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내게 은혜로운 사람들이고 은혜로운 생명들이다

 

내 자생중생들을 제도함으로써 내가 제도가 되고,
내가 제도가 됨으로써 내가 견성을 하게 된다 이겁니다.
즉 자생중생들이 나요, 내가 자생중생이니까, 모두가.

(지난 호에 이어서)

자기 안의 자생중생들은 전자에 살 때 악업 선업을 지은 자체이기 때문에 오신통이 바로 즉 컴퓨터라고 할 수 있어요. 자동적인 컴퓨터예요.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사는 것이 전부 거기에 입력이 돼 있으니까요. 그래서 전자에 살던 입력이 현실에 자꾸 나오는 거거든요. 나오니까 그 입력된 자리에다 내 형성된 것까지 일체 다 맡겨라. 몰락 맡겨라. 몰락, 거기서 지금 운행을 하는 거니까, 행을 하게 하는 거니까, 말을 하게 하는 거니까, 보게 하는 거니까 모두를 거기다가 몰락 다 놓으라는 거죠. 놓지 않으면 어떡할 겁니까.

왜냐하면 안에도 자생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내가 혼자 먹은 것도 없고, 내가 혼자 한 것도 없는데, 뭘 가지고 내가 혼자 산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다 놔라 이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놓으려도 뭐가 있고, 뭐가 걸리고…. “조그만 일은 놓을 수 있는데 큰일이 생기니까 못 놓겠습니다.” 합니다. 못 놓긴 뭘 못 놓아요? 허허, 자기가 그대로 놓고 가는 건데. 네? 자기가 혼자 먹고 가는 겁니까? 혼자 다닙니까? 아니, 헤아릴 수가 없이 많은 덩어리가 지금 다니는데 혼자 다닙니까? 놓을 수 없느니 놓을 수 있느니 거론이 붙게? 진짜 놓을 수만 있고, 양자가 바로 전자라는 걸 안다면 진짜 그냥 그대로 여여한 겁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발견하는 데 대해 얘기한 거고요, 아까 읽어 내려오던 그 대목 중에서 또 한마디 한다면, 그 암 덩어리라든가 또는 탐지기라든가, 또 뭐라 그랬더라? 하여튼, 허허허…, 그런 것이 왜 멈춰지느냐? 내가 탐지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입니다. 그 탐지기에 서는 사람 자체가 그렇게 잘못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누명을 쓰고 그런 문제가 일어났다 이랬다면, 아니, 판(版)에 박혀 있습니까? 그럭했다면 그거는 이 공부 하는 데에서 볼 때 둘이 아닌 까닭에, 모두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혼자만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생명체들이 한 덩어리입니다. 지금 집합소입니다. 한 덩어리가 굴러가다가 일을 저질렀다면 혼자 한 게 아니죠. 거기 생명들이 너무 많죠. 그러면 죄 담당을 해야 되는데, 분담해서 담당해야죠, 몽땅. 그러니까 그 몽땅 분담할 수 있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했다는 게, 나 혼자만이 잘못했다는 게 소멸됩니다.

그래서 탐지기에 서면 ‘아이, 그것이 안 나오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한다면 ‘네가 저지른 거니까….’ 아, 자기 혼자 저지른 게 아니거든요. 그게 시켜서, 즉 말하자면 움죽거리게 해 가지고 저질러진 거지, 몸뚱이가 저지른 게 아니거든. 안 그렇습니까? 이해가 안 갑니까? 자기 몸뚱이가 저지른 게 아니라 자기 마음들이, 의식들이 전부 한데 합쳐서 그렇게 저지른 거니까 ‘너 알아서 해!’ 하고 했을 때에 작동이 안 되든지 되든지, 하여튼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거죠. 좋게 나올 수도 있고, 작동을 안 할 수도 있고, 또 너무 나쁜 놈이다 이렇게 될 땐 아주 뭐, 기탄없이 나오게 될 것이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도 요량에 달려 있죠. 그 지혜로운 요량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어요. 그렇더라도 그걸 요량대로 지혜롭게 한다면 아주 대범하게 크게 이룰 수가 있으니까요. 또 병 같은 것도 부처님께서는 이 자생중생들이, 천백억화신이 응신으로 화해서 고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 먼저 찾아야 되겠다’ 하는 겁니다. 첫째, 내 자생중생들을 제도함으로써 내가 제도가 되고, 내가 제도가 됨으로써 내가 견성을 하게 된다 이겁니다. 즉 자생중생들이 나요, 내가 자생중생이니까, 모두가.

그러면 마음을 내기 이전의 선장은, 마음의 선장은 나쁘고 좋은 거를 너무 잘 알잖아요, 네? 마음 내기 이전의 마음은 너무나 잘 알죠. ‘이걸 해서는 안 되고 이거는 해서 좋고’ 이런 거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선장의 가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주장자라고 하죠. 그래, 선장이 돼 가지고 그 모든 의식들을 한데 합쳐서, 항상 이렇게 포함해서 하나로 굴린다면, 주인공으로 하나로 굴린다면 그 자생중생들이 전부 보살로서 화하고, 법신으로 화하고, 지장으로 화하고, 약사로 화하고, 지신으로 화하고, 용신으로 화하고, 칠성으로 화하고 모두, 아주 일체 아니 되는 것 없이 화합니다. 화해서 바로, 어떠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그 속에 둘이 아니게,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지면 그대로 그냥 내가 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이 응신이 된다 하는 것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그 속에만 들어가면 그 모습으로 화한다는 거죠. 돼지 속에 들어가면 돼지가 될 거고. 안 그렇습니까? 이 마음은 무한이에요. 돼지 속에 들어가면 돼지가 되고, 사람 속에 들어가면 사람이 되고, 곤충 속에 들어가면 곤충이 되고 하기 때문에 아니 되는 게 없다. 그러니 나 아님이 없다.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으니 부처니라.” 이런 겁니다. 지금 과학자들이 말할 때는 그것이 원자에서 입자로 인해서 소립자도 되고, 분자도 되고, 원자로 다시 되고,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한다 이런 겁니다, 이제.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거하고 지금 시체(時體)로 용어를 변경해서 말하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지금.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한다면 그 병자 속에 들어가서 병자와 하나가 되니까 (양손을 서로 부딪쳐 보이시고) 그것이 정말 저분 말마따나 그 모든 의식들이 한데 합쳐진 그 능력이, 즉 말하자면 ‘불’입니다. 불과 같기 때문에 그 병을 태워서 없어지게 할 수도 있는 거고, 또는 아래로 배출시켜서 없애는 것도 있고 가지각색으로, 인체에 해롭지만 않다면, 이익하기만 하다면 어떤 걸 가리지 않고 하는 겁니다. 그런 문제가 대두돼 있습니다.

전부 따지고 본다면 이 지수화풍 자체가 아주 거대한 겁니다. 지, 수, 풍 세 가지가 한데 합쳐서 비벼 대니까, 한데 합쳐서 쉴 사이 없이 돌아가다 보니까 온기가 생기고 뜨거운 불이 생기고, 이런 게 에너지입니다, 말하자면. 에너지가 생긴 거죠. 에너지라고 표현해도 되죠? 그런데 불이 없으니까 검죠? 검은 지평선 자체가 바로 지수화풍이 뭉쳐진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스스로, 과학자들은 폭발이 됐느니 뭐니 이러는데, 그게 그냥 우연히 폭발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연히 폭발되는 거 봤습니까? 우연히 과학자가 되는 거 봤습니까? 우연히 연구하는 거 봤습니까? 우연히가 어딨습니까? 그래서 우주를 형성하고, 별성을 형성시키고, 그 별이 형성됨으로써 지금 불 덩어리도 크게 이루는 별도 되고, 또 별성이 생기고 생명이 생기게 하려니까 태양계도 생겨야 하고 행성도 있어야 하고, 이 모두가 우리가 지금 사는 생활 속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직결이 됐다는 그 이유는 뭔가. 지금 우리가 마음먹고 하는 것이 컴퓨터에 입력이 되면서 그냥 직결이 됩니다. 같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벌써 한 계단을 거쳐서 우리가 마음 쓰는 거를 알기 때문에, 계발시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물질과학이 발전이 되는 것도 알기 때문에 그 아는 대로, 우리가 그렇게 하는 대로 거기서 받아서 그렇게 또 발전을 시킨단 말입니다.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상하게 되는 것도, 사람들이 마음을 잘 못 쓰기 때문에, 그 못 쓴 마음이 올라가서 입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참…, 이건 이름을 지어서 말로 할 수도 없는 그런 사건들입니다, 모두가.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마음을 잘 쓰십시오. 꿈을 꾸더라도 한생각 잘하는 데 따라 달라집니다. ‘나는 그냥 중생이어서 모자라니까 내가 힘이 없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 우주와 직결돼 있고 가설이 돼 있고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쓸 수 있는 자원이 나한테 모두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든 끌어 쓸 수가 있는 에너지가 주어져 있다 이겁니다. 지수화풍이 없으면 에너지를 방출시킬 수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허나 내가 지수화풍으로 돼 있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살고, 모든 게 지수화풍으로 살고 있습니다. 지수화풍이기 때문에 지수화풍으로 살고 있고, 지수화풍으로 살기 때문에 그 에너지가 모두 주어져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이 그냥 자동적으로 통신이 되고 뜻으로다 통신이 돼서 만물이 전부, 개개인이 짹짹짹짹만 해도 ‘요건 무슨 소리구나’ 하고서 전부 따라옵니다. 모이자 하면 모이고 흩어지자 하면 흩어지고, 먹을 것이 저기 있으니 가자 하면은 가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말을 하는 사람의 차원이라고 해서 우리 잣대로 재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두 정말 풍부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든지 깔보지 마라. 뭐든지 네 스승으로 알아라. 알더라도 두드려 가면서 가거라. 알더라도 물어 가면서 가거라.” 이러는 겁니다.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일체를 스승으로 알아야 하고 또, 일체가 나의 은인이라는 거를 알아야 한다. 내가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한 치도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된다. 일체 만물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보고 듣고 배울 수가 없었으니까, 상대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배울 수가 없었으니까, 먹고 살 수가 없었으니까 모두가 내게 은혜로운 사람들이고 은혜로운 생명들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정말이지 모두에게 은혜를 갚는 게 되고 정법으로 꼭 나갈 겁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마음법이 ‘대승법(大乘法)’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큰, 큰마음을 가진 사람의 행이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서 항상 넓혀 가는…, 마음은 한계가 따로 없어요. 우주가 한계가 있다, 삼천대천세계가 한계가 있다 이런 것도 없고, 넘어가면 넘어가는 대로 넘어가고, 넘어간다는 소리조차도 붙일 수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우리가 제일 시급한 게 지금 마음을 그렇게 넓게 쓰면서 그 넓게 쓰는 마음도…,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하죠. “나쁜 게 들어왔을 때는 ‘나쁜 게 들어오게 한 것도 너니까 좋게 들어오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거기 놓아라. 또 잘돼서 들어오는 건 ‘아, 참 감사하구나.’ 하는 거를 느끼면서 거기 놓아라. 그래야 컴퓨터에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면서 새로이 자꾸 나온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근본이 뿌리라면 싹은 몸입니다. 이 싹은 이 뿌리로 인해서 전체가 삽니다. 그런데 뿌리가 형성이 돼 있기 때문에 지분이나 수분이나 철분 모두를 갖다 흡수해서 에너지를 올려 보내게 돼 있습니다. 이건 자동적입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온 이 몸 자체는 바로 공기력과 태양력을 흡수해서 또 밑으로 내려 보내는 거죠. 즉 말하자면 우리 몸에 정맥과 동맥이 서로 돌아가면서 살고 있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런데 관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자기 뿌리를 믿어서 ‘뿌리야! 너 요만큼 에너지를 흡수할 거를 이만큼 좀 흡수해서 올려 보내 다오.’ 하는 거나 진배없는 겁니다. 용도를 너무 잘 아니까 말입니다. 싹이 생각하는 거를 뿌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게 아니고, 예를 들어서 몸뚱이 하나가 턱 쓰러졌다 이런다면 그냥 발광을 합니다, 허허허…. 침착하게 ‘네가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려! 살리는 것도 너, 죽이는 것도 너다. 죽을 때가 됐으면 애나 어른이나 다 죽는 거지마는, 죽게 하는 것도 너고 살게 하는 것도 너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고 그냥, 죽는 거를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한데 그냥, 그 빈 손과 빈 발이 그냥, 송두리째 에너지가 방출되는 거죠. 그래서 온몸의 모든 의식들을 작용케 해서 낫게 할 텐데 이거는 뭐, 금방 ‘아이고, 주인공!’ 이랬다가 금방 ‘아이고, 이거 어떡하나?’ 저 누구 부르고 누구 찾고 허, 이러다 보니까 그냥…, 예를 들어서 마음이 있다면 지켜보고 있는 거죠. 지켜보고…, 예를 들어서 여러분한테 어떠한 문제가 있는데 변호사한테 가서 청하지 않고 일이 됩니까? 청하지 않고도 됩니까? 안 그래요? 그리고 잘못됨과 잘됨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일이 됩니까? 밥을 짓지 않고 생쌀로 놓아두면 그냥 밥이 됩니까? 그런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쌀을 넣고 스위치를 올리지 않으면 그냥 밥통은 지키고만 있는 거죠, 그냥. 허허허…. 그거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변호사는 건수가 와야 할 텐데, 건수가 안 오니까 지켜보고 있는 거죠. 그거와 같아요. 생각 없이 되는 일이 있습니까? 송장이 무슨 일을 합니까?

우리가 첫째 일요일 날 이렇게 모여서 토론하고 이러는 게 참 여러분한테 좋은 것 같습니다. 셋째 일요일 날도 그저 자신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질문해서…, 이제는 여러분한테 말도 많이 했으면서도 안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그러니까 여러분도 함이 없이 질문하고, 또 함이 없이 대답하고 이러는 가운데서 느끼고 체험하고 바로, 깨닫는 겁니다. 그게 목적입니다.

이 책이라는 거는 내가 썼든 누가 썼든 길잡이일 뿐이지, 깨닫는 것은 책이 아닌 바로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겁니다.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 한 구멍에다 틀어넣으면서, 입력을 시키면서, 모든 것은 거기를 전제로 해서 부지런히 뛴다면…, 뛰는 자체도 바로 거기니까, 뛰게 하는 것도 그놈이니까요. 어떤 때는 여러분이 사는 걸 보면 ‘아이고,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필이면 이런 걸 보고 살게끔 했나.’ 하면서 아주 비참한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정말입니다. 그럴 때 ‘야, 이왕이면 왜 비참한 생각이 들게 하느냐?’ 합니다. 그러면 다시 바꿔지죠. 이 마음이라는 게 체가 없는 거라 그렇게 순간순간, 찰나찰나 바꿔도 바꿔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공부를 함에 있어서 우리가 몽땅 다 가르쳐 놓는다면 오히려 안의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전자에 살던 나를 발견해 내지 못하거든요. 즉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마음대로 들이고 내고 할 수가 있어야만 심성과학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죠? 이건 물질과학이지 심성과학이 아닙니다. 그런데 물질과학을 진짜 발전시키려면 먼저 알아야 될 것이 바로 이겁니다. “너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네가 아니라 전자에 살던 너부터 발견해라. 그러면 모두 찰나찰나 들고 나는 거를 알 수 있느니라. 생명이 없는 거든지 생명이 있는 거든지, 보이는 거든지 안 보이는 거든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를 둘 아니게 할 수 있다. 둘 아니게 볼 수 있고, 둘 아니게 작용할 수 있다.” 이래야 우주하고도 직결이 된 줄 알고…, 예를 들어서 인공위성을 그렇게 위대하게 띄워 보냈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어느 부분이든 하나만 딱 잘못해 놓으면 그냥 그거는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언젠가는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미리 없어지는 거죠. 그러니 수명이 그렇게 단축되는 겁니다. 또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의 마음만 하나 어떻게 해 놓으면 그 비행기는 그냥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도리이면서도 자비한 도리이고, 자비하면서도 무궁무진한 도리인지 모릅니다, 이게.

그런데 하늘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좋은 방향으로 나가게 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혜성이 우리 지구에 부딪쳐서 지구가 아주 망가지고 인명이 많이 상하게 생겼다, 지구가 그냥 파워를 일으켜서 모두 부서져 버린다든가 타 버린다 이런 문제가 생길 때도 내가 그 혜성이 된다면 내가 나를 지구로 알고 있는데 부딪치게 하겠습니까? 자기가 혜성이 돼 가지고 그 혜성을 저 먼 데로 끌어다 놓고 옵니다. 허허허…. 이런 원리입니다. 이렇게 아주 광대한 법이며, 정말 부처님 법이라기보다도,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 법이고, 우리들 법이자 부처님 법입니다. 이 광대한 법을 부처님이 먼저 깨달아서 우리들한테 “너희들은 세세생생에 이 도리를 모르면 자유인이 될 수 없느니라. 그리고 평등공법(平等空法)을 행하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어떤 사람은 날더러 부처님 말씀 그대로 하지 않고 용어를 달리한다고 해서 아주 부처님 법하고는 다른 세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옛날에 달구지라고 했다고 지금도 달구지라고 해야 옳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말씀해 놓으신 게 있었을 겁니다. 시대가 변천하는 대로 계율을 바꿔라. 방편도 바꾸고. 난 꼭 그렇게 말씀하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지금 돌 하나라도 버릴 게 있습니까? 이 천체가 다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 따로 있고 우리들 법 따로 있고 시체 법 따로 있고 과거 법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걸 (찻잔을 가리키시며) 우리가 하나 만들려고 해도 전에는 뚝배기같이 만들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아주 좋게 꽃처럼 만들어서 찻잔이라고 이름을 지어 놨죠. 그런데 찻잔이라고 만들어 놓은 이 이름이 지금 현실에 필요한 거지, 전자에 뚝배기라고 했다고 해서 찻잔을 뚝배기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니까 뜻은 다 똑같아요. 과거나 현실이나 미래나, 오늘, 오는 오늘이나 똑같은데 발전하는 대로 용도와 그 방편이 변하죠, 자꾸자꾸.

그래서 어린애를 갓 낳아 놓으면 애기라 그러고, 조금 자라면 학생이라 그러고, 조금 더 자라면 청년이라고 하고, 조금 더 자라면 어른이라고 하고, 더 자라면 늙었다고 합니다. 그렇듯이 이 물질이 생긴 대로 이름을 붙이는 거지, 갓 낳은 애기를 어떻게 늙었다고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까? 변천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이름도 정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며 발전이며, 우리가 물질과학보다도 심성과학으로서 발전을 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이 공부입니다.

내가 이랬죠. 이 전력이 (천정의 전등을 가리키시며) 들어오는 것을, 태양열이 들어오는 것을 눈으로는 못 보죠? 보지도 못하고 쥘 수도 없고 끌어당길 수도 없죠? 그러나 그 태양열을 받을 장비만 해 놓는다면 자연적으로 태양열이 들어와서 전력으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광대한, 그 묘한 법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러나 있기는 있습니다. 절대죠, 아주. 절대 있으니까 그대로 믿고 맡겨라 이거죠, 절대 있는 거니까. ‘살아 있는 사람에 한해서 절대 있다.’ 이걸 믿으세요. 그래서 부처는, 내가 법당에 들어가야 부처가 있는 거고, 변소간에도 내가 거기 들어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평등하게 생각하면 부처요, 생각을 한생각 냈다면 법신이요, 또는 한생각 내서 움죽거리겠다 하면 움죽거리는 것이 화신이니, 어디 딴 데서 나옵니까, 다?

그러니 내가…, (잠깐 말씀을 멈추시고) 그 책을 보든지 안 보든지 틀림없이 그 내용이 어긋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앞뒷면에 약간의 좀 허술한 데가 있지만 그대로 아주 어긋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게 있습니다. ‘어긋나질 않게 한다면 진짜 어긋난다, 어긋나지 않는다 하는 그 사방이 툭 터진 공부는 오히려 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게 있습니다. 이 마음이라는 건 걸리는 게 없지만 벌써 책을 써 놓으면 걸리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모두 자유스럽게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죠. 내가 지금 우리가 배우기 위해서 도반들끼리 이렇게 토론하고, 진짜로 들어가서 진짜 함이 없이 하라 이렇게 말로만 했지만, 사실은 함이 없이 그대로, 내가 목마르면 (컵을 들어 보이시며) 물 마시고 그래야 되는 겁니다. 컵이 저기 있는데 컵은 어떻게 생겼고 물은 얼마나 담기고 뭘로 만들어졌고 뭘로 했다는 것을 아무리 잘 안다 하더라도 내가 목이 말라 죽겠는데 그걸 갖다가 마실 수가 없다면 무효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공부에 올 일 년만이라도 더 진지하게 들어가서 보충해서 내놓으시도록 하세요. 앞뒷면에 더 좀 보충해서요. 그러면 우리가 전부 한마음 식구고 하나로 돌아가는데 틀릴 게 뭐 있겠습니까? 우리 한마음에서 한마음 아무개 님이 바로 내는 건데, 그러니까 뭐, 이 마음공부의 체험이라는 것을 하면서 한번 해 보시면 알 바가 있습니다. 그게 대답이 나오니까요. 허허허….

※위 법문은 대행스님께서 1994년 5월 1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 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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