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을 성보들]10. 구례 화엄사·암자의 도난 성보
[다시 찾을 성보들]10. 구례 화엄사·암자의 도난 성보
  • 최선일 문화재청 감정위원, 홍은미 옥천사 학예실장
  • 승인 2018.06.04 1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굴곡진 근현대사서, 도난으로 고통받다
왼쪽부터 도난된 구례 화엄사 지장보살도, 화엄사 시왕도, 화엄사 산내 암자 지장암 목조보살좌상.
왼쪽부터 도난된 구례 화엄사 지장보살도, 화엄사 시왕도, 화엄사 산내 암자 지장암 목조보살좌상.

개별 사찰에서 유출된 성보문화재를 조사하는 첫 단계는 여러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재산대장을 수집하는 일이다. 이 작업은 한국전쟁 이전에 사찰 소장 성보문화재의 현황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서, 작성 시기가 다른 여러 본이 남아있어 선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유물의 소유 현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활동한 사람들의 자서전 등을 통해서 관련 내용까지 정리된다면 당시의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구례 화엄사 전쟁 피해 없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도굴범 인해 몸살
현대에 와서도 지장보살도 등 도난
성보 파악 위한 연구·관심 절실해


구례 화엄사는 여순사건이나 한국전쟁의 포화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사찰이다. 이는 몇 사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차일혁 총경의 자서전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기록, 또 하나의 전쟁〉에 따르면 “최영희 8사단장 주재로,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 이하 참모들과 경찰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군경합동작전을 위한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공비들의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이나 암자를 소각하라는 지시와 함께 고찰 화엄사에 대한 소각지시가 하달되었다”라고 적었다.

이때 차일혁 총경과 방득윤 대대장은 화엄사 전각의 문짝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상부의 명령인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해놓았다. 이처럼 문화재를 살리려는 몇 사람의 노력이 없었다면 화엄사는 구례 연곡사, 장성 백양사. 정읍 내장사 등과 함께 전쟁 중에 소실되었을지도 모른다.

구례 화엄사는 연기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 내려온다. 1978년에 신라 경덕왕 대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이 발견되면서 이 책의 발문에 황룡사(皇龍寺)의 연기 스님이 발원하여 754년(경덕왕13)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화엄경〉 사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화엄사의 창건이 경덕왕(재위 742~765) 때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엄사는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다. 고려 광종대 홍경선사(洪慶禪師)와 인종대 정인왕사(定仁王師)가 사찰을 중수하였다.

이후 화엄사는 1424년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1630년에 각성(覺性) 스님이 사찰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이 건립되었다. 마침내 1649년에는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1702년에 성능(性能) 스님이 장륙전을 중건하고, 숙종이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점차 격을 높였다. 이후 1757년에 대웅전과 1769년에 각황전을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재산대장에 의하면 화엄사 유물은 110건 616점(석경 약 1천점, 신장경 334점 제외)이다. 이렇게 많았던 재산대장 유물 가운데 일부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의 전각과 다수의 성보문화재가 남아있는 소중한 사찰이다.

이 사찰에 관련된 재산대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동국대학교 도서관 복사본, 조선총독부 관보본이 남아있는데, 품목과 크기 등이 달라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 현존하는 유물은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부터 사찰성보의 도난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32년 6월 8일 동아일보 기사 중에 “전남 구례에 있는 조선 고절로 굴지하는 화엄사 법당에 있는 6백여 원 가량 되는 불체를 지난 3일 오전 2시경에 절취를 당하였다는데 당지 구례경찰서에서는 범인 체포에 노력하여 오던 중 지난 5일 오전 11시경에 구례읍에서 1인을 체포하고 또 2인은 순천군 황전면에서 체포하였다(하략)”라는 기사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외에도 여러 도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75년 11월 22일 경향신문에 “특히 전남 구례 화엄사에 있는 지방문화재 23호 금잔과 충남 지방문화재 2호 송영달 씨 소장의 송자대전각판을 도난당한 사실이 이번 조사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개탄할만한 일이다”라는 기사를 보면 사찰 문화재의 지속적인 도난과 유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2016년 발간한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에는 화엄사 지장보살도와 시왕도(1862년 作, 2001.12.28), 목조금강역사상과 목조판관상(1998.8.8), 경갑과 어작(御爵, 도난 시점 미상)이 실려있고, 산내암자인 지장암 목조보살좌상이 도난 신고됐다.

1988년 7월 14일에 사찰에서 도난당한 지장보살도와 시왕도의 기존에 조사된 화기를 참조하면 “同治元年聖上卽位十四年壬戌十一月日全羅左좦道求禮華嚴寺冥府殿證明좦畵像新造成仍奉安 奉爲 … 金魚秩좦 片手 海雲堂益贊좦豊谷堂德麟좦片手 月虛堂俊彦좦海冥堂山水좦春潭堂奉圓宗좦 妙華좦壯植좦昶學좦德順좦守文좦正官좦和如安좦就賢좦仁祐좦華演좦…”으로 1862년 11월에 해운당 익찬, 풍곡당 덕린, 월허당 준언, 해명당 산수 등의 불화승 17명이 조성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재산대장 3건 중에 1932년 11월 30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소장품 목록과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재산대장에는 지장화상(地藏畵像) 1점(장 8척, 폭 6척5촌)과 시왕화상(十王畵像) 2점(장 7천5촌, 폭 6척7촌)으로 적혀 있어 쌍을 이루는 시왕도가 두 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보살도는 지장보살삼존상을 중심으로 8대보살을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화면상단 지장보살의 두광 양쪽으로 동자가 두 명씩 그려진 구도의 작품이다. 지장보살은 높은 대좌에 결가부좌한 자세이고, 스님과 같이 머리는 민머리에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취하고 있다.

설채법은 적색, 군청, 녹색이 주조색이고, 지장보살과 육광보살은 황색조의 안료로 칠을 하였지만,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백색으로 안면을 칠하였다. 시왕도는 2폭 형식으로 10명의 왕을 5명씩 그려 두 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현재 도난 신고된 시왕도는 짝수 대왕이 그려진 불화이고, 홀수 대왕이 그려진 시왕도는 오래 전에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시왕도는 화면을 2등분하여 상단과 하단이 절반씩 차지하고, 상단의 시왕 부분은 각 시왕과 책상 주위 권속들로 빽빽하게 그려져 있어 복잡한 도상을 이루고 있다. 적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주황, 청색, 백록이 쓰였다. 하단 지옥 상면은 상단처럼 각 시왕의 해당 지옥을 구름으로 구획지어 2단으로 만들어 각 지옥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이 불화를 그린 해운익찬(海雲益贊)은 수화승으로 19세기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이다. 익찬스님은 18세기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의겸(義謙)에 의해 확립된 전통적인 불화양식을 계승하면서 19세기 금암천여(錦巖天如)·원담내원(圓潭乃圓)과 함께 전라도의 불교회화 화단을 이끈 대표적인 화승이다. 그는 주로 1830~186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광주 원효사의 화원승 풍계(楓溪)의 제자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원효사의 승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원과 천여 등 당시 전라도의 대표적인 화승들과 함께 전라도 일대의 많은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현재 30여 점의 작품이 남아있으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821년 ‘아미타불도’이며 가장 늦은 시기의 작품으로는 1862년 화엄사 명부전 ‘시왕도’가 알려져 있다. 따라서 화엄사 지장보살도와 시왕도는 작품성뿐만 아니라 19세기 중반 불교회화사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화엄사 산내안자인 지장암에서 2006년 7월 4일에 도난당한 목조보살좌상은 얼굴을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염문(火焰文)과 화문(花文)으로 장식된 커다란 보관을 쓰고 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각이 진 방형(方形)으로 눈꼬리는 약간 위로 올라가 있고, 코는 곧게 뻗은 삼각형이며, 작은 입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머리카락은 귀고리를 단 귓불 위를 지나 양쪽 어깨에서 팔뚝까지 길게 보주형(寶珠形)이 겹친 형태로 늘어져 있다. 따로 제작된 양손 가운데 왼손은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맞댄 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가락에 정병을 끈으로 묶어놓았다. 대의자락은 오른쪽 어깨에 완만하게 접혀 늘어지면서 팔꿈치와 배 부분을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대의자락과 배 부분에서 U자형으로 겹쳐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은 배 부분에서 수직으로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걸친 승각기(僧脚崎)는 사선으로 접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이와 유사한 보살상이 1612년에 부휴선수(浮休善修)와 벽암각성(碧巖覺性)의 공덕(功德)으로 화원(畵員) 현진(玄眞), 명은(明隱)이 제작한 경상남도 함양군 상련대 목조보살좌상이다. 화엄사 지장암목조보살좌상도 1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1998년 8월 8일 목조금강역사상과 목조판관상과 도난 시점 미상인 경갑과 어작 등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유물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에서도 현대불교
뉴스를 받아보세요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