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물 독촉 하소연… 팍팍한 조선 승려의 삶

지봉 우기가 초의 스님에게 보낸 편지들. 사진 왼쪽이 1860년 7월, 오른쪽이 1860년 4월에 보낸 편지다. 특히 7월에 보낸 편지에는 대흥사가 내전에 바칠 동백기름의 양이 너무 과다해 이 같은 폐해가 얼마나 컷음을 알 수 있다.

1860년 4월 4일 우기(祐祈)는 초의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이 해 7월에도 거듭 편지를 보낸다. 당시 그는 대원암(大圓庵)에 머물렀는데 이 절은 아마 안암동에 위치한 절이라 여겨진다. 그의 법호 지봉(智峯)이다. 1860년 4월의 편지에는 교동대감에게 사중에 일을 부탁하는 내용이 보인다. 아마 교동대신은 당시 권문세가였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아들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일 것으로 추정된다. 두 차례 보낸 그의 편지를 차례로 살펴보자. 먼저 1860년 4월의 편지이다. 크기는 30.4×45.5cm이며 피봉엔 ‘대원암 소승 우기가 올립니다’라고 썼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 녹음이 울창한 이때에 노스님께서는 두루 편안하시지요. 멀리에서 사모하는 마음,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소승의 모습은 예전과 같아 다행입니다. 앙달仰達하여 아룁니다. 본사에서 거론한 일은 올 봄, 능에 행차하실 때 성심으로 말씀을 올렸습니다. 도령(都令)은 주문(奏文)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뜻대로 이뤄지지 못할 것이니 삼가 민망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동대신(校洞大臣)에게 요행히 연유를 말씀드린다면 바라는 대로 될 듯도 합니다. 그러므로 일을 마무리 짓도록 연구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암암리에 마음으로 축원할 뿐입니다. 마침 가는 인편이 있어 이에 대략을 말씀드리니 삼가 이와 같이 말씀드리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올리지 못했습니다. 만안 진중하시길 엎드려 기원합니다. 삼가 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1860년 4월 4일 소승  우기 삼가 올립니다.
謹伏未審 是辰綠陰 大法氣體候 循序康寧乎 遠伏慕不任之地 小僧色四依前 伏幸 仰達就白 本寺擧論事 今春陵幸時 誠心上言矣 都令不得入啓 故未遂如意 伏悶 然方今校洞大臣 幸告緣由 則似爲如願 然究竟事如何 暗心至祝耳 適有往便 玆以?舌謹告如是 諒會焉 餘未拜前 萬安珍重 伏望 謹不備 伏惟  庚 四月 初四日 小僧 祐祈 謹拜

당시 본사 대흥사에서 거론한 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중에 긴요한 일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초의에게 “그러나 지금 교동대신(校洞大臣)에게 요행히 연유를 말씀드린다면 바라는 대로 될 듯도 합니다. 그러므로 일을 마무리 짓도록 연구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그가 말한 교동대신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일 것이라 여겨진다.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좌근은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안동김씨의 중심인물이었다,

안암동 대원암 주석한 우기 스님
1860년 4·7월 초의에 편지 보내
사중 문제에 도움 부탁들 담겨져
공명첩 불만… 폐단 확인된 사료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초의는 1830년경부터 김조순이나 그의 아들 김유근과 교유했고 추사와도 막역했던 사이였다. 그러므로 우기의 생각으론 초의가 이러한 사중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인맥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우기가 부탁했던 일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사중의 어려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초의의 역할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이 눈이 띤다.

한편 우기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대흥사와 어떤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이를 위해 그의 생애를 살펴보지만 그의 생몰연대를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대흥사 승려로, 법호는 지봉(智峯)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삼각산 도선사로 출가하여 인파(仁坡)의 제자가 되었고, 효인(孝仁)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표충사(表忠寺)와 적멸궁(寂滅宮)의 총섭을 역임하였다. 표충사를 중수한 공로로 전라도관찰사로부터 도감동차첩(都監董差帖)을 받았다. 이후 1845년 안암산(安岩山) 기슭의 개운사(開運寺)에 대원암(大圓庵)을 창건하였다. 절에서 지낼 때 물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 보시를 하였는데, 어느 날 흥선 대원군이 그 물을 얻어 마시고 참서 직(參書職)을 주었으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다. 얼마 뒤 흥선 대원군이 다시 물을 얻어 마시고 판서 직을 내렸으므로, 이후로 사람들이 그를 지봉판서(智峯判書)라 불렀다고 한다. 제자로는 운구(雲句)가 있다. 바로 그가 표충사 총섭을 역임했고 도감동차첩(都監董差帖)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대흥사와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그가 머물던 대원암은 원래 무학대사가 안암산 기슭에 세운 절, 영도사(永導寺)와 관련이 있다. 1779년 홍빈(洪嬪)의 묘 명인원(明仁園)이 절 곁에 들어서자, 인파(仁坡)가 절을 동쪽으로 2마장쯤 되는 곳으로 옮겨 짓고 개운사라 하였다. 1845년 우기가 대원암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근대의 고승 정호(鼎鎬)가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 지도자를 길러냈다.
한편, 그가 1860년 7월에 보낸 편지에는 내전에 동백기름을 진상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지금도 대흥사 동구엔 동백나무 군락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초의 당시에도 자생했던 동백나무인 셈이다. 특히 대흥사 동백기름은 진상품 중에 하나였던 셈이며 아마 운곡이 진상용 동백기름을 관리한 듯하다. 이 편지의 크기는 30.5×47.1cm이며 피봉엔 ‘한양 대원암 소승 우기가 삼가 문안하는 편지’라 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장마가 물러가고 서늘해집니다. 큰 스님께서 근심이 적어 맑으시다하니 멀리 위로됨을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소승은 최근 숙병으로 편안한 날이 얼마 되지 않아 민망하고 민망합니다. 다만 삼가 아룁니다만 이건移建하는 일을 관리하는 것은 다행히 공명첩이 200장이 내려 온다하더라도 매우 적은 것이나 한이 됩니다. 다른 지방에서 설계한 것을 따라 조심스럽게 계획했는데 일이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내년 봄에 완성하도록 계획할 수 있고, 즉 금년 가을에 여러 가지 들어갈 물종을 미리 갖추어야 완성할 수 있으니 임시로 군속(窘速)한 마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해당 처에 알리시고 본사에서 진상할 동백기름은 운곡사주와 상의한 이후에 자진하여 내전에 진상할 뜻이 잘 성사되시길 삼가 계획하니 이로서 통촉(洞燭)하십시오. 운곡(雲谷) 사주가 설령 예전에 한양으로 진상하는 것은 노고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더라도 지금 본영에 내려가는 것은 내려진 첩을 살펴 내려 보냈기 때문에 아직 내려가지 않은 것도 이것으로서 다시 살펴보심이 어떨지요. 나머지 여러 가지는 다른 날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1860년  7월 10일  소승 우기 삼가 올립니다.
謹伏惟 ?退凉生 大法體度 少惱淸凉 遠慰溯區區不任之至 小僧近以宿? 寧日無多 伏悶伏悶 第恐白 所管移建事 幸爲空名帖二百張到下 可恨?少 從設他方伏計 而事旣如是 來春成造可計 則今秋成造所入許多物種預備 以免臨時窘速之意 仰告知委於該掌處 而本寺所納進上栢油段 與雲谷師主相議 自後自納內殿之意 成事伏計 以此洞燭 雲谷師主 雖云京中勞苦極多 今方下去本營 以察下去帖事故 姑未下去 以此亦燭如何 餘萬都付日後奉話時 姑不備 伏惟  庚申 七月 初十日 小僧 祐祈 謹拜上

이 편지는 대흥사의 보수를 위해 공명첩이 내려온 내용이 보인다. 그가 ‘이건(移建)하는 일을 관리하는 것은 다행히 공명첩이 200장이 내려 온다하더라도 매우 적은 것이나 한이 됩니다. 다른 지방에서 설계한 것을 따라 조심스럽게 계획했는데 일이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마 대흥사에 내려온 공명첩은 사찰을 중수하기 위한 비용으로 받은 공명첩일 것이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공명첩이란 무엇일까. 이는 일종의 백지 임명장이다. 임란 중에 생긴 제도인데 군공을 세운 사람이나 납속(納粟: 흉년이나 전란 때에 국가에 곡식을 바침)사람들에게 그 대가로 준 임명장이었다. 공명첩의 종류는 관직, 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이 있고 양역(良役)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空名免役帖)이 있다.

그리고 천인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空名免賤帖)과 향리에게 향리의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空名免鄕帖) 등이 있다. 그러나 후일 이 공명첩은 국가의 재정이나 군량이 부족할 때나 진휼(賑恤: 흉년으로 곤궁에 처한 백성을 도와 줌)을 위해 발급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사찰을 중수하는 비용을 얻기 위해 남발하였는데 관리 소홀로 위조나 남수(濫授: 법에 지나치게 벗어나서 남발)하는 등, 그 폐단이 컸던 제도이다.

한편 우기의 편지에 “본사에서 진상할 동백기름은 운곡 사주와 상의한 이후에 자진하여 내전에 진상할 뜻이 잘 성사되시길 삼가 계획하니 이로서 통촉(洞燭)하십시오”라고 하는 내용이 보인다.
대흥사에서 내전에 올릴 동백기름의 진상을 독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흥사에서 받칠 동백기름의 양이 너무 과중하여 “운곡(雲谷) 사주가 설령 예전에 한양으로 진상하는 것은 노고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더라도 지금 본영에 내려가는 것은 이미 내려진 첩을 살펴 내려 보냈기 때문에 아직 내려가지 않은 것도 이것으로서 다시 살펴보심이 어떨지요”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따라서 대흥사 사중에서는 사중에서 진상할 양을 조정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납의 양을 줄일 수 없었던 상황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기가 언급한 운곡(雲谷) 사주는 누구일까. 초의가 가록해 둔 〈다비계안〉을 살펴보니 그의 법명은 의준(宜俊)이라 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몰연대는 수록해 두지 않았다. 다만 이 편지에서 그가 대흥사 승려로 동백기름을 공납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아무튼 그의 편지는 대흥사에 부과된 동백기름의 양이 너무 과다하여 그 폐해가 얼마나 컸던가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