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숙 (60·조계종 자원봉사단 1기)

 

고단한 삶이 가져온 불연
힘든 결혼 생활로 부처님 찾아
법당 청소하며 부처님과 대화
“부처님께 이 몸 바치겠습니다”
성불사·화계사·수덕사 등 인연
입·눈·귀 막고 3년 설거지봉사

설거지, 빨래, 청소 등 사내(寺內) 울력은 물론이고 목욕봉사, 따주기봉사, 급식봉사, 호스피스 등 봉사단체에서 진행하는 자원봉사와 군법당 불사 등 군포교까지, 30여 년을 무주상보시와 이타행으로 살고 있는 이가 있다. 그의 바라밀은 말없는 전법이 되었고, 그의 이름 뒤에 붙은 ‘보살’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우바이의 다른 이름이 아닌 진정한 보살의 의미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1995년 창립된 조계종자원봉사단 탄생의 시발점이자 1기 단원인 오명숙 보살이다.

 

시련이 가져온 불연
오 보살의 불연은 시련에서 시작됐다. 오 보살은 부모님이 강력히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편안하지 못했다. 신혼살림을 서울에서 시작했지만 얼마 안 되어 시아버지가 살고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시동생이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오 보살 내외가 시아버지를 모셔야 했다. 시아버지를 모시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여건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단칸방이었다. 남편의 형편도 좋지 못했고, 시집의 형편도 좋지 않았다. 오 보살은 자신의 처지가 왠지 초라해 보였고 마음이 아팠다. 부모님과 친정 식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강행한 결혼이었다. 오 보살은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친정 식구들이 그리워도 찾아갈 면목이 없었다. 삶은 무거웠다. 그래도 오 보살은 방황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오 보살은 옆집 할머니가 절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 보살은 다음날부터 옆집 할머니를 따라 절엘 다니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 보살에게 불교는 모태였다. 오랜 동안 잊고 살았을 뿐이었다. 오 보살은 열심히 절엘 다녔다. 절에 가는 것으로 언제 어긋날지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 돌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오 보살은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 다른 도량을 찾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마음가짐과는 다른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섰다.

“부처님, 제가 부처님 도량에 평생 제 몸 하나 바치겠으니 저희 가정이 부처님 가피 속에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오 보살의 첫 서원이었다. 기복에서 출발한 서원이었지만 그 서원은 지금의 오명숙을 있게 한 서원이었다. 오 보살은 100일 동안 법당 청소를 하기로 발원하고 매일 법당에 들어 청소를 하면서 부처님과 이야기를 했다. 그날그날 일어난 이야기를 부처님께 나누며 고단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처음엔 힘겨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시간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오 보살은 그렇게 불교를 시작했다.

 

보고 싶은 엄마, 그리고 부처님
오 보살이 부산으로 내려온 지 7년이 되던 해였다. 오 보살의 신행은 하루하루 수행으로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 보살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친다. 일곱 살이었던 딸아이가 유괴를 당하는 황망한 일이 벌어졌다. 오 보살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오 보살은 삶이 끝난 것 같은 절망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천만다행이었다. 오 보살의 딸은 유괴를 당한 지 4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딸을 다시 찾은 오 보살은 두 번 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딸의 유괴과정을 알게 된 오 보살은 또 한 번 깊은 우울을 겪게 된다. 오 보살의 딸을 유괴한 범인은 여자였으며 전과가 있었다. 오 보살의 딸이 예쁘다고 생각한 범인은 일곱 살인 오 보살의 딸을 유괴해 나이가 들 때까지 키울 작정이었다. 그리고 돈을 받고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오 보살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 보살은 도저히 부산에서 살 자신이 없었다. 오 보살 식구는 서울로 다시 올라간다. 오 보살은 그렇게 힘들 때마다 어머니와 친정 식구들이 생각났다. 오 보살도 부모이기 이전에 여자이고 딸이었다. 엄마를 찾아가 울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오 보살은 보고 싶은 엄마를 생각하며 다시 부처님을 찾았다.

 

시련을 수행으로…30년 인연 화계사
오 보살이 서울에 올라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은 당시 숭산 스님이 계시던 화계사였다. 우연히 올라 탄 버스가 오 보살을 화계사에 내려 주었다. 오 보살은 화계사에 자신의 부처님을 모시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형편이 좋지 못했던 오 보살로서는 부처님 전에 마땅히 공덕을 지을 것이 없었다. 불전함에 보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오 보살이었다. 오 보살은 부산에서 처음 부처님 전에 올렸던 서원을 떠올렸다. 오 보살은 그 때 그 서원대로 ‘이 한 몸’을 바치기로 했다. 그것이 오 보살의 유일한 보시였다. 오 보살은 부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절일을 돕기로 했다. 먼저 후원으로 향했다. 설거지 울력부터 하기로 했다. 하지만 부처님 도량도 세상살이는 ‘세상살이’였다.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던가. 모든 것이 오 보살 뜻대로만 돌아가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화계사의 신도들도 대부분이 노보살이었다. 그 때, 오 보살은 스물일곱 살이었다. 부산의 절에 다닐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대중이 많았고, 조직의 구성도 달랐다. 대중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말도 많다는 것이었다. 이삼십년, 많게는 삼사십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노보살들의 시선에 이십대의 오 보살은 왠지 편치가 않았다. 더구나 후원에 나와 시키지도 않은 설거지를 도맡아 하고 있는 오 보살은 누가 보아도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흔치 않은 모습이었기에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시선이 곱지 않으니 생활은 불편하고 힘들었다. 오 보살이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욱 힘들었다.

마음을 둘 곳이 없어 부처님을 찾았고, 마음 다스리고 공덕 지으려고 후원을 찾은 것인데 삶은 여전히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오 보살은 그 가시밭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야할 길이라면 어려운 길일지라도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오 보살은 귀 막고 입 막고 눈도 감고 설거지만 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부산에서 법당 청소를 할 때처럼 오 보살은 다른 사람이 먹은 그릇을 닦으며 자신을 닦았다. 9년 동안 촛대를 닦으며 삶에 대해 생각했다. 오 보살의 삶은 그렇게 하루하루 의미를 거듭했고,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노보살들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졌고, 마음도 조금씩 열렸다. 오 보살은 15년 동안 자비로 노보살들의 성지순례를 모셨다. 그렇게 오 보살은 화계사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나중엔 공양주까지 하게 됐다. 오 보살은 조계종 전 총무원장 법장의 스님의 유발상좌로 시봉하며 수덕사의 촛대도 23년 동안 닦았다고 한다. 그렇게 오 보살은 봉사신행으로 자신을 닦았고, 삶에 찾아드는 어려움들로 삶을 넘어섰다.

“새벽 4시에 딸아이를 업고 절엘 올랐어요. 그리고 불교전법대학에서 불교 공부도 했어요. 포교사도 되었고, 법사도 되었어요. 제가 처음 화계사를 찾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흘렀네요.”

화계사 마당 한 편에서 만난 오 보살이 지난날을 회상했다.

 

삼풍백화점 참사, 자원봉사단 창립
995년 6월 29일. 서울의 유명 백화점 건물이 붕괴되어 500여 명이 사망하는 초유의 참사가 발생한다.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그 현장으로 제일 먼저 달려간 자원봉사자가 오 보살이다. 화계사 봉사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오 보살은 자원봉사단을 꾸려 현장으로 달려갔고, 유가족들과 현장 관계자들을 위해 한 달 동안 주먹밥을 날랐다. 그 외에도 연천 수해지구, 고성 산불현장, 대구 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사고현장 등 웬만한 재난 현장엔 오 보살이 있었다.

오 보살은 13년 동안 화계사 봉사부를 이끌며 ‘봉사’에 눈을 떴고, 그것이 평생 자원봉사자의 길을 걷는 단초가 되었다. 화계사 인근에 있는 자비의 집 운영위원장을 23년 째 맡고 있는 오 보살은 불우한 어르신들을 위한 급식봉사, 장애시설의 목욕봉사, 따주기봉사, 빨래봉사, 호스피스, 교도소 봉사 등 안 해본 봉사가 없다. 모두 자원봉사다.

“어느 순간부터 오명숙의 불교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몸 하나 위해 부처님을 찾기 시작했지만 부처님 말씀 공부하면서 여법한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어요. ‘봉사’가 그 모색의 답이었죠.”

쉽지 않은 삶을 살아온 오 보살은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오 보살은 그 동안의 봉사가 그저 불법의 실천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오 보살에게는 이미 마음이 지어놓은 것이 있었고, 그것은 ‘봉사’였다.

오 보살은 누구보다 봉사에 대한 원력이 뛰어났다. 그런 오 보살의 원력은 더 큰 원력으로 회향된다. 당시 자원봉사에 대한 저변이 미약함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오 보살은 좀 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조직에서 자원봉사에 대한 원력을 품어주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조계종 총무원이 오 보살의 원력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1995년 8월 조계종자원봉사단이 창립된다. 오 보살은 1기 단원이다. 그렇게 오명숙의 불심은 점점 더 큰 불사를 이루어냈고, 불사가 거듭되면서 힘들었던 ‘오명숙’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오 보살이 후원하는 5사단 금강법당에서 장병들이 법회를 열고 있다.
오 보살(왼쪽에서 네번째)은 조계종 前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유발 상좌로 시봉했다. 사진은 2004년 불일 미술관에서 법장 스님과 기념촬영.

자원봉사와 군포교 전법 30년
화계사 봉사부에서 ‘봉사’ 눈 떠
목욕·빨래·급식·호스피스 등
자원봉사단 창립 건의, 1기 단원
삼풍백화점 참사 현장 자원봉사
한 달간 유가족 주먹밥 날라
불교전법대학 포교사 통과
1년 모금해 무너진 군법당 중건
군법당 정기법회, 공양 위문
5사단 금강법당 후원회장 등
암투병 중에도 전법 홍포

 

이제는 전법…군포교
1996년, 강원도 화천의 15사단 내에 있는 법당(지장사)이 산사태로 무너졌다.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법당에서 자고 있던 4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오 보살은 역시 봉사단을 꾸려 현장을 찾았다. 법당은 사라졌고, 아까운 청춘들이 세상을 떠났다. 자식에 대한 애달픈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오 보살이었다. 세상을 떠난 병사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법당만은 다시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법당이 그대로 사라질 판이었다. 오 보살은 자신에게 돌아온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오 보살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미아8동 자비의 집 봉사자 200여 명과 함께 1년 동안 천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지장사를 다시 세웠다. 그렇게 군포교 현장과 인연을 맺은 오 보살은 또 한 번 자신의 불심을 넓힌다. 이제는 전법포교였다. 지장사를 다시 세운 오 보살은 거의 매달 도반들과 지장사를 찾아 법회를 열고, 공양을 마련해 장병들을 위문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오 보살은 지장사를 찾았다. 그리고 지금은 후원금으로 그 보시를 이어가고 있다.

“제가 준비해간 음식으로 공양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법회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장병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져요. 제가 어려운 시간 보낼 때, 제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것이 부처님이었고, 저를 받아준 곳이 부처님 도량이었습니다. 저에게 불교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느꼈던 불교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저의 전법이고 포교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법문 나누고 공양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군법당을 찾았을 때 식구가 늘어나 있는 것을 보는 날에는 더욱 행복해요.”

오 보살은 지장사 말고도 5사단 전차대대 금강법당 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년째다. 28사단 81연대와 GOP 법당도 오 보살이 돕고 있다.

오 보살은 몇 년 전에 암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는 투병 중에도 불심을 놓지 않았다. 주변의 환자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 보살이 살아온 이야기는 다름 아닌 부처님 공부한 이야기였다. 오 보살 주위엔 환자들이 늘어갔다. 오 보살의 이야기가 소문이 난 것이다. 힘들고 무료한 환자들이 오 보살을 찾았고 오 보살은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올 땐 <금강경>을 나누어 주었다. 전법과 포교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여법하게 사는 것이 전법이었다.

오 보살의 봉사와 전법의 30년 신행은 쉽지 않은 불심이다. 쉽지 않은 그 불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묻자 오 보살은 “처음 부처님 앞에서 서원했던 그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고 했다.

8년 전, 어느 날 오 보살은 남편으로부터 ‘보살’이라는 명호를 받았다고 한다. 평소 오 보살의 신행생활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남편이 삼배를 하며 “보살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법은 따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우바이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래도 우리가 부처님 가까이 있음일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오 보살을 누군가 부른다. “보살님!”

 

 

오명숙 보살은?

1959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부산 장산 성불사에서 7년간 수행했고, 불교전법대학에서 포교사 과정을 통과했다. 서울 화계사와 수덕사에서 30년 가까이 수행하고 있으며, 화계사 봉사부장, 미아8동 ‘자비의 집’ 운영위원장, 조계종 자원봉사단 1기, 5사단 전차대대 후원회장 등을 맡으며 자원봉사와 전법의 길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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