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붓질로 경영한 수묵화의 절집

선암사의 봄. 대웅전, 불조전 등의 내부장엄 수묵화는 선암사의 자연실경을 반영한다.

 

판벽에 ‘해(海)’자와 ‘수(水)’자 투각
구름문양에 물고기, 거북조각 화판
천정 외곽엔 선학, 내부엔 연화문양
불전내부 수묵화 장엄은 선암사 실경

화재 대비한 연못, 돌담, 구름문양

선암사는 자연의 푸르름 속에 경영한 한국산사 원림조영의 자연주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절집이다. 곳곳에 조성한 연못과 활엽수, 꽃나무들이 화원(花園)의 숲을 이룬다. 화원의 아름다움을 지닌 내면에는 화재를 대비한 지혜로움도 세심하게 고려되어 있다. 선암사는 화재의 상처가 깊다. 18, 19세기에 걸쳐 70년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네 차례의 큰 화재가 연이어서 사찰존립의 근간을 뒤흔든 참화가 있었다. 영조 35년(1759년)의 화재에 이어, 영조 42년(1766년), 순조 19년(1819년), 순조 23년(1823년)의 대화재가 잇따랐던 것이다. 빼어난 자연주의 아름다움으로 가람을 조영한 배경에는 화재에 대웅하려는 다양한 지혜가 녹아 있다. 가람의 곳곳에 연못과 수조를 만들고, 무우전, 응진당, 해천당, 원통전 등의 독립권역에 돌담과 흙담이 유난히 발달한 것도 방화수와 방화벽의 기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대웅전 지붕 밑 부연 착고판에, 심검당 판벽, 무량수각 판벽 등에 ‘바다 해(海)’자와 ‘물 수(水)’자를 투각하여 문자에 담긴 물의 기운을 빌리고 있다. 그 모두가 화기를 다스리려는 세심한 통찰지들이다.

불전건물의 내부 장엄에서도 그 같은 의지를 찾아 볼 수 있다. 불조전과 팔상전, 원통전의 천정은 온통 구름 문양으로 덮었다. 보통 법당 내부 천정반자에 베푸는 구름문양은 사람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후불벽 뒤 천정반자에 화면을 채우는 소재로 활용한다. 구름문양을 천정반자의 중심문양으로 활용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선암사에서는 여러 불전에서 구름문양을 중심소재로 적극 운용한다. 원통전과 불조전 우물반자 칸칸은 붉은 색 선묘로 다양한 구름을 베풀었다. 거기에다 우물반자 종다라니에 물고기, 거북을 조각한 화판을 얹어 물의 기운을 고양했다. 팔상전의 경우 기다란 청판으로 이은 평천정 전체에 왕성한 구름 에너지를 선묘로 표현해서 화기를 다스리는 의지를 드러낸다. 세 전각의 구름 모양도 가지가지다. 온갖 형태의 조합으로 구름 곡선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집대성한 형국이다. 특히 원통전 천정반자의 구름은 한 칸 한 칸이 심미적 예술감각으로 피워 올린 구름 꽃에 가깝다. 어쩌면 구름 하나를 저토록 다양하고 심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지 놀라울 뿐이다.

선학이 취하려는 다양한 보주문양.

 

길상과 수행자를 상징하는 선학

1147년의 기록으로 전하는 〈조계산선암사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대웅전은 원래 미륵전이며, 2층 중층건물이었다. 지금처럼 1층으로 된 것은 정유재란 이후 17세기 중창과정 때로 추정한다.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도 원래 중층건물이었으나, 일제 때 단층으로 축소 개조했다. 지금의 대웅전은 1823년 대화재 이후, 1824년 중창불사 때의 모습으로 알려진다. 천정은 층층이 들여쌓은 3개 층의 층급 우물천정이다. 상,중,하 3개 층을 가진 층급천정은 통도사 적멸보궁과 불국사 대웅전 등에서 간혹 나타나는 공력 들인 구조다.

우물천정에 베푼 문양은 두 가지다. 하나는 머리에 붉은 점을 가진 단정학(丹頂鶴), 곧 선학(仙鶴) 문양이고, 다른 하나는 기하적인 패턴으로 도식화된 팔엽연화문이다. 선학 문양은 하층천정의 사방 가장자리 한 줄에만 경영했다. 선학이 베풀어진 우물칸 수는 모두 55칸이다. 사방 가장자리에 결계를 치듯 선학 문양으로 신성한 사각 틀을 이룬 후, 내부에 팔엽연화문으로 화장세계를 장엄했다. 선학 문양으로 천정 외곽을 한 바퀴 두르고, 그 안에 연화문을 장식하는 기법은 조선 중후기 서남해안 지역의 사찰에서 두루 나타난다. 나주 불회사 대웅전,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해남 대흥사 천불전,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또 공주 갑사 대적전, 고성 옥천사 대웅전, 청송 대전사 보광전 등에선 선학의 집합성으로 나타난다. 선암사의 경우 여러 불전 건물에 선학 문양을 볼 수 있다. 원통전 정면 돌출 천정에도 대웅전과 같이 가장자리에 선학을 두르고 중앙에 연화문을 배치했다. 장경각과 지장전 천정반자에서도 선학문양이 나타난다.

그런데 대웅전 선학은 저마다 보주를 입에 물고 있다. 선학이 가진 길상의 의미에 인간이 현실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선학은 대체로 장수의 이미지를 갖는다. 나주 죽림사 극락보전 선학의 경우 보주 대신 산삼을 입에 물어서 선학 고유의 불로장생 이미지를 부각한다. 또한 선학은 고고한 영적인 존재로서 한적한 곳에 은거한 선비나 수행자에 곧잘 비유된다. 선학을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나 아라한으로 이해하면 보주는 진리의 관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부의 팔엽연화문 역시 단순한 꽃 장식이 아니다. 가장자리를 제외한 천정 전체가 팔엽연화문이다. 대부분의 연화문 화심부엔 둥근 원만 있지만, 몇 곳에선 범자 ‘옴’이 남아 있다. 범자 ‘옴’ 자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 비로자나불의 상징으로서, 그 한 자에 진리의 빛과 성음이 담겨있는 일종의 특이점이다. 불교세계관으로 볼 때 빅뱅우주설의 근원인 태초의 한 점에 비유할 수 있다. 즉 돔-팔엽연화문의 패턴 반복을 통해 법계우주에 가득한 진리와 자비의 광대무변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선학이 입에 문 기상천외한 보주

대웅전 천정문양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선학이 취하려 하는 보주(寶珠)의 다양한 표현에 있다. 불교장엄에서 보주가 등장하는 곳은 여래의 머리 위로 솟구친 정상계주나 불보살의 상징지물, 연화문 단청문양에서, 혹은 용, 봉황, 사자, 선학 등의 서수(瑞獸)가 취하려는 동작 등에서 함께 나타난다. 보주는 가진 주체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어 진다. 대체로 보주는 여래, 무상정등각, 진리와 자비, 신통력 등을 상징하는 신비로운 결정체로 요약될 것이다. 그런데 통상 보주는 지장보살의 지물처럼 흰 구슬 모양이거나 붉은 구형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선암사 대웅전 천정의 55칸 반자에 표현한 선학의 보주 형태는 대단히 독특하고 신비로워 주목을 끈다.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다양한 변주가 인상적이다. 그 모양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①목성처럼 구에 색 띠를 두른 형태. ②복주머니 모양. ③호리병 모양. ④목탁 모양. ⑤동심원 형태. ⑥두 개의 원형 고리를 연결한 칠보문 형태. ⑦만(卍)자를 넣은 떡살무늬 형태. ⑧계란 프라이 형태. ⑨여러 개의 붉은 원을 중첩한 형식. ⑩붉은 테두리만 가진 원. ⑪콩나물처럼 생긴 뇌록색 보주. ⑫가지에 달린 천도(天桃) 모양의 뇌록색 보주 등등의 기상천외한 형상들로 표현하고 있어 경이롭다. 이런 다양한 보주의 형상들은 선학의 길상을 통하여 삶의 수복강녕과 복록을 추구하는 염원의 반영으로 보인다. 복주머니 모양이나 칠보문, 가지에 달린 천도(天桃) 형상 등은 인간의 수복강녕과 길상을 담은 문양이기 때문이다.

구름문양 반자에 얹은 물고기, 거북조각.

 

호남의 회화특성 반영한 수묵화

선암사 대웅전 단청장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남도지역의 회화적 특성을 반영한 풍부한 수묵화 장엄에 있다. 대웅전 내부 포벽, 내목도리 위 상벽, 창방, 평방 등에 먹을 중심 색채로 한 수묵화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수묵화의 붓질은 사군자, 산수화, 화조도 등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 경향이 뚜렷하다. 이런 장엄의 경향성은 대웅전뿐만 아니라, 불조전, 팔상전, 장경각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지금은 불화에 가려 볼 수 없지만 장경각 후불벽에서는 사찰장엄으로는 희귀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산수화까지 8폭 병풍 형식으로 남기고 있어 문인화가 발달한 호남지역의 특성을 엿보게 한다. 대웅전 포벽, 상벽에 그린 수묵화가 45점, 창방, 평방에 진채로 그린 화훼도, 화조도 등이 13점에 이른다. 매화, 대나무, 난초 등의 사군자와 가지가 늘어진 수양버들 등을 중심소재로 삼았다. 그 중 먹으로 매화를 그린 묵매도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런데 묵매도 등의 나무 수형의 표현에서 실물의 형상을 소묘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대웅전 포벽의 여래도와 나한도, 각황전의 나한도와 보살도를 제외하면 단청 별지화의 대부분은 꽃과 나무 그림이다. 더구나 매화와 수양버들 그림이 유난히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선암사의 자연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순천 선암사는 우리나라에서 고매(古梅) 군락의 집단성을 이룬 유일한 곳이다. 수령 150년이 넘는 고매가 선암사에 22그루나 식생하고 있다. 무우전 돌담길과 대웅전 뒤, 원통전, 장경각, 해우소 부근 등 경내 곳곳에서 기품 있는 고매가 가지를 드리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천연기념물 백매와 홍매도 그 곳에 있다. 또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축 늘어뜨리며 4월에 꽃을 피우는 처진올벚나무도 곳곳에 식수되어 있다. 수백 년 된 영산홍과 자산홍, 왕벚 등 봄이면 절집이 만화방초의 꽃 대궐을 연출한다. 자연환경 자체가 불국정토의 화원이고, 장엄세계다. 승장의 붓질이 달리 다른 곳에서 장엄소재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선암사 스스로가 자연의 붓질로 장엄한 수묵화이고, 진경산수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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