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마음은 항상 여러분 마음으로 통해서 갑니다

자성의 능력에 대해서

질문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고, 자성이 본래 갖추어져 있어서 누구나 다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저는 육체적인 한계가 있고, 부족함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고, 드넓은 세상 속에서 한 조각 먼지에 지나지 않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제 안에 자성이 진짜로 있다면 그 자성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저에게 본래 주어진 자성의 힘을 참답게 믿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오.

답변 우리는 일면 생각하고 뛰면서, 뛰면서 생각하면서 집어먹고, 집어먹으면서 뛰고 이러는 세대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뜻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물질로서의 과학도 문화도 모든 게 발전이 돼서 우리 머리는 그때와 지금이 다릅니다. 그러니 오늘 요 대낮에 잠시 잠깐 빛이 비추는 걸 여러분이 아시죠. 어저께 밤에 또 주무셨죠. 매사 다 건건이 아시면서도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그 아시고 계신 그 자체가 자성(自性)입니다. 그래도 모르신다고 하시겠습니까? 불성이 어딨느냐고, 내놔 보라고 막 이러겠습니까?

이 점에 뒷받침이 될 얘기가 있습니다. 예전에 오조 홍인 선사가 육조 스님이 행자일 때 삼경(三更)에 들라고 해서 금강경을 설하시니 그 끄트머리에 대답한 육조 스님의 말이 있습니다. 네 가지 종류. 여러분이 나보다도 아마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뜻이 있습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말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래! “자성은 본래 생멸(生滅)이 없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까?” 그 ‘본래’가 참 중요합니다. “자성이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자성은 움죽거림이 없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이겁니다.

아마 내가 틀렸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뜻은 똑같습니다. 예전에 들은 얘깁니다마는 그걸 듣고서 참…. 여러분도 모두 감지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직껏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알고 있는 자성이 누군 줄을 모르신다면 어떡하겠습니까? 본래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들이고 내는데 말입니다. 손색이 없고 여여하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죠. 잘못되고 잘된 걸 다 놔라 이랬습니다. ‘잘못되고 잘되고, 좋고 나쁜 걸 아는 거는 다 놔라.’ 잘못되는 것도 나오고 잘되는 것도 나오고, 잘하는 것도 나오고 못하는 것도 나오고, 높은 것도 나오고 얕은 것도 나오고, 일체 평등하게 거기에서 그르고 옳은 게 다 거기서 나오니, 나오면은 바로 나오는 대로 재깍 자기가 알고 있단 말입니다, 또.

나오는 것도 알고 들이는 것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자성이. 그 자성(自性)의 원력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다 싼다 해도 두루 할 수 있는 그런 광대무변한 자리다 이겁니다, 자성 자리가. 일체제불이 같이하고 있고, 일체제불이 있는 자리에는 일체 중생이 다 같이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이 말을 20년, 30년 이렇게 되풀이하게 만들어야 합니까? 되풀이를 하되 그 되풀이하는 말이 끝이 없군요. 그 뜻을 아시란 말입니다, 뜻!

본래 청정하다. 자성은 본래 청정한 걸 알고 있는 거죠. 청정한 걸 알고 있는 그 자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고정됨이 없이, 청정한 거는 깨끗한 게 청정한 게 아니라 구정물, 더러운 물, 고름물, 핏물 다 한데 합치는 것이 청정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고정됨이 없이 한 찰나에 나투면서, 즉 윤회라고 해도 되죠. 반복하면서 제자리걸음 하면서 그저 찰나찰나 바꾸어 돌아간다. 이 사람 만났다 저 사람 만났다 고정됨이 없어. 만남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먹는 것도 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이 육체를 가지고 지금 살고 가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그걸 청정이라 한다. 그걸 거름 삼아서 내가 있는 것을 가지고 청정이라고 한다. 알고 있는 그 자체가 자성이다. 밝다. 지혜로워야 된다. 그 밝음을 깨닫는다. 이런 말을 나뿐만 아니라 수차에 거듭거듭 선조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대 성인도 말을 했고요.

지금 등이 여기 있습니다. 등이 있는데 등대 자체가, 예전에 선조들께서도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등대라고. 지금은 등잔이 아니라 전구가 있어서 불이 들어오죠. 이런 것도 바로 저 등대를 내놓을 자리가 있어야 내놓죠, 그렇죠? 그래서 이 몸뚱이는 등대에 비유했고, 마음은 등불에 비유했고, 또 믿음은 심지에 비유했고, 즉 말하자면 계행(戒行)은 기름으로 비유했고…. 여러분이 나보다 더 잘 아시죠. 지혜는 밝음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등대가 없었더라면 등잔을 어찌 매달아 놓느냐? 그러면 이 등대 자체, 몸뚱이가 화두인 것입니다, 화두! 그대로 전구도 저렇게 걸어 놓아지고 그 속에 선도 있고 밝음도 있고 전력도 있고, 기름을 계행이라고 했으니 전력을 말한 거죠, 지금으로 비유한다면.

그런데 얘기를 하면은 말만 듣지 마시고요. 다섯 가지고 네 가지고 한데 합쳐서 공존하고 있다 이겁니다. 따로따로 이름은 있으되 공존하고 있다. 눈과 귀가 따로따로 있고, 이름도 따로따로 있으나, 눈 간 데 귀가 가고 귀 간 데 눈이 속해 가더라. 또 무슨 시각이니 청각이니 감각이니 촉각이니 하는 말들도 말일 뿐이지 같이 혼합해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척 보면 척 돌아가, 벌써. 안 그렇습니까? 남이 우는 걸 보면 ‘아, 슬프구나.’ 이렇게 척 돌아가니까, 시각이다 감각이다 할 것도 없이 그냥 돌아가죠. 그 말은 벌써 뒤돌아 가 버려요.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은 돌아가니 그 말이 무슨 필요 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또 말을 하자 하면, 시각을 통해 거쳐서, 감각을 통해 거쳐서, 청각을 통해 거쳐서, 촉각을 통해 거쳐서 두각을 통해서 심장으로 깊이 들어서 불성으로 규합이 돼서 ‘타파가 된다, 돌아간다, 회전이 된다, 발끝까지 회전이 된다’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죠.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허나 우리 지금 공부하는 것은 우는 걸 봤으면 ‘어이구, 저거 왜 울까?’ 하다가 벌써 주위의 환경을 보면 슬퍼서 우는지, 기가 막혀서 우는지, 또 반가워서 우는지가 척 들어온단 말입니다, 벌써. 그렇게 척 들어와 알고 있는데 구태여 그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이런 공부를 하는 겁니다, 지금. 말을 하기 이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체의 자성, 그 자성은 묘각이라고 할까요? 아주 묘해서 여러분이 그대로 지금…, 내가 항상 하는 말이 그거죠. “마음을 좋게 가져라. 생각을 좋게 해라. 꿈을 꿔서 언짢더라도 좋게 생각하고 놓으면은 그대로 회전이 돼서 보이지 않는 50%에서 보이는 50%로 나온다. 그대로 믿고 그렇게 해라.” 하는 것이 말하기 이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말 이 공부를, 공부랄 것도 없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때로는 내가 떳떳하다고 생각을 할 때는 언제나 나 자신 부족함이 자꾸 느껴집니다. 또 자유스럽다 하고 껄껄껄껄 웃고 나서는 언제나 또 부족합니다. 그런 느낌이 자꾸 듭니다. 오늘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겁니다. ‘야, 참 이렇게 자유스럽고 떳떳하고 훌륭하고 참 좋은 법인데 왜 내가 자꾸 부족함을 느낄까? 아! 그러면 떳떳하고 자유스럽고 그렇게 좋은 법에 의해서 내가 어떡하면 전달을, 또 어떡하면 길잡이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중엔 부족함으로 그냥 느껴지고는 탈락이 됩니다. 이거는 도대체 버선목이니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정신세계 50%를 왕창 간파하려면
딱따구리가 나무 뚫듯이 언제나 자문자답하면서 생각 하나하나,
움죽거리는 하나하나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내 말은 한마디로 ‘당신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겁니다. 당신네들이 모두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간다는 그 자체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생멸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알기 때문에 만법을 스스로 갖춰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내고 들이고 자유자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유자재하고 있는 그 자체를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볕이 나고 지금 낮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개종했더니 배신한 느낌이 들어요

질문 저는 남편이 다니자고 해서 절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낯설어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절에 와서 스님의 법문을 들으니 좋기는 한데 어려서부터 함께 교회를 다녔던 분들에게 꼭 배신을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가르침을 바랍니다.

답변 우리가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데, 버스로 비유하자면 시발점에서만 버스를 타는 게 아닙니다. 내가 탈 때 내리는 사람도 있고 내가 내릴 때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시에 내리고 타고 하는 것이, 내리는 데 걸리지 않으면 타는 데 걸리고, 타는 데 걸리지 않으면 내리는 데 걸린다고들 하는데 모두 자동적이지 않습니까? 자동적으로 내리고 타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상대성 원리라고도 하고요. 정맥, 동맥이 없으면 이어서 돌아갈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자동적으로 내리고 타고 하는 그 가운데에 내리고 타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졌느냐는 얘깁니다. 그 마음은 어디까지나 자유스럽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했고, 자유를 자유대로 행하고 삶을 살 수 있기에 사람이라고 그런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체가 없는 마음을 맘대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자기 마음을 가지고도 자유스럽게 못 쓰고 있습니다. 관습에 매달리고 안 된다는 데 매달리니 괴롭습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차를 타는 데도 끄달리고 내리는 데도 습관적으로 끄달리는 겁니다. 왜 끄달립니까? 내가 갈 데가 있으면 묵묵히 차를 타는 거고 또 내려야 할 때 묵묵히 내리면 되는 거지, 남이 내리는 거 오르는 거 다 참섭하면서 온통 걸리고 돌아가니 그 노릇을 어떡하겠습니까. 내 육체를 여래의 집으로 삼고 흔들림 없이 도는 한마음의 그 심봉은 자유스러운 겁니다. 그런데도 생각하는 대로 여기 매달리고 저기 끄달립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끄달리는 겁니다.

그러니 내 안에서 나오는 일체의 생각을 나의 근본 자리에 되돌려 놓으십시오. 나의 관습과 사량으로 ‘이건 맞다 그르다, 이건 부족하다 적합하다’ 하고 판단하고 따지다가 보면 마음의 길에 한 발자국도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양심에 걸린다, 배신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다 내려놓으세요.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건 마음 씀씀이와 올바른 행동 그런 겁니다. 마음을 잘 써야 행동을 잘하고, 행동을 잘해야 진실한 말을 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말을 할 수가 있고, 여여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가 나게 하면 화가 나게 하는 것도 그 자리요, 화가 안 나게 하는 것도 그 자리이니 그 자리에다가 즉시 돌려서 화가 안 나게끔 하는 도리를 아셔야 합니다. 화나는 거 하나로 표현을 했지만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표현을 하기를 “구정물을 새 물로 갈아서 먹고 써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일체의 모든 것을 근본에 진실로 맡길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시기를 당부합니다.

불교를 믿어야만 구원의 길 가는지

질문 저는 천주교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절에도 한 번씩 가 보고 그러는 편입니다. 제가 이런 마음으로 선원의 법회에도 참석하고 그러는데 정말 이 불교를 믿어야만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고 저희같이 이렇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질문 잘했어요. 외국으로 다니면서 전 세계를 통해서 이렇게 종교를 볼 때 티베트 불교든지 알라신교든지 또 가톨릭교, 기독교 모든 것을 이렇게 종합해서 만나서 토론도 해 보고 또 이렇게 봤어요. 내가 볼 때는 불교(佛敎)라는 단어가 그냥 주어진 게 아니에요. 일체, 이 하다못해 풀 한 포기의 생명도 전체 생명은 불이에요, 불!

그리고 말로 통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뜻과 뜻으로 통하고 통신으로 통하고 그러는 거를 통해서 만나서 우리가 서로 보고 배우고 듣고 하는 것이 교(敎)예요.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그 단어는 방편 아닌 방편으로써 그것은 이름이자 진리예요, 그대로. 우주 전체가 돌아가는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게 불교가 아니에요. 그러니만큼 우리는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그 그릇을 다르게 하고 가는 거를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거는 주처에 근본이 있는 거지 바깥에 근본이 있는 게 아니다라는 얘기입니다.

나는 여기 뭐, 기독교든지 가톨릭교든지, 외국에도 가 보면 많이 이렇게 토론하러 오셔요. 그런데 하나도 틀리지 않아요. 왜? 불교고 기독교고 가톨릭교고 다른 게 없이 선지식은 전부 “딴 타의의 사람을 믿으면 마구니 소굴에 드느니라.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부터 알라. 주처는 바로 너한테 있느니라. 네 이 몸뚱이 속의 모든 생명들을 다스리고 나가는 선장, 바로 그 자체가 주인이니라. 그 주인부터 알아야 이 전 우주의 섭리, 하나로 돌아가는 이 이치가 바로 거기에 직결이 돼 있으니깐 알 수 있느니라.” 한 거거든.

그런데 기독교나 불교를 막론해 놓고 ‘아이고! 잘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 하나님! 부처님!’ 하고 찾거든. 이거는 기독교든 불교든 가톨릭교든 간에 그런 거를 말하는 게 아니고, 근본 너부터 알라 이 소리예요. 허허. 틀립니까? 어떤 종교를 막론해 놓고 그 이름을 떠나서 ‘너부터 알라’ 이 소립니다. 못났든지 잘났든지 네가 이 세상에 형성됐으니까 상대가 있고 종교도 있고 세상도 있는 거지, 네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 이거야. 그러니까 너부터 알아라 이런 거야.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때는…, 이게 어리석은지 모두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내 몸속에 생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의식들이 많고 모습들이 많아요, 천차만별로. 그런데 그거를 중간에서 다스리는 주인이 있어요, 자주 내가 얘기했듯이. 모두 이것을 들이고 내는 물질세계, 정신세계와 더불어 같이 중용을 할 수 있는, 그 들이고 내고 하는 그런 선장이 있다 이겁니다. 그것을 주님이라고 하죠. 그런데 주님을 바깥에서 찾으니까 내 하는 소리죠. 부처님도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인데, 만날 바깥으로 찾고 하니깐 그런 것이지 내가 왜 그러겠어요?

나는 이거고 저거고 이 종교 저 종교를 다 다르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본인들이 다르게 찾으니까 내 할 말이 없는 거죠, 뭐. 아, 자기부터 자기 마음속에 주님이 있고 그 이름이 모두,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이 있고 어머니의 이름이 있고 할머니의 이름이 있듯이 그렇게 이름만 달랐다 뿐이지 근본은 다 똑같아요. 그래서 예수께서도 “나를 믿고 나를 찾아라.” 이런 거지, 자기 몸뚱이를, 그 고깃덩어리를 찾고 믿으라는 게 아니었거든요, 본래는. 각자 너를, 진짜로 네 주인을 믿어라 이런 거지. 그런 건데 편집을 잘못했든가 뭐가 잘못된 게 있었겠죠.

이 부처님께서 그렇게 팔만대장경을 해 놨는데도 그렇게 모두 기복적으로 하는 데는 이런 이치가 있었죠. 물론 불교도 그렇지만 다른 것도 다 그렇죠, 뭐. 이조 때에 탄압을 받고 유교를 숭상을 시키고 불교를 해산시키고 이러는 바람에 스님네들을 그냥 놔두지를 않았기 때문에 산속으로 들어가서 그 모든 방편을 쓰고 이랬던 그 습이 아직까지도 그냥 내려오고 있는 것뿐이지, 지금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고쳐야 될 거고 개선해야 될 건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대로 할 뿐이죠. 그러니까 다른 게 없어요.

어떤 능력이 주어져 있는지요

질문 제 짧은 생각으로는 큰스님께서 직접 점안해 주신 선원의 부처님들은 눈 아닌 눈이 트였고, 귀 아닌 귀가 열려서 오고 가는 중생들의 마음을 둘 아니게 이끌어 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들께서는 부처님을 점안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하시는지 그리고 어떤 능력이 주어져 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부처님께 예를 올려야 참다운 예배가 될 수 있을는지 가르침을 구합니다.

답변 속 눈이 있고 겉 눈이 있습니다. 속 귀가 있고 겉 귀가 있습니다. 과거의 내가 살던 나의 자성 부(父), 즉 지금 나를 끌고 다니는 부가 있습니다. 그 자성 부와 현실에 사는 자(子)가 둘이 아니게 눈이 밝아져야 속 눈을 떴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정신세계 50%를 왕창 간파하려면 딱따구리가 나무 뚫듯이 언제나 자문자답하면서 생각 하나하나, 움죽거리는 하나하나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몸뚱이 속의 모든 생명체 의식들이 먹는 것도 혼자 먹는 게 아니고 하는 것도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말하는 것도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만나는 것도 혼자 만나는 게 아니고, 일하는 것도 혼자 일하는 게 아니고 돈 버는 것도 혼자 버는 게 아니고, 전체가 혼자 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몸속에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있는데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생이면서 공심이에요. 그리고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죠.

그러니 내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잘못한 것이 없으며 병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인 나에게 병고가 있는 게 아니며 업이 있다고 해도 내게 업이 있는 게 아니다. 붙을 자리가 없다 이겁니다. 그렇게 많은 것이 공동 분담으로 쉴 사이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쉬었다가 가다가 쉬었다가 가다가 이래야 그게 붙을 자리가 있는데, 쉴 사이 없이 돌아가거든요. 한 찰나에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렇게 너그럽고 넓고 크게, 좀 더 지혜롭게 마음을 냈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마음으로 항상 살아오던 습과 착에 매달리고 애정, 사랑, 욕심, 악의적인 애욕이라든가 이 모든 것을 다 한데 안고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 거기에 그만 막히는 거죠.

더군다나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똑같이 기복으로만 이끌어 가고 따라가니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요. 예를 들어서 옛날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찰은 많지만 그 사찰에 사람이 있어야 부처가 있느니라. 장님이 장님을 끌고 가다가는 넘어지기도 하고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지만 눈 뜬 사람이 장님을 끌고 갈 때는 절대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침착하게 잘 생각하셔서 다른 어떤 분들보다도 공부들을 열심히 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 얘기를 먼저 해야만이 납득이 될 것 같아서 얘길 했습니다. 부처님 점안식을 함으로써 그 속 눈이, 우리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체 부처님의 마음과 항상 통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항상 여러분 마음으로 통해서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통하는 줄 모르고, 받아들일 수가 없고, 그릇도 없고 그래서 받아지지 않는 것뿐입니다. 일체제불과 우리 스님네들의 마음이 첨보되고 종합돼서 한마음으로 눈, 귀, 발, 손 없는 손, 몸이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는 그 자체를, 그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 놓은 겁니다. 꽃에도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면 아주 이쁘게 자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아휴! 저건 별로보기 싫어.’ 하면 그것도 빨리 시듭니다. 정말입니다! 그렇듯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눈 밝고 귀 뜨게 해서 발 없는 발, 손 없는 손으로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발전시키고 창조력을 기르게끔 스님네들이 환희심을 가지고서 이끌어 주는 그 마음이 저 부처님한테 다 실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제부터 저 법당에 계신 부처님을 둘이 아니게 끌어 잡아당겨서 내 마음의 뿌리, 주인공에다 놓고 삼배를 올리든지 일배를 올린다면 정말 좋을 겁니다. 급하면 일배를 올려도 삼배가 되는 것이고 급하지 않으면 삼정례를 그냥 하시고, 칠정례나 팔정례나 삼정례나 일정례나 다 똑같습니다. 급하면 일정례를, 급하지 않으면 칠정례를 해도 되고 삼정례를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서 하는 거지 못 박아 놓은 게 아니다 이 소립니다. 이 세상 모두가 그래요. 먹고 사는 것도 모두 고정되게 못 박아 놓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때에는 이거를 해 먹기도 하고 저 때에는 저걸 해 먹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국수도 먹고 어떤 때는 밥도 먹고 어떤 때는 잡곡도 먹고, 고정되게 먹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거와 같이 마음도 역시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 씀씀이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 점안식 얘기 하다가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 놓으시면 여러분의 마음이 아주 간편하죠. 저 부처님 한마음을 끌어 잡아당겨서 내 마음으로 통하게끔 하나로 놓고 절을 하고, ‘주인공,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일배를 하더라도 그렇게 친근히 하신다면 아니 될 게 하나도 없어요. 모두 자기가 생각하고 움죽거리고 행을 하셔서 체험을 하시고 그 맛을 본다면 ‘부처님께서 보이지 않는 데서 저렇게 베푸시니 이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법이 또 어디 있을까!’ 하고 정말 한나절 울어도 시원치 않을 만큼 그렇게 즐거움이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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