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승찬과 〈신심명〉

〈신심명〉, 깨달음의 정수 기록
달마선의 기본사상 바탕으로
여래장과 반야, 남방 현학 융화
도교의 ‘자연회귀’까지 담아

〈신심명(信心名)〉은 3조 승찬 대사의 저술로서 깨달음의 정수를 기록한 것이다. 〈신심명〉은 중국 초기 선종의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승찬 개인의 업적으로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신심명〉의 내용은 전체적인 불교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도교의 자연회귀사상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우리들은 〈신심명〉을 통해서 3조 승찬의 선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신심명〉과 유사한 이름의 우두종 법융선사의 저작으로 〈신명(信銘)〉이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신심명〉이 승찬이 지은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3조 승찬대사는 처음에 거사의 신분으로 혜가를 배알하였다. 당시 승찬의 나이는 이미 40세였다. 그 후 그는 서주 완공산(舒州 晥公山)에 은거했으며, 북위 무제(560-578)의 훼불 때는 태호현 사공산(太湖縣 司空山)에 은거하기도 했다고 한다. 3조 승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전설과 고사가 전해져 온다. 2조 혜가를 배알하기 전 그는 몸에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병고로 인해서 본인이 지은 죄업장이 너무 두터워서 이러한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반드시 철저한 참회를 하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혜가대사에게 말하기를 “제자의 몸은 질병이 감싸고 있습니다, 화상에게 죄를 참회하기를 청합니다”고 하자, 혜가가 대답하기를 “너의 죄를 가지고 와서, 너와 더불어 참회하라”고 하자, 승찬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죄를 찾기가 어렵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이 고사는 지금도 중국 선종의 유명한 공안 중에 하나로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심명〉의 저작의 시기는 6세기 후기 혹은 7세기 초이다. 이미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고 수백 년이 지난 후이다. 이 기간에 불교는 외부적으로는 중국 본토의 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많은 발전과 변화를 이어 가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각종 의학파(義學派ㆍ남북조시대) 내지 종파가 파생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때문에 〈신심명〉은 역사를 아우르고 시대의 배경 및 변화과정을 흡수해서 지어진 문헌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신심명〉은 달마선의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 여래장사상과 반야사상을 조화롭게 융화하면서, 당시 남방에서 유행하고 있는 현학까지도 흡수한 독특하고도 매우 선명한 중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림, 강병호

 

〈신심명〉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기본적으로는 달마대사의 벽관수행법을 계승하면서 일종의 여래장불성을 직관으로 자증(自證)하는 새로운 수행법이다. 때문에 인도선의 주축이 되었던 전통차제 수행법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달마선법은 여래장인 자각성지(自覺性智)할 것을 고도로 중시했다.(是諸如來自覺聖智所得) 달마가 주장 했던 이입(理入)은 비록 아주 성숙된 돈오의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본질상에서 직각내증(直覺內證)을 주장했다. 때문에 자각성지(自覺聖智)는 본체론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어떤 측면에서 여래장(自覺性智ㆍ自覺聖智)은 위진 남북조의 본체론과 수당의 심성론과 유사점 및 불교의 불성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반드시 혜가 승찬에게도 일정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이러한 사상적 계승의 바탕위에서 본인의 사상을 심화시켰을 것이며, 〈신심명〉에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융흥편년통론(隆興編年通論)〉에서 승찬 스님의 평가를 보면 “〈신심명〉은 자심을 청정히 하고 언상을 여읜 달마의 안심법문과 혜가의 ‘만법개여, 신불불이(萬法皆如, 身佛不二)’의 바탕위에서 자성청정여래장설을 결합했고, 〈유마경〉의 불이법문과 반야론 사상을 흡수하고 통합해서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했다”고 평하고 있다. 개괄적으로 말하면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실상불이관(實相不二觀-眞如法界ㆍ無他無自)이고, 두 번째는 중도실상관(中道實相觀- 一心不生ㆍ萬法無咎)이고, 세 번째는 자연수행관(自然修行觀- 一種平懷ㆍ泯然自盡)이다.

〈신심명〉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먼저 수행강령으로 “반연을 따르지 말 것이며, 억지로 자기를 억누르지도 말고 구태여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스스로 다해서 소멸될 것이다.…, 진(眞)을 구할 필요도 없으며, 오직 쉬면 나타난다.(莫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不用求眞, 唯須息見)”고 했다. 즉 도는 대상, 경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심과 경계가 서로 대립해서 들어가는 경계도 아니고, 심식분별의 관찰로 획득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직하에 심성여여(心性如如)를 체현해서 일체망견을 소멸하면 자연히 청정본성이 들어난다는 것이다. 즉 진을 구하지 않고 오직 망상만 쉬면 나타난 다는 것이다. 다음은 수행관으로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다. 지자는 무위하고,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얽어맨다.(勿惡六塵, 六塵不惡, 還同正覺, 智者無爲, 愚人自縛)”고 하였다. 그는 현실생활 속에서 스스로 자유로울 것을 노래했는데, 즉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를 깨닫기를 주장 했다. 즉 육진의 경계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현실의 주체인 육진(대상ㆍ현상)을 싫어하지 않으면서, 위에서처럼 쉬기만 하면 곧 정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자는 무위하고,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를 자박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은 수행실천관으로 “구속에서 자연스럽고, 체에 주하는 것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도에 계합하고, 스스로 자적해서 번뇌가 끊어진다.(放之自然, 體無去住, 任性合道, 逍遙絶惱)”고 하였는데, 이 부분은 노장의 현학의 색채가 농후하다. 즉 노장사상의 현학화 표현이다. 대만의 인순 스님도 무창법난 이후 달마선은 중국화, 특히 노장화 현학화 되었다고 했다.

〈신심명〉의 첫 구절에 나오는 ‘지도무난, 유겸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에서 도(道)에는 두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불교의 도(道)를 말하는데, 통상적으로 “적멸, 진여, 열반, 불생불멸 등 해탈의 최고봉인 정각의 원만한 상태를 말한다. 즉 본연여실(本然如實)한 자타내외(自他內外) 등의 무분별지(無分別智)의 불이(不二)경계이다. 두 번째는 중국전통철학인 노장학에서 말하는 도(道)로서, 여기서 도(道)는 만법(만물)의 근원이며 형이상학의 최고봉을 말한다. 〈신심명〉에서는 이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불교의 도(道)는 생략하고, 도교의 도(道)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해 보겠다.

도(道)는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의 핵심 개념이며, 노자사상의 전체적인 중심 사상이 되고, 특정한 상황에 따라서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각기 다르며,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①형이상(形而上)의 실존자이며, 곧 우주만물의 최초의 본원의 구성자이다. 즉 감각적으로 느끼거나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소리로 듣거나 촉각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②우주 만물의 발생, 존재, 운동의 규칙을 가리키며, ③인류사회의 일종의 준칙 법칙 표준이 된다.

또 도(道)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 도(道)는 무상(無狀), 무상지물(無象之物), 간불견(看不見ㆍ보아도 보이지 않다), 모불저(摸不著ㆍ만져도 잡히지 않는다)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도(道)는 만물을 생한다고 한다. 즉 “도는 하나를 생하고, 하나는 둘을 생하고, 둘은 셋을 생하고, 셋은 만물을 생한다. 만물은 음양을 포함하고 있으며, (음양)기가 화합해서, (만물의)조화를 이룬다.(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萬物負陰而抱陽,沖氣以爲和)”는 것이다. 여기서 도(道)는 곧 하나(一)를 가리키는데, 곧 시작과 생산을 말한다. 세 번째 도(道)는 운동을 응용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천하의 만물은 유(有)에서 생하고, 유(有)는 무(無)에서 생한다고 한다. 무(無)는 곧 만물(萬物)을 시작하는 원자(原子)라는 것이며, 유(有)와 무(無)의 대립의 통일체가 바로 도(道)라는 것이다. 즉 우주만물이 생산한 현상세계와 그 발전은 모두 무(無)에서 유(有)로 시작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곧 무중생유(無中生有ㆍ무의 가운데서 유가 난다)라는 것이다.

또, 도(道)의 개념을 대표하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 하나는 내재적 존재성 이라고 부르며, 두 번째는 초월성이라고 부른다. 도(道)의 내재적 존재성은 어떠한 사물도 도(道)를 여의고 존재할 수 없으며, 더욱더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도생만물(道生萬物)’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만물이 다시 어떠한 모양 형상으로 변하거나, 혹은 소실되거나 증가해도 도(道)는 완전히 불변하며, 절대로 영향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도(道)의 초월성이다. 때문에 곧 도(道)는 구경진실(究竟眞實)를 대표하며, 최후(最後)、최종(最終)을 말하며 진정으로 유일하고(眞正唯一) 절대적인 구경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道)가 사람들의 의지로 전이(轉移)되는 객관적인 규율이 아니면, 전체 우주는 오직 물질과 객관적 규율만 존재하는가? 불교는 단독적인 객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마음의 조작이라고 여긴다. 객관적 세계는 각자 주관적 세계가 투영된 세계라는 것이다. 즉 환(幻)이라는 것이다. 유식에서도 유식무경, 만법유식(唯識無境, 萬法唯識)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종은 ‘즉심즉불, 심외별법, 심리별법(卽心卽佛, 心外別法, 心離別法)이라고 강조한다. 또 유교에서 인(仁)을, 도교는 도(道)를 최고의 경지로 삼지만, 불교는 연기론인 공성(空性)이 존재의 근원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 존재의 근원인 공성(空性) 존재의 근원을 확실히 깨달으면, 바로 구경이고 최고의 정각열반이며 해탈이라는 것이다. 한편 〈신심명〉에서는 불교는 심(心)을 강조하면서, 무분별심(無分別心)을 최고의 도(道)로 삼았다. 결론적으로 〈신심명〉에서 도(道)는, 불교의 도(道)와 도교의 도(道)가 혼합 되어진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곧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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