그리곤 여전히 짐승하나를 벌한 것 정도로 취급합니다.

대학생들은 힘의 모순과 편견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다가도 힘의 논리에 맞춰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합니다. 어쩔 수 없이 경제와 힘에 맞춘 논리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요? 보살님들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거울 앞에 앉아 치장하고 꾸미셨습니까? 예쁘게 자신을 포장해 세상에 내 놓기 위해 고민을 합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이뤄지는 힘의 논리 앞에서 우리의 바른 정체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대학생들 자신의 정체성이 압도적인 힘의 논리로 이뤄짐을 알고 절망스러워 합니다. 종교도 힘의 논리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슬람, 개신교, 무신론, 무속 등 여러 학생들을 모아서 수업을 하면 종교의 모순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미국 내 유명한 씨엠 암스트롱 종교 철학과 교수는 “종교에서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구원을 말하는데 비판적으로 말해서 절대적 진리와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사랑과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고 사는 삶과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며 비관 속에서 사는 삶 중에 무엇이 나을까요? 사실 첫 번째가 마음이 편하고 두 번째는 불안합니다. 대학에서는 두 번째 현실, 절대적인 것은 없음을 직시하고 알고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고통 속의 삶 받아들이기
교수님은 두 번째 진실을 받아들이라며 이것이 대학에서 우리가 배우는 삶이며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루이 상토스 교수를 비롯해 종교의 모순을 아는 학자들은 종교 밖에서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행복한 삶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종교를 떠나 모두가 이해 할 수 있는 행복에 이르는 조건을 연구하기 위해 하버드에서는 사람의 성장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설립해 지금까지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구는 1938년에 시작해 80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1938년 당시 2학년 가운데 246명의 학생을 선택해 피를 뽑고 심장박동수를 체크하고 주변 환경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매년 마다 그들의 삶을 확인하고 기록했습니다. 지금 현재 19명이 살아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성공한 기업가부터 변호사, 알콜 중독으로 패가망신한 사람까지. 연구결과는 돈과 명예가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행복한 삶의 결과는 인간관계의 질로 결정됐습니다. 그리고 삶에 가장 치명적인 독은 외로움이었습니다. 외로움에 빠지면 뇌가 손상되고 치매에 걸리며 기억력이 감퇴됐습니다. 매일 싸우는 부부라 할지라도 함께 있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은 병에 걸려도, 아프다고 할지라도 행복해 한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불교적으로 그럼 어떻게 이런 고민에 동참해야 할까요? 불교는 고(苦)에서 시작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힘과 권력에 의해 내 삶이 좌우됩니다. 관계 속에서 나를 고민하며 나를 만들어 가는 삶에서, 우리는 정말 잠깐 이 세상에 왔다가 떠나는 삶이란 것을 받아들이고 알아야 합니다.

루이 상토스 교수도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도 결론적으로 인간관계의 질을 높이라고 충고합니다. 인간관계를 위해 전화나 인터넷 말고 사람을 직접 만나고 소통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충고로 명상을 강조했습니다.

또 다른 교수 가운데 죠셉 오셉튼은 “마음이 괴로운데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일단 앉아서 5분 만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힘과 논리에 지배 받아온 마음은 버릇이 돼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날뜁니다.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보고 틀린 가치관에서 벗어나 자유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질과 명상, 이 두 가지가 미국의 유명 교수 및 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자비로움으로 주변인을 행복하게
여러분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주변 다섯 명을 꼽아 공통분모를 확인하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과 가까운 다섯 명의 삶의 질은 여러분의 영향력으로 높일 수도 있고 낮출 수도 있습니다. 그럼 주변인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면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종착역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사실을, 죽음이 있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명상 할 때, 가까운 사람을 비롯해 만나는 모든 이가 나처럼 어려움을 겪는 존재임을 알고 마음 속 깊이 자비심이 생깁니다. 근원적인 이해는 자비심의 바탕이 됩니다. 자신이 언제든 죽음으로 떠날 수 있음을 알고 상대를 보는 사람은 이 순간의 중요성을 압니다.


지금 까지 내용을 정리하자면 미국 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가 최고라고 합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진리를 말하지만 통합해서 크게 보면, 인간의 삶은 고통과 불만족 속에 죽음이 정해진 인생에 불과합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자비심은 여기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 시바신, 하나님이란 절대 존재는 인류가 고통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유한한 삶을 해결하고자 만들어 낸 도구에 불과합니다.

있는 그대로 고통을 받아들이고 인간관계의 질을 높여야 행복의 열쇠를 쥐게 됩니다. 주변인들과 행복한 삶을 꾸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길러온 수많은 습관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으로는 화를 내거나 다시는 안 본다며 무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방법을 알아차리고 하나씩 제거 하며 좋은 방법을 길러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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