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 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신찬 선사는 계현 대사에게 동진 출가 한 후 경학(經學)에만 몰두했다. 참선에는 뜻이 없어 백장 선사를 찾아가 참선 정진 끝에 견성오도(見性悟道)한 후 은사인 계현 스님을 다시 찾아가자, 스승은 너는 나를 버리고서 여러 해 동안 소식이 없더니 그동안 무슨 소득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찬 선사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데 얻을 것이 무었이 있겠습니까?” 하니 스승은 그 뜻을 알아 듣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승은 신찬 대사에게 목욕물을 데피게 하고 등을 밀어 달라고 하였다.

신찬 대사는 스승의 등을 밀다가 호호법당(好好法堂) 불무영험(佛無靈驗)이라, 법당(法堂)은 훌륭한데 영험(靈驗)치 못하군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스승이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자 불무영험(佛無靈驗) 유방광(有放光)이라, 즉 부처는 영험치 못하나 방광(放光)은 할줄 아는군하며 거리낌 없이 또 중얼 거리니, 스승은 무엇인가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 들며 신찬 대사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짐작케 되었다.

한 생각 망념 올라오는 즉시 알아차리고 이 뭣고하면
육진(六塵)을 벗어나니 이것이 참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
중생은 착각의 아상 때문에 집착의 업 속에서 헤매는 것

한날 스승이 경서를 열심히 보는데, 벌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와 창문으로만 나가려고 탕탕 몸을 부딪히며 애를 쓰니, 공문불긍출(空門不肯出) 투창야대치(投窓也大痴) 백년찬고지(百年鑽古紙) 하일출두기(何日出頭期) 이라. , 어리석은 벌이여! 활짝 열어놓은 저 문은 어이 마다하고 굳게 닫힌 창문만 안타까이 두드리고 있는고. 백년을 경서만 뚫어지게 본들, 어느날 깨치기를 기약하겠는가하고 읊으니, 보든 경서를 덮어놓고 나는 네가 나가서 허송세월을 하고 돌아온 줄 알았더니 그 동안 누구에게서 어떤 법을 배웠느냐?”고 되물었다.

백장선사 법좌에서 참선 수행으로 깨닫고 왔습니다하니 스승께서 , 기특한 일이로다. 네가 비록 내 상좌이나 공부로는 나의 스승이니 백장 선사를 대신해서 나에게 불법을 설해다오라고 했다고 한다.

신찬 대사가 법상에 올라 영광독로(靈光獨露) 형탈근진(逈脫根塵) 체로진상(體露眞相) 불구문자(不拘文字) 진성무념(眞性無染) 본자원성(本自圓成) 단리망연(但離妄緣) 즉여여불(卽如如佛)라고 설했다.

신령스런 빛이 홀로 들어나 육근육진을 벗어나 본체가 참모습을 드러내니, 문자에 의지하지 않네. 참마음 성품은 본래 오염되지 않아 원만하게 구족돼 있으니, 단지 망연(妄緣)만 여의면 그대로 여여불이라네라는 의미이다. 즉 한 생각 망념이 올라오는 즉시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이 뭣고하면 육진(六塵)을 벗어나게 되니 이것이 참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망상을 쉬어 한 생각도 생기지 않는 곳에 도달해야 망정(妄情)의 티끌에 떨어지지 않고 의상(意想)(알음알이)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그래서 대상과 합()이 않되면 무아(無我)인 것이다.

중생은 착각(錯覺)의 내가(我相)있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집착(執着)의 업() 속에 생노병사를 집어놓고 윤회를 하는 것이다. 단지 부처가 중생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니,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즉 선가에서는 보살의 수행단계인 57단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묘각(妙覺)인 구경각에 이르는 것이니, 일체처 일체시에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이뭣고가 이어지면 바로 여래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