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 스님 리더십을 형성한다

조계사 장애인법회서 장애인 휠체어 이동을 돕는 스님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우리말로는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불린다. 교회에서 통용되던 이 말은 기업체의 리더십 교육에서 인용되더니, 어느 순간부터 일상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교회에서 섬김이라고 하면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우선 생각할 수 있으나 서번트 리더십에서의 섬김은 목회자가 신도를 섬기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서번트 리더십은 미국의 통신회사 AT&T에서 경영 관련 교육과 연구를 담당했던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가 1977년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동방순례(Die Morgenlandfahrt)〉를 읽으면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린리프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현듯 ‘지도자로서의 서번트’ 개념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추종자의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섬기는 마음과 자세에서 리더십을 찾은 것이다.

우월감·자만심이 ‘아상’ 형성
‘권위’ 버리고 ‘위엄’ 찾아야
상하주종 틀 바꿀때 신심 증장

〈동방순례〉는 신비로운 순례길에 나선 여행단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레오(Leo)는 여행단의 잡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서번트(servant, 시종)로서 여행단의 일원이 되지만, 여행단이 지치고 힘들어 할 때에는 노래를 불러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덕분에 여행길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레오가 사라지면서 여행단은 혼란에 빠지고 결국 여행 자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서번트 레오가 없이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평범하였지만 그의 평범함은 평범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행단의 일원이자 이 소설의 화자(話者)는 몇 년을 방랑한 끝에 마침내 다시 레오를 재회하게 되고, 그 여행을 후원한 교단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서번트로만 알던 레오가 실제로는 그 교단의 우두머리이자, 정신적 지도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레오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도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섬기고 스스로를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서번트’였던 것이다. 그린리프는 이러한 레오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섬기는 리더의 모습을 찾고 그 리더십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1977년, 그 내용을 담은 〈Servant-Leadership〉을 출간하였다.

일명 ‘섬김의 리더십’으로 불리는 서번트 리더십은 기존까지 리더십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손꼽히는 ‘보스(boss)형 리더’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동방순례〉의 레오를 통해서 지도자 혹은 리더란 ‘이끄는 사람’이라는 기존 관념에서 ‘먼저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변한 것이다. 그린리프에 의하면, 서번트 리더는 처음에는 서번트이다. 서번트 리더십은 진정으로 상대를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섬김은 이내 상대를 감화시켜 추종하게 만든다. 서번트가 리더가 되는 것이다. 권위와 이익을 우선시 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섬기는 자세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섬김은 절집의 하심(下心)과 다르지 않다. 하심이란 ‘자신을 낮추어 남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나를 낮추는 하심(下心)은 스스로를 비우기 때문에 스스로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남을 우러르고 존경하기 때문에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다. 하심은 자신과 남을 편안하게 해준다.

하심을 갖추기 위해선 상(相)이 없어야 한다. 〈금강경〉에서 이르기를 ‘상이 없으면 부처요. 상이 있으면 중생이다(無相卽佛 有相卽衆生)’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중생은 늘 상에 얽매인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잘났다’라는 자만심, 그리고 ‘나는 부자다’, ‘나는 높은 사람이다’, ‘나는 너보다 낫다’라는 교만감 등이 바로 아상(我相)이다. 어리석은 중생은 늘 이런 아상에 얽매인다. 아상이 강하면 나 중심으로 살기에 남을 배려할 줄 모르게 된다.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선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화를 내면서도, 내가 남을 무시하는 일에 대해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아상이 강하면 하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상을 없애기 위해선 하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와 내 것, 그리고 내 생각에 대한 자만심과 교만감, 우월감 등이 아상이기에 이를 내세우지 않는 마음을 우선 가져야 한다. 내세우지 않는 마음이 곧 하심의 출발이다. 내세우지 없으면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할 것이 없게 되면 걸릴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면 나와 네가 자유롭게 되고, 나와 네가 자유로우면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 하심은 이러한 것이다.

섬김 혹은 서번트를 목회자들이 중시하는 것 이상으로 하심은 스님들의 일상에서 강조되는 생활 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찰 생활에서는 ‘스님들이 권위적이다.’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스님은 ‘권위(權威)’는 있어야 하나 그 행동이 ‘권위적(權威的)’이어서는 안 된다. 권위란 다른 사람을 통솔하여 이끄는 힘이지만 권위적이란 지위나 권력을 내세우며 상대를 억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의 권위는 격식을 갖춘 태도에서 나오는 위엄과 엄숙한 몸가짐인 위의(威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권위적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권위적인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한 이론이 있다. 만일 스님이 신도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면 혹여 자신이 권위적인지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음향강도의 이론(the decibel theory)이다. 스님의 지위와 권한을 믿고 큰 소리를 쳐 신도를 굴복시키는 행위이다. 둘째는 주입식 이론(the sell theory)이다. 신도는 사찰 일에 대해 무지하다고 간주하고 주입식으로 하나하나 가르쳐주며 피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행위이다. 셋째는 최소 정보제공의 이론(the minimal information theory)이다. 스님들이 지시만 하면 그대로 순종하며 소임을 다하는 것이 신도의 자세라고 여겨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행위이다.

만일 어떤 스님이 신도에게 목소리를 크게 하거나, 신도에게 주입식으로 지시하거나, 신도에게 충분히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권위적이었고 하심하지 못했나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이 목소리를 크게 하고, 주입식으로 지시하고, 충분히 가르쳐 주지 않는 행동은 모두 자만심, 교만감, 우월감 등과 같은 아상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스님은 신도보다 본래 우위에 있고, 스님의 생각은 신도보다 옳다는 인식 등이 그러하다.

한국불교에서 스님과 신도 사이에는 상하 주종의 관계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하심은 스님과 스님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스님과 신도 간에도 필요한 마음이며 자세이다. 스님의 하심은 신도를 감화시킨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낮추면 오히려 상대방은 오히려 큰 감동을 받는다. 그것이 스님의 하심의 리더십이다. 스님은 보스(boss)가 아니라 리더(leader)가 되어야 한다. 보스는 권력과 위력으로 상대방의 강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우두머리이지만 리더는 선의와 열의로 상대방의 자발적 추종을 이끌어내는 지도자이다. 강제적 복종이 아닌 자발적 추종의 전제는 감화와 감동이며, 스님의 하심은 신도의 감화와 감동을 이끌어낸다.

그렇다면 스님의 신도에 대한 하심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섭법(四攝法)은 하심의 실천방법이 될 수 있다. 남에게 무엇을 베푸는 보시섭(布施攝), 남에게 온화한 말을 해주는 애어섭(愛語攝), 남을 이롭게 해주는 이행섭(利行攝), 남과 고락을 함께 하는 동사섭(同事攝)이 곧 하심의 실천이다.

보시섭, 스님은 신도를 위해 베풀어야 한다. 신도가 무언가를 구할 때 힘닿는 대로 베풀어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스님이 재물을 자신이 우선 취하지 않고 신도를 먼저 배려한다면, 신도는 감동받고 감화되며 스님에게 자발적 추종을 하게 된다. 또한 신도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정신적으로 이끌어주는 것도 스님의 리더십을 발현하는 것이다. 이에 스님은 물질적·정신적으로 얻은 바를 독점하지 말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신도의 이익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모든 인간이 행복해야한다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보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애어섭, 스님은 신도에게 부드럽고 고운 말을 써야 한다. 신도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교화하기 위해 유익한 가르침을 온화하게 말해 친근한 정을 일으키는 실천법이다. 온화한 말이라고 해서 아첨하여 꾸미는 말이 아니다. 스님이 말과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신도가 그 말에 귀 기울이게 함으로써 의사를 소통하고 나아가 교화를 하는 것이다. 비판과 충고의 말도 포함된다. 스님이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이 여겨 신도를 권위적이고 무시하는 말투로 억누르려고 하는 것은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만 할 뿐 결코 지도할 수 없다. 그럼으로 스님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서 겸손한 말씨로 쉽고 친근하게 신도를 대해야 한다.

이행섭, 스님은 신도를 이롭게 해야 한다. 신도에게 이익 되도록 행동, 언어, 의식 속에 선행을 담아 베푸는 일을 말한다. 스님은 항상 신도를 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행동해야 한다. 재정 소요가 큰 불사(佛事)를 하기 전에 신도에게 참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도 그러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는 언어적으로 항상 신도를 이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높여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는 교만과 다르지 않기에 스님의 이행섭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신도를 높여 이롭게 할 때에야 가능하다.

동사섭, 스님은 신도와 고락을 함께 해야 한다. 신도의 상황을 배려하여 고락(苦樂)과 화복(禍福)을 같이 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실천행위다. 스님은 신도와 같은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그를 위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지위가 높다고 자신은 비를 피하고 다른 사람은 낮다고 비를 맞게 하는 것은 스님이 할 행동이 아니다. 스님은 신도들 속으로 들어가 고락을 함께 해야 한다. 스님 자신은 높여 궂은일을 피하고 신도는 궂은일을 겪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사섭법은 아상이 있어서는 절대로 실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상대방보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고 또한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져서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도[布施攝], 친절한 말을 할 수도[愛語攝], 이롭게 할 수도[利行攝], 그리고 고락을 함께 할 수도[同事攝] 없다. 사섭법은 내가 너보다 잘났다는 마음을 없애고 자신을 상대보다 낮추어 하심할 때 비로소 실천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스님은 신도를 대함에 있어 ‘나는 스님이고 너는 속인인데’라는 아상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이러한 스님의 하심은 스님을 보스가 아닌 리더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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