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역사문화교실...한정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주제 : 〈삼국유사〉와 석굴암
 

미술작품을 연구할 때 문헌사료는 매우 중요하다. 고대 미술작품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감상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 불교미술사서 불교미술의 기준작으로 확고히 정착한 석굴암을 삼국유사를 근간해 분석하는 강연이 펼쳐졌다. 한정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4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박물관역사문화교실에서 ‘〈삼국유사〉와 석굴암’을 주제로 강연했다.

한정호 교수는… 동국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했으며 전공은 불교미술이다. 통도사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 동국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백제사찰연구〉 〈유물로 본 신라 황룡사〉등이 있다.

미술사 연구에는 사료가 가장 중요해…
석굴암은 〈삼국유사〉통해 시기 밝혀져
역사적 ‘기준작’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석굴암은 8세기 중엽 신라 불교미술의 기준작으로 확고하게 정착됐습니다. 따라서 절대연대가 확인되지 않은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품은 석굴암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 제작시기를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석굴암이 8세기 중엽의 기준작으로 설정된 근본적인 원인은 13세기 말에 편찬된 〈삼국유사〉권 제5 효선 제9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의 천보(天寶)10년(751) 불국사 창건기록에 근거합니다.

〈삼국유사〉의 석굴암 창건기록 분석
〈삼국유사〉 권5 효선편에 실려 있는 ‘대성효이세부모조’는 석굴암 창건에 관한 최고의 기록입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석굴암 창건배경과 시기에 대해서는 이 기록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습니다. ‘대성효이세부모조’는 〈향전(鄕傳)〉과 불국사에 전래되던 〈사중기(寺中記)〉를 바탕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내용의 많은 부분은 〈향전〉을 인용한 듯 보입니다.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는 크고 이마가 평하여 성과 같으므로 대성(大城)이라 이름했다. 집이 가난하여 생활할 수 없었으므로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고용살이를 해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받아 의식의 비용으로 삼았다. 그때 개사(開士) 점개(漸開)가 육륜회(六輪會)를 흥륜사에서 베풀려고 하여 시주를 얻고자 복안의 집에 왔다. 복안이 베 50필을 보시하니, 점개가 축원하여 말하기를 “단월이 보시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고 지켜주며 하나를 보시하여 만 배를 얻고 안락하여 장수하소서”라고 했다.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가 어머니에게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우리는 분명히 전생에 선업이 없어 지금 이렇게 곤궁한 것인데, 지금 또 보시하지 않으면 내세에는 더욱 곤란할 것이니,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를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어머니는 허락했고 이에 그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는데, 이날 밤 국상(國相) 김문량의 집 하늘에서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네 집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이에 임신해 아이를 낳으니 7일 뒤 왼손에 금간자(金簡子)가 있어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것으로 이름하고 그 어머니를 집에 모셔와 함께 봉양했다.

이야기 속의 인물로 대성의 어머니인 경조와 부자 복안, 승려 점개를 등장시켰는데 ‘경사스러운 조상’, ‘복 많고 평안한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경조와 복안은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설화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작위적인 작명으로 보입니다. 흥륜사의 승려로 그려진 점개 또한 승려의 법명으로는 생경한 이름으로 대성을 보시의 길로 인도함으로써 이야기의 발단을 제시하는 역할에 맞게 설정된 이름으로 볼 수 있죠.

등장인물 가운데 실존 인물은 김대성과 김문량인데, 이들은 각 경덕왕대 중시(中侍)를 역임한 김대정과 성덕왕 때 중시였던 김문량으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설화가 형성된 시점과 기저에 깔려있는 설화의 형성배경을 파악해야 합니다. 위의 기사에서 등장인물을 제외하고 설화의 형성시기와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요소는 승려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된 개사(開士)와 육륜회(六輪會)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개사는 원래 불교경전에서 보살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개사가 보살에 대한 지칭에서 고승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화된 용례를 검토한 결과 모두 고려시대에 집중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또한 이야기는 점개가 흥륜사 육륜회에 시주를 권선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점개가 말한 보시에 대한 공덕으로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게 된다”는 ‘만 배 이익’ 역시 〈석가여래행적송〉의 “봄에 한 알의 씨를 뿌리면, 가을에 만 알의 열매를 거둔다”와 같이 고려후기 불교계에서 주로 등장합니다.

한편 육륜회는 ‘점찰참회법’의 일종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육륜회라는 용례는 본 자료가 유일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육륜법의 점괘에만 중심을 둬 점찰법회가 육륜회로 격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육륜회는 세 종류의 점찰법 가운데 6륜상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6륜상법은 숫자가 기입된 6개의 목륜을 던져 나오는 숫자에 따라 삼세(三世) 중 받아야 할 선악을 점찰하는 것으로 전세와 현세로 이어지는 김대성의 윤회와 연결됩니다. 대성이 흥륜사의 육륜회에 보시한 결과 국상 김문량의 집에 태어나고, 태어난 아이가 대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등장시킨 7일이라는 기한과 금간자(金簡子)는 고려시대에 유행한 점찰신앙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토함산에서 행했던 살생에 대한 참회와 회향의 의미를 담은 장수사, 불국사, 석불사의 창건 역시 점찰신앙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향전〉에서 인용한 김대성 설화는 고려시대 점찰신앙을 배경으로 형성된 설화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장성하자 사냥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서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먹겠다"고 하니,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주기를 청했다. 귀신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짓겠느냐?”고 하니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깨어 보니 땀이 흘러 요를 적셨다. 그 뒤로는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장수사(長壽寺)를 곰 잡았던 곳에 세웠다. 이로 인하여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의 원력이 더욱 두터워 이승의 양친을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석굴암)를 세워 신림(神琳), 표훈(表訓) 두 성사를 청하여 각 거주하게 했다. 불상의 설비를 크게 펴서 양육한 수고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듣기 드문 일이다. 착한 보시의 영험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실의 뚜껑을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쪽으로 깨졌다. 대성이 분해하다가 잠들었더니,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대성이 막 일어나 남쪽 고개로 쫓아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하였다. 이로써 그곳을 향령(香嶺)이라고 하였다. 불국사의 운제와 석탑은 돌과 나무를 조각한 기공이 동도의 여러 절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이어지는 장수사, 불국사, 석불사의 창건은 신앙적으로 회향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 인물에 의해 세 사찰이 동시기에 건립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동일 발원자에 의해 인근에 창건된 사찰이라면 세 사찰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앞서는 석가탑 발견 중수문서 가운데 1024년에 작성된 〈무구정광탑중수기〉에는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동참하지만 장수사와 석불사에 승려들이 관여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1038년에 작성된 〈서석탑중수기〉에 여러 사찰의 시주품목을 거명하는 가운데 석불사의 승려 언응(彦應)이 콩 4두를 시주했다는 정도로 기록되어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는 사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위의 기록대로면 김대성이 창건한 세 사찰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은 장수사입니다. 불국사 다보탑 중수기록에 해당하는 〈무구정광탑중수기〉에 석탑을 중수하기 위해 필요한 석재를 장수사 근처에서 옮겨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장수사가 불국사 인근에 위치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현재 장수사지로 추정되는 마동사지에는 9세기 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이 남아있습니다. 이 절터가 장수사지인지 불분명하고, 석탑이 후대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현재 상황을 놓고 볼 때 과연 세 사찰이 동시기에 건립되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석굴암 건립 당시 세 조각으로 파손된 천개석을 천신의 도움으로 완성했다는 내용은 김대성이 석굴암을 창건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지엽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將彫石佛也)’라는 대목은 석굴암 축조과정과 차이가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석굴암은 본존불을 먼저 봉안한 상태에서 석실 축조가 이어지는 과정을 거쳐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천개석이 세 조각으로 쪼개진 상태로 시설되었다는 점도 엄정한 불교의 장엄법식과 상반되는 내용입니다.

천개는 불상의 하부를 장엄하는 대좌와 배경을 장엄하는 광배와 더불어 불상의 상부를 장엄하는 중요한 장엄구이죠. 더구나 석굴암의 천개석은 석실장엄의 정점이기 때문에 만약 천개석이 설치되기 전에 깨졌다면 다시 만드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석굴암 수리 당시 전면해체공사였음에도 천개석만은 철테를 둘러 고정한 상태에서 공사를 진행했죠. 조각난 상태의 천개석을 올려놓는 작업이 석실의 구조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천개석과 관련된 설화는 석굴암 창건이후 어느 시점에서 외부의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개석에 금이 간 상태에서 파생된 설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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