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을 흔히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고 한다. “교학에 의지하지 않고 곧바로 마음의 본성을 직관해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않고 손가락만 보고 달을 봤다고 하듯이, 내안의 부처를 외면한채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겉모양에 집착해 밖으로 허상을 찾아 해매는 중생들의 마음을 안으로 되돌려 깨침에 이르게 하는 것이 간화선 이 뭣고이다. 화두는 관()하는 것이지 견()하는 것이 아니다. 견은 육안과 업식으로 보는 것이고, 관은 심안으로 꿰뚫어 보는 것이다.

생멸심(生滅心)이나 진여심(眞如心)은 두 개로
나눠지지 않는 모두 한 마음인 중도이지만
양자는 서로 별개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생멸이면
진여가 아니고 진여이면 생멸이 없다

관은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생겨나는 것을 보며, 기울어진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도(中道)를 보는 것이며, 절대 평등을 보는 것이다. 이 단계가 지나면 이 뭣고의 이것이 바깥서 주인 자리로 환지본처 즉 회광반조(廻光返照)하게 된다.

초점을 무엇이 아닌 이것에 맞추어야 진정한 실상과 주인 자리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실천 수행이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듯이 마음을 찾는 내가 있고 찾는 대상이 따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고, ()와 객()이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는 그 말이 나오기 전, 조주 스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상태를 화두라고 한다. ‘뜰앞의 잣나무라는 소리가 나오기 이전 조사스님의 그 뜻이 화두인 것이다.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이 의정이고 의심이다. 화두는 그 뜻이 나와 벽이 허물어진 상태를 보여 준 것이니까, 내가 찾을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다. 찾으려 하는 자와 찾아야 할 대상을 둘로 나누면 그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것이 대체 무엇인고?

이 뭣고화두는 이런 회광반조를 발생시키는 발문이 된다. 본래 자기 성품인 고요함과 신령스런 앎인 공적영지(空寂靈智)를 한순간에 자각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

화두는 반조(返照)되어야 한다. 반조는 습기를 제거해 진여로서 영성을 체득하게 만든다. ‘이 뭣고할 때 하고 숨을 길게 내쉴 때 심안(心眼)으로 ()’를 비추어 보는데, 이것이 회광반조이다.

망상(妄想)의 눈으로 보면 보는 것이 상()을 따라 쫓아 가지만, 심안으로 관하게 되면 관 하는 사람은 사라져 버리고 진여불성(眞如佛性)만이 홀로 훤히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인 것이다. 그러나 내 안의 불성을 자각은 했지만 오랜 세월 익혀온 습기(習氣)를 단박에 없앨 수는 없기에,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을 꾸준히 하여 성스런 성태(聖胎)를 길러야 하는데 이것을 점수(漸修)라 한다. 이것을 보조국사는 회광반조로 설명한다.

기신론생멸심(生滅心)이나 진여심(眞如心)은 두 개로 나눠지지 않는 모두 한 마음(一心)인 중도이지만 양자는 서로 별개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생멸이면 진여가 아니고 진여이면 생멸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이 뭣고로 신령한 앎(반야지혜)를 증득하고, 생활속에서 바로 굴려쓰면 사업, 학업, 건강 등이 해주십시오하고 빌지 않아도 자동적(自動的)으로 성취(成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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