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친자는 자유자재하여 중생처럼 업식(業識)에 끄달리지 아니한다.

<전등록>에 온조상서가 규봉 스님에게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어디에 의탁하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규봉 스님은 일체 중생이 모두 신령스럽게 밝은 각성을 갖추고 있어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그 바탕이 곧 법신불임을 굳게 믿고 깨달으면 본래 스스로 생()이 없는데 무슨 의탁할 때가 있겠는가하고 답했다.

각성은 신령스럽게 밝고 어둡지 않아 항상 분명히 알며,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라는 말처럼 태어나도 태어난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어디서 오지도 않았고 어디로 가지도 않는다.

다만 공적(空寂)으로서 자체를 삼고 육신을 인정하지 말며, 신령스런 앎, 영지(靈智)로서 자기 마음을 삼고 망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혹 망념이 일어난다고 해도 찰라에 이 뭣고로 그 뿌리를 잘라 버리고 전혀 따르지 않으면 죽을때도 저절로 그 업이 얽어 맬 수 없고, 중음(中陰)에 있더라도 가는 곳이 자유로워 천상이나 인간의 마음대로 의탁한다. 이것이 곧 진심(眞心)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 생각된다.

각성을 이 뭣고로 관하고 보아 깨닫고 일상 생활속에서
행하는 것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는 一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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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을 이 뭣고로 관()하고 보아 깨닫고 일상 생활속에서 행하는 것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는 일법(一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자기의 망심을 쥐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묶여져 있는 것일까?

깨달음은 이러한 망심이 만든 관념의 함정서 벗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망심을 철저하게 실감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만든 관념에 구속돼 있다는 것을 모른다. 깨달음은 우리가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구불만, 공포, 불안, 짜증, 괴로움 등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물속에 스스로 갇혀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하고 신통묘용한 한 물건을 깨닫지 못해서 생사윤회를 거듭 하는 것이다. 그 정확한 답은 오직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이다.

사자교인(獅子咬人) 한로축괴(漢盧逐塊)이라는 말이 있다.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그 흙덩이를 쫓아 밖으로 가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한테 달려든다는 의미이다.

온갖 망념을 쫓아 경계에 끄달려 가지 말고, 생각의 뿌리인 마음을 이 뭣고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하라는 말이다. 한 몸속에 있으면서도 머리로 헤아리는 분별심서 내 가슴속의 본각(本覺)자리에 이르는 가장 길고 먼 여행을 금생에 이 뭣고로 끝내야 생사고(生死苦)인 육도윤회의 바다서 벗어나게 된다.

부설거사의 사부송(四浮頌)에 첫째는 처자권속이 아무리 많고, 금은보화가 산더미 같이 쌓였더라도 임종시에는 고혼만 홀로 가니 모두 다 허망한 것이고, 둘째로는 날마다 분주하게 출세길에 바쁘다가 벼슬이 겨우 높아지면 이미 인생은 백발이다. 그래서 황혼길이 가까운데 염라대왕이 사람의 벼슬 높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생각하면 역시 다 허망한 것이다.

셋째로는 마음씨가 곱고, 감정이 풍부한 시()와 문장으로 천하 사람을 웃기고 울려서 가볍게 보더라도 아만심만 더할 뿐 자기의 생명을 자유로이 못하니 생각하면 또 허망하다.

마지막으로는 설법을 잘해서 구름과 비와 같이 막힘이 없고 거룩해 하늘서 꽃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능히 생사를 면치 못하니 생각하면 허망해서 뜨고 뜬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우리 중생은 무상한 것에 목숨 걸고 귀중한 생명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이 뭣고수행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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