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심은 중생에 감동이다

부처님오신날이다. 불자들은 저마다의 등을 밝히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또다시 다짐하는 날이다. 그러나 불자들에게 다른 의미로 부처님오신날은 감동이다. 매년 찾아오는 부처님오신날, 출·재가자들의 가슴 속에 남은 최고의 부처님오신날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내겐 부처님 ‘오시는’ 날

변택주 작가의 '내 인생의 부처님오신날'

인생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부처님오신날은 바로 스승인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였습니다. 2003년 부처님오신날, 법정 스님은 대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부처님오신날이 오늘 하루로 그친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생일잔치를 하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모든 불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부처님이 오시도록 마음에 새겨 끊임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날에만 부처님이 오신다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스승은 이듬해에도, 2005년·2006년 부처님오신날에도 우리가 바로 부처로 피어나야 한다고 드잡이하셨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이 과거완료형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신 날’이라는 것은 이미 오셨다는 뜻입니다. ……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오신 날’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시는 날’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부처님은 신앙 대상이 아닙니다. 길을 가리키는 스승입니다. 그 가르침을 거쳐서 내 안의 불성을 일깨우고 꽃피워야 합니다. 따라서 불자들은 저마다 이 시대 부처 분신임을 자각하고 자신이 부처 화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삶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날마다 ‘오시는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승 법정 스님의 가르침
日新又日新 밑거름 작용해


그래서 날마다 부처님이 오시는 날을 만들게 하려고 스승이 잘 쓰는 인사말씀이 있습니다. “날마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시길 빕니다.” 날마다 거듭 부처님으로 나투라는 인사죠.

몇 해 전 겨울 몹시 추운 날 광주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길 용산역, KTX에서 내려 경의중앙선을 갈아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다 오른 다음 용산역에서 대기 시간 7분을 남겨놓은 채 문을 몇 개만 열어놓고 나머지 문이 닫혔어요. 웬일일까 싶었죠.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랐으나 곧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추울까봐 마음이 쓰인 기관사가 계단 앞에 있는 문만 열어놓고 나머지 문은 닫아버린 것이란 걸 알게 됐어요.

이때 스승께서 “슬기로움과 자비로 가득하여 세상에 빛으로 거듭나면 날마다 부처님이 오시는 날이 될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 나는 이 칼바람이 부는 날 전철에 오신 부처님을 뵌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승은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내 삶이 어땠을까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못해 끔찍하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스승이 이토록 간절하게 거듭거듭 말씀하신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를 곱씹으면서 허리를 곧추 세웁니다. 타성에 젖으면서도 ‘맑고 향기롭게’와 ‘붓다로 살자’에 몸담고 있는 것도 서툰 걸음이지만 ‘영세중립코리아’ 깃발을 들고 누리 곳곳에 ‘꼬마평화도서관’을 열려는 까닭도 다 부처님 오시는 날을 빚으려는 데 있답니다.
정리=윤호섭 기자

평등, 그리고 또 평등

꿈을이루는사람들 대표 진오 스님의 '내 인생의 부처님오신날'

 

부처님오신날에는 연등공양이 중요합니다. 글자를 풀면 ‘태울 연, 등잔 등’으로 ‘등불을 밝힌다’는 뜻인데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 빈자일등(貧者一燈) 이야기는 초파일마다 주요 법문 내용이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 우리 주변에는 보시를 하려해도 가진 게 없으니 미안한 마음으로 절을 찾아오는 가난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두 아이를 혼자 키우던 결혼이주여성이 특히 기억납니다.

베트남에서 시집 온 딩티응앗 씨는 한국인 남편이 사망한 뒤 유산 문제로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겼습니다. 시어머니는 5살과 4살 형제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라고 강요했습니다. 딩티응앗 씨는 돈은 필요 없으니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거의 내쫓기는 형편이었습니다.

2014년 빈 몸으로 구미 마하이주민센터를 찾아 온 그는 눈물범벅으로 담아두었던 섭섭한 감정을 표출했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 겁에 질린 듯 동그란 눈망울을 빛내던 두 아이의 모습은 4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베트남서 온 결혼이주여성
가정폭력서 벗어나기까지


딩티응앗 씨가 당했던 일은 가정폭력 범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쉼터에서 머무르며 상담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결혼 6년이 지났지만 베트남 국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적의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한부모가족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세상을 떠난 남편 이름으로 된 생명보험 때문인 걸 이때 알게 됐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이름으로 돼있지 않으니 본인이 가지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국적은 없어도 배우자로 주민등록 서류에 기록되었으니 딩티응앗 씨가 1순위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 때문에 가족을 내쫓진 않았는데 어떻게 베트남 사람이라고 어린 손자까지 함께 내팽개 칠 수 있습니까? 6개월 뒤 엄마는 한국 국적에 필요한 서류를 갖춰 출입국사무소에 신청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니며 차츰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오신날 그 모자가족은 마하붓다사 절에서 육법공양을 올렸습니다. 베트남 전통 옷 ‘아오자이’를 입은 그녀는 부처님께 향 공양을 올렸고 큰아이는 꽃을 바쳤습니다.

그 인연으로 마하붓다사에서는 매월 1회씩 베트남 불자회 법회가 열립니다. 부처님의 “인간은 누구나 소중하고 평등하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가르침이 결혼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의 인권보호 활동에 주춧돌이 됩니다.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은 한국인보다 더욱 간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빈자일등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형으로 중생들에게 깨우침을 줍니다.

〈법화경> 방편품의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은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나와 다름없이 평등하다(如我等無異)’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말씀이 전국 사찰에 퍼져 봉축의 빛이 차별 없이 온 누리에 퍼지길 저도 또한 발원해 봅니다. 
정리=박진형 기자

세상 가장 밝은 貧者一燈

부산 보현회 회장 안성이의 '내 인생의 부처님오신날' 

내 인생 최고의 봉축은 40여년 전 보현회 법당에 처음으로 연등을 달 때입니다. 하나둘 아이들을 위한 불이 켜질 때마다 밝아지는 부처님의 세상을 꿈꿀 수 있었고, 그 원동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인연이 된 건 보현회를 시작한 1980년대 즈음이었습니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며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동네에서 만난 작은 아이가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친아빠가 다리를 잡고 비틀었다고 하더군요. 아이는 그 때 7살이었어요. 알콜중독인 아버지가 술을 가져오라며 아이를 폭행했고, 어머니는 집을 가출한 상태였지요.

두 달 가까이 아이를 안고 병원을 다니며 관세음보살을 찾아보자며 권했었는데 병원치료를 마친 후, 아이의 엄마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적 같고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가족들과 지인을 모아 자비나눔 봉사단체인 보현회를 창립했지요.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 후원 동참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빈자들이 모은 갖가지 정성
위기 처한 아이들 성장시켜


보현회를 창립하고 열심히 봉사를 시작한 1980년대, 그때는 정말 가난한 시기였어요. 지금도 보현회 회원들은 넉넉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빈자가 올린 정성스러운 등 하나가 가장 밝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지요? 그런 의미로 보면 보현회 등이 세상에서 가장 밝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보현회 연등이 하나 둘 모여 또 다른 빈자를 돕고 있어 가장 밝다고 저는 자부 합니다.

지난 40년 동안 연등은 아이들의 장학금과 생활비 그리고 마산에 있는 결핵 환자 지원, 장애인 후원까지 그들의 삶을 밝히는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 후에 만난 수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부산 철마에서 만난 한 가정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었고, 아이들은 6살, 5살로 한참 부모의 정이 그리운 시기였지만 엄마는 가출, 아빠는 덤프트럭 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해 교도소에 있었죠. 집은 돈이 없어 경매에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던…. 그 아이들이 성장하기까지 후원하고 공부를 도왔는데 벌써 어른이 돼 대기업에 다니고 지금도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가덕도에 있던 어린 자매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들어갔던 기억도 납니다. 가난해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그날 후로 아이들 공부를 지원하기 위해 보현회 회원들이 참 많은 노력을 했었지요. 아이들이 그 때 당시 7살, 9살이었고 지금은 벌써 시집갈 나이가 되었네요. 이 아이들은 참 공부도 잘했어요. 한 명은 호주로 유학도 가고 둘 다 간호학을 전공해 지금 큰 병원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난 아이들이 70여명입니다. 부처님오신날 세상에서 가장 밝은 등을 달기 위해 올해도 전화가 옵니다. 오늘 저는 세상을 밝히는 연등을 부처님께 올리며 두 손 모읍니다. “어둠 속에 갇힌 아이들의 삶에 희망의 빛이 되어 주기를….”
정리=하성미 부산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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