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억울한 사형수 한춘도

청산가리 구해준 죄로 살인 누명
“佛法 좀 더 일찍 만났다면…”
“법 집행 책임 있고 신중해야”

 

“억울한 사형수 한춘도 씨를 살려주세요”
1991년 초 한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형수 한춘도(40)가 억울하니 구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 씨는 정부(情婦)의 남편을 살해(공범)한 죄로 사형수가 됐다. 내가 한 씨를 만나게 된 건 당시 한 씨와 함께 복역 중인 여러 재소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그 여인은 한 씨와 함께 복역 중인 재소자의 부인이었다. 그 여인은 남편을 면회하면서 남편으로부터 한춘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남편의 부탁으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1997년 한춘도 그가 형집행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나에게 결백을 주장하는 500여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때의 한춘도를 생각하면 아직도 안타깝기만 하다. 잘못된 만남이 부른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 부산에서 버스운전기사로 일하던 한 씨는 동료들과 부산의 한 카바레에 놀러 갔다가 임 여인을 만나게 됐다. 임 씨는 한 씨에게 자신을 과부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나게 됐고, 급기야 깊은 관계가 됐다. 불륜이었다. 한 씨는 처와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의 관계는 위기를 맞는다. 자신을 과부라고 소개했던 임 씨 역시 불륜이었다. 임 씨는 유부녀였다. 중동으로 취업을 나가 있던 남편이 귀국을 했고, 임 씨의 남편이 임 씨를 수상하게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들통난다.

어느 날, 한 씨가 임 씨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낯선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돌아온 임 씨의 남편이었다. 임 씨는 그때서야 한 씨에게 자신이 유부녀임을 밝혔다. 임 씨의 남편이 임 씨를 의심하게 되면서부터 임 씨는 남편과 자주 다투게 되었고, 남편으로부터 손찌검까지 당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어느 날, 임 씨는 한 씨에게 청산가리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임 씨는 남편이 외국에서 술을 많이 마셔서 시력이 안 좋아졌다며, 눈을 치료하기 위해 시골로 요양을 가려고 하는데 그 동네에 꿩이 많아 보양으로 쓸 꿩을 잡는 데 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한 씨도 구할 방법이 마땅히 없어 거절했으나 임 씨가 몇 차례 더 부탁을 하자 할 수 없이 청산가리를 구해준다. 그 청산가리가 비극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임 씨는 그 청산가리로 꿩을 잡은 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다. 그리고 임 씨는 범행을 숨기기 위해 병사로 신고를 했고 화장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했다. 그런데 임 씨 남편의 가족들이 의혹을 제기함에 따라 수사가 진행됐고 임 씨의 범행이 밝혀졌다. 임 씨가 살인죄로 구속 기소되는데, 문제는 한 씨도 공범으로 구속 기소된 것이다. 청산가리가 문제였다. 임 씨는 의심의 여지없이 사형이 확정된다. 그리고 한 씨는 1심에서 범행 실행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받는다. 하지만 기소 자체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한 씨 입장에서 무기징역은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한 씨는 당연히 항소를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 항소가 문제가 되었다. 반성이 없다는 이유로 형이 더해졌다. 한 씨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한 남자의 인생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다.

한 씨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임 씨의 번복된 진술 때문이었다. 처음 임 씨의 진술은 한 씨가 범행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임 씨가 범행을 한 씨와 공모했다고 진술을 번복한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수사기관과 연관이 있었다. 경찰은 한 씨를 처음부터 공범자로 확신했고, 그 확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임 씨의 진술을 유도했던 것 같다.

부산구치소에 수감된 한 씨는 사형 확정판결이 난 후 각계에 자신의 결백을 호소한다. 그중 한 씨의 결백에 공감하게 된 재소자들도 나섰고, 마침내는 나와 만나게 된 것이다.

한 씨는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스스로 머리를 깎고 계와 불명을 받아 불법(佛法)에 귀의했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 ‘교화’에 앞장섰다. 그런 한 씨의 모습은 같은 재소자들에게도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한 씨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재소자들 중에는 출소한 후에 한춘도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고 했다.

나는 한 씨가 한 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벌인 불륜으로 사형수에 이르게 된 것은 법과 그 제도를 집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좀 더 신중했다면, 한 씨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여주었다면 한 사람의 인생은 또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법무부에 두 차례나 집행연기를 신청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에 진상조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부산변호사회가 재수사에 나서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한 씨는 1997년 12월 30일 형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긴 세월 여러 재소자들을 위해 구명과 교화를 해왔지만 사형수 한춘도는 너무나 안타까운 인연 중의 하나다. 그가 부처님 법을 좀 더 일찍 만났다면 그는 아마도 그렇게 이 세상에서 멀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이 아닌 길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면 그런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 전하는 일이 불사 중의 불사인 이유를 또 한 번 깨닫게 한 인연이었다.

삼중 스님(좌)이 한춘도의 가족들을 자비사로 초청해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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