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인드라망, 얼마나 촘촘한가!

대흥사 법계를 이은 원장이 초의에게 보낸 편지. 원장은 편지를 통해 먼 스승인 함월 화상의 초상을 초의에게 부탁하고 있다.

조선 후기 초의에게 보낸 경성사 승려 원장(元長)의 편지에는 불화에 능했던 초의가 승려의 영상을 그리는데 관여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초의에게 선종의 초묵법(갈묵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 전해져 소치 허련에게 이어졌던 사실은 추사 김정희의 편지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에서 초의가 불화에 능했던 사실은 이미 내외에서 인정된 듯하다.

그러므로 원장이 초의에게 함월 노화상(1691~1770)의 영상(影像, 초상)을 부탁했다는 사실은 불화에 능했던 초의가 대둔사 관련 승려들의 영상을 그리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장은 대둔사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인물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원장의 법계를 추적해 보니 환로(喚老)-해원-궤홍(軌泓)-등인(等仁)-덕준(德俊)-영허-원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그의 법계 중에 해원의 호는 함월이며 자는 천경(天鏡)인데 그의 스승이 바로 대둔사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이다.

특히 해원 함월은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14세에 도창사(道昌寺)로 출가했다.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삼장(三藏)에 모두 능통하였으며, 특히 <화엄경(華嚴經)>과 <선문염송(禪門拈頌)>에 정통하였다. 인욕행(忍辱行)이 남달랐으며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여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특히 스승 해원(海源, 1691~1770)은 환성 지안의 제자로, 함월(涵月)은 바로 해원의 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정은 대둔사의 법계를 잇고 있는 셈이다.

한편 해원 함월의 제자 궤홍(1714~1770)도 대단한 수행력을 가진 승려였다. 그의 호는 완월(翫月)이다. 12세 때 평강(平康) 보월사(寶月寺)로 출가하였고, 해원(海源)에게 불법을 배운 뒤 법맥을 이었으며, 항상 스승을 따라 수도하였다. 만년을 석왕사(釋王寺)에서 지내며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이곳에서 열반하였다. 제자 각웅(覺雄) 등이 다비한 후 사리를 수습하여 부도를 세웠고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아울러 원장의 생애도 살펴보자. 그의 호는 문담(文潭)이며, 어려서 유학과 노장학(老莊學)을 배웠다고 한다. 영허(映虛)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었으며 5년 동안이나 전국의 고승을 찾아 불경을 공부했다. 후일 삼각산에서 7년간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2년간 표충사총섭(表忠祠摠攝)을 역임했고 노년에는 설봉산 석왕사(釋王寺)로 들어가서 스승을 극진히 봉양하였다고도 한다.
그의 비석은 석왕사에 남아 있는데 이는 제자들이 세웠다고 하니 스승에게 극진한 사제의 예를 다한 점에서 그의 수행력과 인품은 그의 제자들에게 다분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된다. 따라서 원장의 법계가 대둔사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초의에게 함월의 영상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럼 그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그가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1856년 1월 10일이다. 편지의 크기는 31.8×46.7cm이다. 편지의 서두에 “경성사 거처에서 소승 원장이 삼가 올립니다(京聖寺寓 小僧元長 謹上狀)”라고 하였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된다.

수레 아래에서 고별한 지 이미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차례 편지를 받았사오나 한 번도 답장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더욱 한탄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새 해가 되었지만 (문후를)살피지 못했습니다. 기체가 이어 만중하신지요. 구구하게 사모하는 제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소승은 겨우 몸을 보존할 만하나 날로 쇠퇴해져서 기력이 옷도 이기지 못할 지경이니 더욱 이 고통을 큰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목어 치는 소리 속에서(魚梵聲裡) 한 해가 서로 바뀌어 (나이) 한 살만 보태졌습니다. 옛날 어리석음이 그대로이니 번거롭게 하기에도 부족합니다. 다만 말씀 드릴 것은 영각을 수년간 경영하시어 지금 완성하셨다니 참으로 뜻 있는 사람이나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 감동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함월노화상(涵月老和尙)의 영상을 조성하는 일은 저의 문중에서 논의하여 약간의 돈을 수합하였습니다만 또 중간에 다 없어지는 폐를 입었는데 이는 좋은 일에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한탄을 어찌 다 하겠습니까. 노화상의 영상과 우리 은사의 진영은 제가 있는 곳에서 다 만들려했으나 천리 먼 길을 옮긴다는 것이 실로 어렵습니다. 따라서 물자를 소략하게 종정께 송부합니다. 노고를 꺼려하지 마시고 힘껏 주선하여 순조롭게 봉안하시고 우리 은사의 영답 일은 종정에게 번거롭지만 일일이 좋도록 상의하여 낭패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오직 믿겠습니다. 이 일은 문손이 할 일이니 어찌 여러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귀하의 주변에서 우리 문중에 노스님을 도와주시는 은택이 아니면 어찌 감히 시작을 도모했겠습니까. 나머지 여러 말들은 모두 종정의 구변에 달렸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잘 살펴주시길 빕니다. 1856년 1월 초10일 소승 원장 머리를 조아리며 올립니다.
京聖寺寓 小僧 元長 謹上狀 草衣大和尙 座下 入納
軒下告別 已經幾多星霜 而間承數次惠書 一未上答 尤不勝?缺 謹伏未審新元 氣體候連爲萬重 有慕區區 無任下誠 小僧姑保形骸 然衰狀日侵 氣力不勝 被衣之際 尤叫此苦 魚梵聲裡 歲律相換 增添一齡 依舊?? 無足仰? 第白 影閣多年經營 而今來告成 眞是有志者成 豈堪感 佩涵月老和尙影像造成事 卽爲發論於諸門庭處 如干收合錢兩矣 又値中間乾沒之弊 此所謂好事多魔 恨歎奈何 老和尙影像與吾恩師眞影 自鄙處 欲爲盡成 而千里遠程 移運實難 故博(薄의 오자)略物材 付送宗正 勿憚勞苦 ?力周旋 順成奉安 而吾恩師影畓事 與宗正爛商好樣區區處 無至狼狽之境 專恃專恃 此事爲其門孫者 豈不萬念 而若非貴邊吾門老眷佑之澤 安敢謀始哉 餘多說話 都在宗正口便 不備 伏惟下照 上書 丙辰 元月 初十日 小僧 元長頓首拜上

원장이 함월 화상의 영상을 준비한 과정에 대해 “함월노화상(涵月老和尙)의 영상을 조성하는 일은 저의 문중에서 논의하여 약간의 돈을 수합하였습니다만 또 중간에 다 없어지는 폐를 입었는데 이는 좋은 일에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함월의 영상을 조성하기 전부터 비용을 염출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십시일반 염출했던 돈이 없어지는 변고를 입었던 듯 한데 어떤 연유로 비용이 망실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또 다른 대둔사와 관련된 내용 중에서 초의에게 의해 발의된 영각이 1857년경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초의는 1851년경 대광명전을 완공했다. 이는 추사 김정희의 해배를 기원하기 위해 권돈인 등의 시주로 완성된 것이다. 대광명전을 완공한 후 초의는 일지암에서 떠나 대광명전 쾌년각에서 지내다가 열반하였다. 그런대 대광명전 내에 조성했던 영각의 완성 시기가 바로 원장의 편지에서 밝혀진 것이다. 이는 바로 원장의 편지에 “영각을 수년간 경영하시어 지금 완성하셨다니 참으로 뜻 있는 사람이나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 감동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내용이다. 참으로 편지의 자료적인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증명된 것이라 하겠다.

대흥사 법계를 이은 석훈이 초의에게 보낸 편지. 석훈의 편지에는 초의가 스승의 비문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다른 한편으로 초의에게 보낸 승려의 편지 중에 수암 석훈(壽庵 碩訓)의 편지가 눈에 띤다. 그와 관련된 법계를 <불조종파계보(佛祖宗派系譜)>에서 살펴보니 그는 호암-연담-의암-은암-경월로 이어지는 법계를 이은 대둔사(대흥사)승려이며 초의의 제자이기도 하다. 호는 수암(壽庵)이며 석훈은 그의 법명이다.

1857년에 쓴 그의 편지에 ‘인편에 들으니 뜻밖에도 완호법사의 비 조성하는 일을 주관하시기 위해 스님께서 천리 밖에 머무르신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시기에 초의는 추사의 상청에 조문하는 일과 완호의 비문을 받기 위해서 상경한 바가 있다.

당시 석훈도 경기도 지역에 머물며 수행을 하고 있었는지 “경기에 머무는 본사 소승 석훈이 올리는 편지(京畿留 本寺 小僧 碩訓 謹上狀)”라고 하였다. 편지의 크기는 33.0×57.5cm이다. 그가 초의에게 보낸 문안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 사이 뵙고 난 후 끝내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일상에서도 장탄식이 그치질 않습니다.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 맑은 계절 중추에 대법하의 기력 만안하시지요. 사모함이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소승은 멀리에서도 생각하시는 은택을 입어 죄 중에도 전처럼 소식하며 지냅니다. 삼가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인편에 들으니 뜻밖에도 완호법사의 비를 조성하는 일을 주관하시기 위해 스님께서 천리 밖에 머무르신다고 합니다. 역역한 마음이 날마다 간절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항상 바라는 것을 마장 없이 잘 이뤄져서 쉽게 본사로 행차하시길 천번 만번 빕니다. 여러 말은 가는 사람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삼가 살피시길... 올립니다. 1857년 8월 16일 소승 석훈 배상 春間伏拜之後 終不聞消息 居常?歎不已 謹伏未審 淸序仲秋 大法下氣力 以時萬安 伏慕區區 無任下誠之至 小僧遠蒙下念之澤 罪中蔬食依前 伏幸伏幸 第白 便聞 千萬意外 先大法師主體碑造成事 尊體留於千里之外云 譯譯之心 無日不切 常以所願者 無魔善成 而易以行次於本寺之地 千萬伏望 餘萬去人口達中 不備 伏惟下鑑 上狀
丁巳 八月 十六日 小僧 碩訓 拜上

석훈이 보낸 편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57년 상경했던 초의의 소식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초의는 완호의 비문을 받기 위해 상경했지만 더욱 긴한 일은 자신과 평생지교를 이어갔던 추사 김정희의 상청에 조문하기 위해서이다.

실제 추사가 돌아간 해는 1856년이지만 초의가 상경해 조문을 올린 일은 그 다음해 대상(大喪) 무렵이었다. 초의는 추사의 상청에 차를 올리고 조문은 받쳐 벗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초의의 조문은 지금도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명문이었다. 벗을 잃은 자신의 슬픔은 담담하게 읊은 이 조문은 수행자의 풍모를 드러내기에 족한 글이라 하겠다.

당시 완호의 비문을 권돈인이 썼는데 당초에는 신위가 쓰기로 약조했지만 세상의 풍랑에 휩쓸렸던 신위는 끝내 비문 글씨를 완성하기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권돈인의 글씨로 스승 완호의 비를 완성했으니 스승에게 성의를 다했던 초의의 성의가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아무튼 석훈이 초의에게 보낸 이 안부 편지는 이러한 사실들을 새삼 상기시키게 한 편지라는 점에서 인연의 인드라망이 얼마나 촘촘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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