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헌 소장, 종교교육학회 춘계대회서 주장

고성 건봉사의 유정 스님의 동상. 유정 스님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은 최악의 관계가 됐다. 이 같은 전란 후 파탄난 조선과 일본 양국의 관계 개선에 ‘불교’가 조정자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철헌 동국대 경주캠퍼스 갈등치유연구소장은 4월 20일 한국종교교육학회가 ‘갈등치유와 종교교육’을 주제로 개최한 춘계학술대회서 이 같이 주장했다.

이 소장은 ‘임진왜란 직후 조·일 갈등 해결을 위한 승려들의 활약’을 통해 전란 이후 양국 정세를 분석하고, 조선과 일본의 승려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폈다. 이 소장에 따르면 조선은 임진왜란 전까지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부산포·제포·염포에 왜관을 설치하고 일정 수준의 무역을 허용하는 회유정책을 폈다. 하지만, 전쟁으로 무역은 끊어지고 매년 대마도에 보냈던 세사미(歲賜米) 200석도 받지 못하게 됐다.

경작지가 적고 쌀이 수확되지 않는 대마도의 경우 빨리 조선과의 교역이 재개되는 것이 시급했다. 이에 대마도주 요시토시는 전쟁 직후인 1599년 사신을 보내고 조선인들을 돌려보내면서 강화를 요청했다. 1600년 일본을 통일한 토쿠카와 이에야스도 조선과의 화친을 적극 추진했지만 조선의 반응은 차가웠다.

1604년 2월 13일 대마도로부터 돌아온 김광이 상소를 올려 “화친을 허락하지 않지 않으면 일본이 군사를 출동시켜 침략할 것”이라 말했으며, 함께 온 다치바나도 “이에야스의 명이라면서 강화를 하지 않으면 또 다시 변란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후 조선은 일본의 사정을 탐색할 필요성을 느끼고 수년간 미뤄 보내지 않았던 탐적사로 유정 스님을 보내기로 했다.

유정이 대마도에 도착하자 대마도주 요시토시는 이 사실을 이에야스에게 통보하고 이에야스는 교토에서 유정을 만나기를 원했다.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정 스님이 정식 사신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와의 만남을 조선과 일본의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로 생각했다. 유정과의 회담에 매우 만족한 이에야스는 회담을 주선한 요시토시에게 히젠에 1,800석의 영지를 주고, 요시토시의 가신인 야나가와에게 1,000석을 줬다.

왜 조선 조정은 관료가 아닌 승려를 사신으로 보냈을까.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일본 주요인사가 독실한 불자였고, 승려들이 외교를 담당하고 있는 특수한 사정을 요인으로 들었다.

실제 일본을 통일한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정토종의 열렬한 신도였고, 임란 당시 제2군 대장으로 이에야스의 측근이 된 가토 기요마사는 일련종 신도로 조선에서 데려간 소년들을 일련종으로 출가시키도 했다.

이 교수는 “유정은 전란 당시 기요마사의 적진에 들어가서 기개를 보였고, 기요마사와 일본 외교승들에게 존경받게 됐다. 일본인들에게도 송운대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면서 “오랫동안 일본의 외교문서는 승려들이 맡아 왔으므로 같은 승려인 유정이 일본 승려와 만나 외교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유리했다. 또한 양국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가진다는 인상을 주기에서도 유정이 적임자였다”고 설명했다.

또한 양국의 갈등해소를 위해서는 조선과 일본의 신뢰를 쌓기 위한 공통분모가 필요했고, 불교가 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갈등해소를 위해서는 신뢰 구축이 필요하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관계치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요인을 두루 갖추고 조선과 일본의 갈등을 조정한 이들이 바로 두 나라 승려들”이라며 “임진왜란 직후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실마리는 불교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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