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대중 관심, 성보 환수의 시작

고흥 수도암에서 도난된 칠성성군도(사진 왼쪽)과 2009년 열린 한국고미술대전-진짜와 가짜의 세계에 출품된 ‘주천열요무량성군중도’(사진 오른쪽). 수도암 칠성성군도의 방제 역시 ‘주천열요무량성군중도’였으며, 도상의 배치가 출품된 작품과 같다.

스님들의 수행처인 암자(庵子)는 사찰 주변에 인적이 드문 곳에 주로 세워졌다. 대부분의 사찰은 3~4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암주(庵主)를 임명해서 운영해왔다. 암자의 성보문화재 도난은 일제강점기 신문 기사에 여러 번 보도됐다.

1917년 1월 21일자 〈매일신보〉에 “충남 공주군 계룡면 하대리 김춘학(金春學, 35)은 김호준, 이덕진과 공모하고 1912년 4월 29일 밤 각각 방망이를 가지고 거촌면 사자암에 침입하여 승려 몇 명을 난타하고 불단 위에 있는 도금아미타불 일체를 강탈…”이나 1932년 2월 7일자 〈동아일보〉에 “경남 산청군 신등면 모례리 정취암에 지난 음력 12월 19일 밤 강도 2명이 침입하여 그때 마침 절을 지키고 있던 강강업(姜康業)을 무수히 난타한 후, 금불(金佛)을 강탈 도주하였다”라는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산 속 암자들 좋은 도굴 대상
일제~현대 도굴꾼 침범 이어져

칠성도·아미타삼존도·불상 등
고흥 수도사도 3점 성보 도난
도난 유사 불화 미술전에 출품

암자 성보, 조사 내용·사진 적어
연구·관심만이 환수하는 지름길

일제강점기 사찰에서는 주로 고려시대에 금속제로 만들어진 불상이 도난당했고, 중개상을 거쳐 일본인 수집가 등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 후기 불상과 불화가 도난당했다.

전남 고흥 수도암은 능가사와 금탑사와 더불어 전남 고흥을 대표하는 불교사찰이다. 조계종이 지난 2016년 발간한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에 따르면 현재 수도암에서 도난당한 성보문화재는 칠성성군도(1990.9.27), 아미타여래좌상과 아미타삼존도(1990.10.30.)이다.

수도암은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41번지 운암산에 위치한 암자로, 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지만, 1699년에 작성된 〈흥양모악산중흥사수도암불량기(興陽慕岳山中興寺修道庵佛糧記)〉에 의하며 수도암은 중흥사(中興寺)로, 해잠영허(海岑映虛)가 모악산(운암산의 옛 이름) 중턱에 있던 은적사(隱蹟寺)를 옮겨 중흥사로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1735년에 작성된 〈수도암중건상량문(修道庵重建上梁文)〉에 의하면 ‘1732년 봄에 퇴락한 암자를 계연(戒演)스님 등이 뜻을 세우고 권선하여서 수십 석재와 곡식을 모았으나, 소나무는 벌채가 금지되어 본사의 전각을 옮겨 수도암을 중건하였다’고 했다. 19세기 중엽에 수도암은 칠성각을 짓고 1860년에 7점의 칠성도를 조성하였다.

근대 수도암에서 소장한 성보문화재는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재산대장과 1933년 4월에 게재된 재산대장이 남아있어 시기별 소장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도난된 고흥 수도암 목조여래좌상(도난, 문화재청 제공, 사진 왼쪽)과 고흥 수도암 아미타삼존도(도난, 문화재청 제공, 사진 오른쪽)

1990년 9월에 칠원성군도 중 방제가 ‘주천열요무량성군중(周天列曜無量星君衆)’이라 붙은 불화가 도난당했다. 칠성도는 밤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신앙을 불교회화로 표현한 것으로, 북두칠성과 성군에 대한 신앙은 〈운수단(雲水壇)〉과 〈예참문(禮懺文)〉 등 17세기 간행된 불교 의식집에서 ‘칠성청(七星請)’이라는 절차로 정비됐다.

칠성에 대한 의례에는 주존으로 ‘금륜보계치성광여래불(金輪寶界熾盛光如來佛)’을 청하고 좌보처로는 소재보살(消災菩薩)을, 우보처로는 식재보살(息災菩薩)을 청한다.

수도암 칠성도 화면 외곽에 그려진 붉은 방제에 기입된 명문은 ‘칠성청’에서 봉청되는 칠불의 명호를 따른 것이다. 전각의 중앙에는 치성광여래,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북두칠성과 자미대제가 도해된 치성광여래도를 두고, 좌측과 우측으로 각 3폭씩이 걸려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불화는 기연(錡衍)을 수화승으로 영담(影潭), 선종(善宗) 등 12명의 화승이 그린 작품으로, 기연은 19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걸쳐 활동한 스님이다. 그런데 도난당했던 ‘주천열요무량성군중도(周天列曜無量星君衆圖)’가 2009년에 개최한 ‘한국고미술대전-진짜와 가짜의 세계’에 출품되었다.

이 두 작품은 12명의 성중들의 배치와 자세가 동일하고, 배경의 구름 처리와 채색도 같다. 도난 이후 화단 중앙의 성중이 입은 옷에 칠한 청색 안료가 박락되어 떨어진 면적이 더 넓어졌다.

1990년 10월 30일 도난당한 아미타삼존도는 앉아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이다. 1990년에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대웅전 향좌측에는 1860년 3월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도가, 향우측에는 지장시왕도가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고흥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 1991). 이 두 불화는 같은 해 정월에 고흥현감 박영찬(朴永贊)의 시주로 7폭으로 구성된 칠성도를 완성한 이후에 그려졌다.

아미타삼존도와 같이 도난당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螺髮)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가 표현되고, 이마 위에 주판알 같은 중앙계주와 정수리 부위에 낮은 정상계주가 있다.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려 촉지인(觸地印)을, 왼손은 무릎 위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조선후기 석가불의 수인으로 일제강점기에 존명을 다르게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바깥쪽에 걸친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 대의자락이 완만하게 펼쳐져 있고, 편삼을 두르지 않은 변형통견으로 입고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은 몇 가닥으로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이 불상은 인상이라 착의법 등에서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색난 스님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수도암이 중건된 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가 도난되기 이전 큰 사찰에 비하여 암자에 봉안된 문화재는 사진이나 조사 내용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불교미술의 연구가 깊어지면서 유물의 제작에 관련된 추론이 가능하여 조성 시기와 작가를 추정할 수 있다.

결국 사찰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나 신자들이 지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찾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도난문화재의 현황 파악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